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미궁의 마녀 (5)
전요한은 일격에 수인족의 지척까지 파고들었다.
녀석은 다름 아닌 죄악의 사도.
계속해서 틈을 주면 곤란한 수작질을 부릴 터였다.
‘농락당하는 건 이제 충분해!’
혹시 모를 함정에 대비하여 잠시 상황을 지켜보긴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부정적인 미래시는 발동하지 않는다.
지금 놈을 베는 결과가 시르케와 레이나에게 곤란한 상황을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 상대도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낼 준비 정도는 했을 것이다.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백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귀공자가 뇌리에 나타났다.
알체른.
그는 아래를 보란 듯이 고개 돌리며 시선을 옮긴다.
“!”
일순간 어두운 색채의 마법진이 발밑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처음 소동을 일으킬 때 사용되었던 일종의 함정.
알체른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피해냈을 테지만, 덕분에 한발 앞서 허를 찌를 수 있었다.
“크윽!”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슬아슬하게 공격이 빗나갔다.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신 후, 다시 일격을 가하려 할 때 순간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 속임수다. 공격이 빗나간 게 아니라 애초에 거기에 없었을 뿐이지. 이곳은 상위 악마종에 의해 왜곡된 공간이란 점을 명심해라.
알체른이 다시 조언을 해왔다.
그는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할지 알려주는 대신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그래, 맞다. 속임수.’
조금 전엔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못된 곳을 노렸던 것이다.
알체른의 지적 덕분에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한 건 역시 조금 성급했던 탓이다.
“왜 그러시죠? 갑자기 저와 맞서는 게 두려워지기라도 하셨나 보죠?”
실력 차 때문에 주저한다고 생각했는지 수인족이 도발을 해왔다.
굳이 답하는 대신, 녀석의 모습을 왜곡된 주위 풍경에서 최대한 떼어내려 노력했다.
여긴 상위 악마종에 의해 뒤틀릴 대로 뒤틀린 공간.
그것을 상대가 활용한다면 움직임이 충분히 굴절되어 보일 만하다.
인내심을 갖고 정신을 집중하자 예상대로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고 녀석의 모습이 한결 또렷이 보였다.
미래시가 발동한 것이다.
- 승리를 직감했다면 확신을 갖고 놈을 베어라. 그것이 지금까지 너의 전투방식이었으니까.
나머지는 맡기겠단 듯이 알체른은 눈을 감았다.
그가 등을 떠밀자 전요한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속임수도 꿰뚫었으니 이제 한 방 먹여줘야 할 차례다.
“……!”
멍하니 바라보던 수인족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상대는 마치 먹잇감을 향해 도약하기 전의 맹수처럼 움츠린 자세를 하고 있다.
그 눈빛엔 일체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없이 오로지 확신만을 담고 있다.
‘예, 예상한 것 이상이잖아!’
어느 정도는 이런 곳에서 구른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묘하게 오차를 유도하며 허점을 노리려 했는데.
아무리 수작을 부려도 도저히 메워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다.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녀석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이 정도로 두려움을 느낄 리 없다.
죽음의 공포에 몸을 떨며 수인족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이대로는 사, 사냥당한다!’
수많은 악마들을 물어뜯고 최정상에 올라선 포식자에게!
녀석은 전의를 상실한 채 뒷걸음질 치다가 이어지는 후속 공격을 끝내 허용하고 말았다.
촤악!
검이 휘둘려지는 궤적을 따라 새빨간 피보라가 몰아쳤다.
치명상을 입은 죄악의 사도는 고꾸라진 후 잿더미로 화하여 사라지기 시작한다.
“훌륭한 일격이었어, 전요한!”
여차하면 원호하려던 레이나가 방긋 웃었다.
그녀는 이제 안심이란 듯이 여우꼬리를 흔들었으나, 시르케의 생각은 달랐다.
“아직 잔당이 남아 있습니다. 이쪽에 대항할 생각은 없어 보입니다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할 것 같진 않네요.”
죄악의 사도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놈들이라 그런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시르케는 영계 마법을 사전하여 미리 손을 쓰려고 했으나 타이밍이 한 발 늦었다.
“저주받은 악마종, 버림받아 마땅하고 평생 외톨이로 살게 될….”
수인족 중 하나가 악마종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이건 단순히 그녀를 자극하겠단 수준이 아니다.
“환영의 마녀, 그리젤다.”
말을 마친 수인족의 표정이 묘한 성취감으로 사악하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리젤다?
* * *
“놈들을 제압해! 더는 떠들어대지 못하게!”
위기를 직감한 전요한이 모두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시르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습니다. 아무래도 어린 악마종의 역린을 건드린 것 같군요.”
이름을 부른 것이 어째서 심각한 트라우마와 연결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쏴아아아아!
파도가 밀려온다는 사실이다.
환영의 마녀, 그리젤다가 이면세계로부터 일으키는 사념의 파도가.
“이, 이건 뭐야?”
“바다처럼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군요. 아무래도 그녀가 갇혀 있는 이면세계로 이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레이나와 시르케는 온몸의 감각이 묘하게 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숲의 풍경은 사라지고 없으며 백지로 된 공간의 너머에서 바다가 느껴진다.
“사념의 파도입니다. 악의 근원으로부터 몰아치는 재앙 그 자체죠.”
그리젤다의 의식에 잠식당하면 살아남기 위해 온갖 부정적인 사념과 싸워야 한다.
그런데 그것의 스케일이 커질수록 바다에 가까워지고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가 함께 드리워진다.
시르케는 정신 바짝 차려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강조했다.
- 그래… 내 이름은 그리젤다. 사념의 환영으로 모두를 죽이는 저주받은 마녀.
본래 정체성을 잊고 스스로를 구속하는 상태였던 악마종.
한때 6등급 재앙으로 알려진 그녀는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잦아들자 풍경이 일변하며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정말로 먼 바다에서 왔어?”
“와아, 나도 파도치는 거 보고 싶어!”
아이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숲속의 허름한 오두막집만이 눈앞에 있을 뿐.
시르케는 이것이 그리젤다의 기억과 관련 있음을 눈치챘다.
“여긴 그리젤다가 무의식중에 구현해낸 심상 세계입니다. 잘만하면 그녀를 만날 수도 있겠군요.”
다만, 단순한 환영이 아니고 이면세계의 근간이라 봐야 했다.
그녀를 찾아내서 제압한다면 안개를 비롯한 이상 현상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흥미롭네. 사념으로 이공간을 구축하는 권능을 지닌 악마종이라니. 미성년인데도 이 정도면 나중엔 정말 감당 안 되겠는데.”
온 감각을 파고드는 생생한 현실감에 레이나가 식은땀을 흘렸다.
전요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곧장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여기에 당분간 숨어 있어.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까.”
“괜찮아, 우리는 친구잖아?”
계속해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대화.
그것을 통해 짐작해보니 심상치 않은 예감이 들었다.
긴장감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일행은 오두막집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어두운 내부에 촛불의 불빛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불빛이 닿는 구석, 작은 날개가 달린 한 소녀가 웅크린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리젤다.
본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대화를 시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어울리지 말아야 했어… 나 때문에 모두 죽어버렸어….”
자조 어린 웃음이 그리젤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요한은 고민하다가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널 원망하지 않았을 거야.”
그리젤다가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잘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비쳐지는 미래시가 푸른빛이었으므로, 전요한은 도와주기로 결심했다.
“원망받아도 싸… 나 같은 건 미움받을 수밖에 없어….”
그리젤다의 자기 부정과 함께 촛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그녀의 주위에 어린아이의 시체가 생겨났고 내부 공간 또한 비틀리듯 왜곡되어 갔다.
“골치 아프군요.”
촛불이 모두 꺼지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게 명확한 상황.
시르케가 미간을 짚으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윽고 허공에 푸른 불꽃이 떠오르자 그리젤다가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
“그건…?”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은 푸른 불꽃 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시르케가 소환한 망자의 영혼.
그리젤다가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어린아이들이었다.
- 슬퍼하지 마, 우리가 마녀사냥을 당한 건 너의 잘못이 아니니까.
- 제대로 숨겨주지 못해서 미안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는데.
- 다음 세상에선 함께 즐겁게 놀자? 그때와 같은 바다가 있다면 우리는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원망하는 어조로 말을 남기는 영혼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이 진심 어린 위로의 말을 남긴 채 사라지자 그리젤다는 작게 흐느꼈다.
“흐흑.”
왜곡되어 가던 내부 공간이 정적을 유지한 채, 변화를 멈춘다.
눈치를 보던 레이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 아이는 인간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었던 거야?”
자신이 알기로 악마종은 전부 살육과 가학을 즐기는 존재였다.
시르케도 의외라 여겼는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다면, 적대할 필요까진 없을지도 모릅니다.”
간교한 술책으로 일행을 속일만큼 악랄한 상대가 아니었다.
단지, 과거의 비극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잠에서 깨지 않으려는 것일 뿐이다.
전요한은 그리젤다를 도와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널 여기에서 구원해줄게.”
“…무슨 말이야? 여긴 내가 지배하는 공간인데.”
오두막집의 촛불은 아직도 꺼지지 않았다.
질문을 해오는 그리젤다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책감 때문에 네 스스로가 묶여 있길 자청한 공간이잖아.”
“어째서 내게 관심을 갖는 거야? 그 후로 아무도 날 좋아해주지 않았는데… 혹시 날 이용하려는 거야?”
아직 남아 있던 촛불 하나가 위험하게 흔들렸다.
모두가 식은땀이 났지만 전요한은 전하려는 바를 또박또박 강조해서 변론했다.
“아니, 단지 널 지켜주려 하는 것일 뿐이야.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스스로 결정해.”
이런 곳에 갇혀 있기만 해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아낼 수 없었다.
전요한이 손을 내밀자 그리젤다는 고민했다.
“…진심인지 알 수 없어. 그래서 시험해 볼 거야. 정말로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젤다는 시선을 저 너머로 향하더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요구 사항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저 수인족들을 죽여. 날 아까 저주받은 악마종이라고 했으니까.”
“…….”
뒤쫓아 온 수인족들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전요한은 재차 확인할 겸 그리젤다에게 물었다.
“그럼 믿어줄 거야? 내가 했던 말들 전부.”
“절반쯤은.”
절반이라 해도 사실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어차피 죄악에 물든 수인족들은 이번 건과 별개로 처단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별 고민 없이 녹티스를 들어 올리자 수인족 중 한 명이 그리젤다에게 항의하듯 입을 열었다.
“저희가 당신을 자극했던 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의식을 수면 위로 깨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필요 없어. 그냥 죽어.”
“크윽….”
세 치의 혀로 적당히 구슬려 보려던 시도는 확고하게 거부당했다.
치명적인 오판에 입술을 깨무는 수인족.
녀석들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난 것처럼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