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미궁의 마녀 (4)
짧은 정적이 흘렀다.
사념체가 이쪽으로 다시 몸을 돌리자 보다 못한 레이나가 전요한을 채근했다.
“계속 보고만 있을 거야? 이대로라면 피해만 커질 거라고.”
자칫 잘못될 경우엔 죄악의 사도까지 생겨나며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르케는 잠시 기다리라며 레이나를 진정시켰다.
“아직 그럴 여유가 안 됩니다. 사념체 외에도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어린 악마종을 자극한 결과가 고작 사념체 하나만일 리 없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위협 요소가 있는데 함부로 나섰다간 위험해질 것이다.
물론 다 함께 덤비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테지만, 피해가 커질 터였다.
-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이제 알아버렸어. 아무도 날 이해해주지 않는단 걸….
콰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주위 풍경이 다시 한번 왜곡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공간상에 크고 작은 균열이 일어났다.
수많은 촉수가 일행의 빈틈을 노린다.
“우선 이 녀석들부터 해치워야겠네. 그것도 단시간에.”
전면전을 벌이는 것까진 무리일지 모르나, 최소한의 대응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전요한이 먼저 녹티스를 휘둘러 눈앞의 촉수 하나를 베어냈다.
혼란스러워하던 수인족들도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달려드는 촉수를 쉬지 않고 베어내며 안간힘을 써본다.
그렇다곤 해도, 역시 꽤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
걱정이 커진 레이나는 시르케를 향해 다그쳤다.
“영계 마법으로 안개를 거둘 수는 없어? 전에도 상위 악마가 일으킨 환영 마법을 없애버린 적이 있잖아.”
“그때와는 다릅니다. 지금은 전력을 절반가량 손실한 상태고, 상대도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르케는 안 그래도 노력 중이었는지 곧바로 반박해왔다.
그녀가 각성 모드에 돌입하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나, 그러면 마력 소모가 너무 크다.
아직 소미궁의 최심부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고려할 때, 지나친 실력 행사라고 할 수 있었다.
“네가 주저할 정도의 악마종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네. 성년기도 되지 않은 녀석인데.”
레이나는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수인족의 예리한 감각이 현 상태는 극도로 위험하다는 걸 알려주는 중이다.
“뭘 쫄아 있는 거야, 레이나. 너는 신화적인 괴수도 물리친 갈기 부족장의 딸이잖아?”
전요한은 씨익 웃으며 레이나를 독려했다.
그의 말에 잠시 여유를 챙기던 주위 수인족들이 웅성거렸다.
“갈기 부족장이라고?”
“그럼 저 여자애가…”
갈기 부족장은 수인족들 사이에서는 대영웅으로 인정받는 자였다.
갑작스러운 시선 집중에 레이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 지금 나를 최대한 굴리려는 속셈이지?”
레이나는 부족과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행동을 가장 싫어했다.
무언가를 다짐한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후, 정신을 집중한다.
화르르륵!
청록의 불꽃이 건틀렛으로부터 피어올랐다.
수인족이 사용하는 강기를 극도로 집중시켜야만 해낼 수 있는 점화 스킬.
레이나가 지면에 수직으로 내리꽂자, 원점 발화한 불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난잡하게 만연해 있던 촉수들이 일거에 소각되자 이를 목격한 수인족들의 입이 벌어졌다.
“역시 갈기 부족장의 딸이군.”
“이것이 바로 혈통의 차이인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경지야.”
레이나는 대미궁의 최심부까지 도달했을 만큼, 뛰어난 전력의 소유자였다.
소생한 지 얼마 안 되는 탓에 전력이 많이 뒤떨어진 상태지만 이 정도의 활약은 충분히 해낸다.
만족한 표정을 짓던 전요한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념체.
비록 피해를 입어 몸체의 일부가 소멸하긴 했으나 녀석은 아직 충분히 살상을 벌일 여력이 있었다.
사사사삭!
다시 한번, 사념체의 형상이 사라졌다가 삽시간에 레이나의 앞으로 나타났다.
역시 그녀가 최우선적인 제거 대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은 이를 예상했기에 타이밍에 맞춰 단검을 투척했다.
푸욱!
사념체의 내부를 파고드는 둔탁한 소리가 예측 공격의 성공을 알렸다.
“시르케, 지금이야!”
“알겠습니다!”
사념체가 주춤하는 사이에 시르케가 영계 마법을 시전했다.
일시적으로 능력 봉쇄 혹은, 마비 증상을 일으키는 술식이었다.
“어서 사라져버려!”
사념체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자 레이나가 녀석의 몸체에 랜스를 찔러 넣었다.
청록의 불길에 의해 사념체는 그대로 사멸했다.
정적이 흐르던 도중, 다시 악마종의 독백이 들려왔다.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어째서… 날 또 죽이려는 거야…?
악마종의 정신적 불안정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악몽을 심화시키는 금기어가 한 번 언급된 탓이다.
그래서 사념체까지 사멸한 이후에도 왜곡된 주위 풍경은 조금 전과 그대로인 상태.
주위의 일행이 죽어나가는 걸 지켜봤던 수인족들은 절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아… 이제 끝인가….”
물론 단순히 체념한 이들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절망하다 못해 집단 히스테리를 보이는 중이었다.
“더, 더는 못 견디겠어!”
“아아아악!”
거점을 차지하지 못해 밤새 야생에서 시달린 탓이다.
아무리 신체 능력이 뛰어난 수인족이라고 해도 극한의 상황이 지속되면 이처럼 신경 쇠약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대로라면 무고한 피해자가 또 발생할 텐데 말이지.”
불순해 보이는 수인족 하나가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전요한은 녀석을 유심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노력하는 중이긴 한데, 우리가 너희를 전부 지켜야 할 의무라도 있어?”
함께 휘말린 입장이다 보니 도와주고 있긴 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경쟁자 관계였고 신뢰 관계가 형성된 것도 아니다.
“내 말은, 도움이 필요하면 협조하겠단 거였어. 너무 아니꼽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수인족은 언제 그랬냐는 듯 태세를 전환했다.
녀석의 언행이 수상했는지 시르케는 눈을 매섭게 떴다.
“아까부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데, 이런 말을 할 필요 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는 일 아닌가요?”
겁에 질린 동료들 사이에서 유독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이었다.
시르케가 몰아세우자 수인족은 식은땀을 흘렸다.
“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진정하라구.”
조금씩 뒷걸음을 치더니 여차하면 달아날 기세다.
죄악의 사도라는 걸 확신한 레이나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허튼 수작 부리지 마. 네 정체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후후.”
정체를 들킨 수인족이 재미있다는 듯이 음산하게 웃었다.
이후 그의 어깨 너머로부터 단말마의 비명이 들려왔다.
“크아아악!”
많은 수의 수인족이 단체로 모여 있는 쪽이었다.
지면에 그려져 있는 어두운 색채의 마법진.
그 위에서 눈이 뒤집히며 쓰러진 한 명의 수인족.
교활하게 준비된 계획은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이번엔 또 뭐야?”
“빌어먹을!”
바로 옆에서 동료가 의식을 잃자 수인족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성을 잃은 자들의 눈빛에선 이제 전부 틀렸단 절망감이 묻어나온다.
“저, 전요한….”
“움직이지 마, 위험해.”
본격적인 대응에 앞서 전요한은 멋모르고 발을 떼려던 레이나를 제자리에 대기시켰다.
죄악의 사도들은 간계한 방법으로 상대를 함정에 빠뜨린다.
더군다나 이렇게 상위 악마종에 의해 왜곡된 공간에선 특히 녀석이 날뛰기 좋을 수밖에 없을 테지.
지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다, 다시 일어났다!”
“죽어버린 거 아니었어?”
마법진 위에서 의식을 잃었던 사내가 허리를 숙인 채 일어섰다.
음산한 기운에 본능적으로 동료들조차도 거리를 두고 있는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
전요한은 다급히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수인족이 실실 쪼개 보였다.
“내버려 두시죠.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만?”
마치 자신의 승리가 확실시된 듯이 여유롭고 의기양양한 모습.
놈을 채 밀쳐내기도 전에 저편으로부터 악마종을 자극하는 금기어가 들려왔다.
“악마종, 악마종, 악마종…!”
이 정도면 거의 함께 죽자는 수준이다.
시르케의 영계 마법으로 곧장 제압당하긴 했으나, 그가 내뱉은 말의 파급력은 클 것이다.
사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허나 마법진 위의 사내를 미리 제압하려 했어도 죄악의 사도가 시간을 끌며 계획을 완성시켰을 터.
이제 곧 맞이할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이젠 정말 지쳐 버렸다고!
콰드드득!
주위 풍경이 더욱 왜곡되며 거센 강풍이 불어왔다.
이윽고 사방이 검은 균열로 뒤덮였고 수인족들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 * *
“헉… 헉….”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현실 감각을 되찾기 위해 전요한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로써 대규모의 섬멸전이 한 차례 끝난 상황.
죄악의 사도가 일을 벌여준 덕분에 여기서 수련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금이 기회로 보입니다만.”
곁에 있던 시르케가 먼저 의향을 물었다.
그녀는 그간의 관찰을 통해 대응 방안을 마련한 상태였다.
“응, 서두르자.”
언제 다시 사념체와 촉수들이 출몰할지 모르는 일이다.
전의가 남아 있는 수인족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흩어졌던 인원을 결집시키는 중이었다.
나머지는 죄악의 사도가 굴복시켜 자신의 수하로 만든 상태.
대략 7~8명 정도였다.
“나는 뭘 하면 되는 거야? 죄악의 사도만 노려?”
레이나가 긴장한 표정으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아니, 넌 신호 보낼 때까지 나서지 마. 생각해둔 게 있으니까.”
레이나는 뛰어난 신체 능력을 이용하여 모든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녀를 전위로 보내버리면 전요한이 시르케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르케는 후위의 마법사 포지션이므로 여차하면 그녀가 노려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아, 알겠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야지.”
레이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이쪽으로 모이고 있는 나머지 수인족들을 향해 돌아섰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제법 미묘해진 분위기.
전요한은 문제가 된 원인을 확실히 하기로 했다.
“잘 들으세요. 이건 단순한 분열 상황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계획되었던 일이었다.
핵심적인 부분만 정리해서 말하자 레이나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린 악마종은 봉인되어 있는 상태였다고?!”
어쩐지 잠꼬대를 하는 것처럼 계속 혼잣말을 하긴 했다.
상위 서열에 속하기는 하나 무언가 사정이 있어서 봉인을 당한 상태로 보였다.
죄악의 사도는 전요한 일행을 자극제로 삼아서 그녀를 깨우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어렴풋이 눈치채긴 했습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말은 하고 있지 않았지만요.”
시르케의 시선이 반대편에 있는 수인족 무리로 향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전요한이 죄악의 사도를 향해 냉랭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불필요한 말다툼은 그만하자. 어차피 승부를 내야만 끝나는 문제 같으니까.”
이후 양측의 세력이 서로 맞붙었고, 요란한 소음과 함께 사방에서 스킬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후후… 주 전력으로 총공세를 하면 호락호락 당해줄 거라 생각한 겁니까?”
몇 차례의 공방 이후 죄악의 사도가 으스대듯 말했다.
탐욕과 광기로 가득한 눈빛.
잘은 몰라도 이것저것 원하는 바가 많은 모습이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어.”
지금까지 수많은 죄악의 사도를 물리치며 나아왔다.
마침 드러난 수인족의 빈틈을 파고들며 전요한은 녹티스를 휘둘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