제139화. 미궁의 마녀 (6)
상황이 불리해지자 수인족들은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죄악의 사도가 악마종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곳은 그리젤다의 권능에 의해 생겨난 이공간.
애초부터 그녀가 허락하지 않고서는 탈출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비, 빌어먹을!”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시간이라도 벌어!”
최후의 발악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후 음산한 기운에 휩싸인 수인족이 곧바로 암흑 마법을 시전했다.
화르르륵!
검붉은 불꽃이 나선형으로 주위를 에워쌌다.
제법 위력이 있을 법했지만 그건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는 실력 행사였다.
“어어?”
앞으로 향하던 불길이 갑자기 어지럽게 방향을 틀자 수인족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덤비면 내가 죽일 거야.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그리젤다가 위협적인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는 수인족들이 시전하는 암흑 마법을 가볍게 통제할 수 있단 걸 보여주었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할 시간인 것 같은데? 어찌 됐든 저 녀석들은 어차피 해치워야 했잖아?”
레이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르케도 인정사정 봐줄 필요 없다는 듯 곧바로 영계 마법을 시전한다.
“일단 결계부터 세워야겠습니다. 흩어져서 도망치면 귀찮아지니까요.”
발밑에 푸른 마법진이 펼쳐졌다.
투명한 장벽이 퇴로를 차단했고 수인족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고, 곤란한데.”
“이러면 목숨 걸고 전면전을 벌일 수밖에 없겠어.”
그리젤다는 건들지만 않으면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따라서 전요한 일행만 해치우면 당장의 위기는 넘기는 셈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운 후 수인족들은 일제히 덤벼들었다.
퍼퍼퍽!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레이나가 뻗는 주먹질에 놈들은 잔뜩 얻어맞고 몸을 휘청거려야 했다.
“크윽…!”
같은 수인족에게 이런 식으로 굴욕을 당하는 건 매우 화가 날 터다.
그럼에도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도 못한 채 볼썽사납게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실력의 격차가 너무도 현격한 탓이었다.
“잘했어. 마무리는 내가 할게.”
상황을 지켜보던 전요한이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수인족들은 독기 어린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이겼다고 생각하지 마라.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메데이아 님의 손에서 벗어날 순 없을 거야.”
예상대로 이들은 질투의 대리자, 메데이아를 따르는 자들이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너희들에겐 별 관심 없으니까.”
말을 마친 전요한은 녹티스를 휘둘렀다.
다시는 귀찮게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놈들의 숨통을 끊었다.
그러자 저 너머에서 지켜보던 그리젤다가 이리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
아직 신뢰가 부족한 탓인지 그 발걸음은 몇 보 정도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시선은 전요한의 일행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너희는 무슨 관계야?”
“친구이자 동료.”
친구라는 말에 그리젤다의 눈썹이 희미하게 반응했다.
오랜 시간동안 스스로를 봉인한 채 악몽에 시달렸던 그녀가 절실히 원하는 존재.
하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은지 이내 고개를 저어 보였다.
“혼자 남겨지는 편이 좋아. 난 모두를 불행하게 했으니까.”
그 심경에 반응하듯 남아 있던 촛불이 다시 격하게 흔들렸다.
레이나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전요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젤다와의 거리를 좁힌 후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췄다.
시선이 서로 마주치자 그녀의 운명카드가 눈앞에 떠올랐다.
[그리젤다]
길을 잃은 소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뜻하지 않은 행운을 불러올 수도, 참혹한 비극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운명의 갈림길에 섰을 때, 그 여부를 소녀가 결정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여러모로 난해한 내용이었다.
정체성은 물론이고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
그럼에도 전요한은 그리젤다를 데려가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미래시가 발동한 그의 시야엔 그녀가 온통 푸른빛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전요한이 결정을 내리자 시르케가 먼저 설득을 해보았다.
“…내가 죽여?”
“저번과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될 거야. 너의 악몽에 의해서.”
이면세계에 스스로를 봉인하고는 있으나, 그리젤다의 영향력은 외부에까지 미치는 중이었다.
정체 모를 안개가 생겨나서 마물들을 불러 모으고 이에 휘말린 인간들은 사념체에게 죽임을 당했다.
무의식적인 보호 본능이 그러한 기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과거의 기억 속에만 갇혀 있던 그리젤다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자책감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그리젤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창백한 피부와 비취색 머리칼을 지닌 푸른 눈의 소녀.
등에 작은 날개가 달리지 않았다면 누구도 그녀가 악마종인 걸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가자.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게 해줄게.”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지켜줄 테니 걱정하지 마. 목숨을 걸고 약속할게.”
왠지 그리젤다는 소미궁을 공략하는 데 반드시 필요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전요한은 과감히 그녀의 가녀린 팔을 잡아끌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자. 더 늦어버리기 전에.”
자신들은 괜찮을지 몰라도 안개에 휘말린 거점이 문제다.
다행히 그리젤다는 거부하지 않고 내 뒤를 따라왔다.
오두막집을 나오자 주위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바깥 세계가 두려운지 맞잡고 있는 조그마한 손에서 긴장한 듯한 힘이 느껴진다.
이윽고 왜곡된 공간이 원래대로 되돌아오자 거점의 광경이 점차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시르케가 그리젤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했습니다. 이제 더는 골머리를 앓지 않아도 되겠군요.”
“…….”
어린애 취급받는 게 부끄러운지 그리젤다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레이나가 조금 경계심이 풀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겠어? 그리젤다를 데리고 다니면 시선이 집중될 텐데….”
“오히려 나을지도 몰라. 왜냐하면 이대로는 메데이아가 가만히 있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리젤다가 다름 아닌, 소미궁에 잠들어 있었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녀는 상위 악마종인 만큼 앞으로의 공략에 적잖이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우선은 거점부터 재정비하자. 날이 밝기 전에 마물들이 또 침입할 수 있어.”
주위를 살피던 전요한은 살아남은 수인족들에게로 다가갔다.
이번 전투의 생존자들인데 선량한 편에 속하는 부류다.
녀석들은 눈을 깜박이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뭐, 뭐든 하겠습니다!”
“어떤 일이든 시켜만 주세요!”
거점을 정복하지 못한 수인족들은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자 한다면, 궂은일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한 모양이네. 그럼 뒤처리는 한번 맡겨보자고.”
기지개를 펴던 레이나가 윙크해 보였다.
그녀와 함께 일행은 다시 숙소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 * *
날이 밝은 후, 전요한은 상태가 불안정한 그리젤다를 돌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그녀와 가능한 친밀도를 올리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혹시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해?”
“칭호라면 편한 대로. 그런데 너처럼 어린애는 오빠라고 보통 불러.”
“오빠….”
민망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리젤다는 얼굴이 발개졌다.
“여긴 미궁 속이라 누군가의 공격을 받기도 하니까 항상 내 곁에 붙어 있어. 상황이 어렵다면 다른 아군도 좋고.”
“알았어.”
“그럼 나는 잠깐 뭐 좀 읽을게.”
이번에 받아들인 수인족들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이 있었다.
그리젤다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으음.”
뭔가 했더니, 이번 층계의 클리어 조건에 관한 것이었다.
이르면 오늘부터 거점을 점령한 집단끼리 맞붙어서 우열을 가리게 된다고 한다.
다음 층계로 진입하려면 최소 두 집단을 상대로 승리해야 한다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강자를 만날 확률이 오르게 된다.
‘출처를 보아하니 확실한 정보 같기는 하네.’
이리저리 방황하던 수인족들이 숲의 정령으로부터 알아낸 것이었다.
숲의 정령은 간혹 모습을 드러내는데, 모험가에게 오직 진실만을 알려주는 존재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리젤다가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뭐 해?”
그녀의 시선은 전요한이 들고 있던 보고서로 향해 있었다.
“잠깐 생각 중이었어.”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응. 미궁을 공략하려면 여러 가지를 알아야 하니까.”
수인족들 덕분에 계획은 대략적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거점을 점령한 다른 집단과 맞붙으려면 여기에 처박혀 있기만 해선 안 된다.
최소한의 방어 수단만 갖춰 놓고 다시 숲으로 향해야겠지.
놈들도 식량을 얻기 위해서는 언제까지고 거점에 머무르지 않을 터였다.
“복잡해… 하지만 왠지 오빠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이런저런 설명에 그리젤다는 잠시 치를 떨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웠기에 전요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어른처럼 굴긴.”
문득 눈앞의 순진한 소녀가 자신을 부정하는 가혹한 세계에서 받았을 고통이 상상되었다.
자책감에 일찍이 스스로를 봉인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시르케가 안으로 들어왔다.
“전부 읽어 봤습니까? 그렇다면 슬슬 준비를 해야겠군요.”
시르케는 한발 앞서 내용을 읽었으므로, 숲으로 나가야 한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응, 생각해 봤는데 넌 여기에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아.”
이번에 받아들인 수인족들까지 배치해두면 거점이 갑작스레 습격받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전요한이 체류할 것을 권유하자 시르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쩐지 저를 남기려 할 것 같더라니. 그렇다면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으므로 딱히 반대하진 않았다.
전요한은 그녀에게 그리젤다를 맡겼다.
“가자, 레이나. 초심자들을 때려눕히는 건 우리 둘이서도 충분하잖아?”
대미궁의 후반부에 비하면 여기는 사실 별것도 아니었다.
괜히 수인족들까지 이끌고 갔다가 혼란이 발생할 바엔, 둘이서 처리하고 오는 편이 낫다.
“왠지 너를 만나고 나서 고생만 하는 기분이네.”
거듭되는 전투로 레이나는 피곤한 표정이었다.
예전처럼 체력이 받쳐주지 않다 보니 조금은 관리가 필요하다.
“힘 빠졌으면 이거 먹어.”
전요한이 활엽수로 싸맨 무언가를 건네줬다.
레이나는 여우귀를 쫑긋 하더니 감별을 위해 코로 킁킁댔다.
“이건 훈제한 사슴고기잖아? 저번에 만든 비상 식량을 남겨둔 거야?”
“만일에 대비해서 아껴뒀어. 이렇게 보관해두면 며칠이 지나도 쉽게 상하지 않잖아.”
훈제한 사슴고기는 레이나가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그래서 포상용으로 준비해뒀던 건데, 예상대로 반응이 매우 좋았다.
“뭐, 뭐 이런 걸 다… 절대 식탐을 부리는 게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 말라고?”
레이나는 얼굴을 붉히더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사슴고기를 한입에 날름 먹어치운다.
“길들이기 쉬운 건 여전하군요, 레이나. 그러니까 전요한에게 항상 부려지는 겁니다.”
지켜보던 시르케가 팩트 폭격을 해왔다.
레이나는 부정한단 표시로 여우 꼬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아, 아니거든? 마침 얘가 맛있는 걸 가지고 있었을 뿐이야!”
잠시 오래된 동료 간의 소소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외부 경계를 맡고 있던 수인족이 달려온 건 그때였다.
“크, 큰일 났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