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미궁의 마녀 (3)
“크윽! 조심해! 저 녀석, 제대로 날뛰려고 하고 있어!”
수인족 특유의 예민한 감각과 본능으로 심상치 않은 위험을 감지한 레이나가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크르르르….”
광기의 도살자가 붉은 두 눈을 번뜩이며 전요한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그를 최우선 제거 대상으로 삼은 모양이었다.
퍼펑펑펑!
마법 영창을 마친 시르케가 화염마법을 시전했다.
아까보다 더 강렬한 연쇄 폭발이 광기의 도살자를 보호하던 마력 보호막을 파훼했다.
비대한 살점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갔고 그로부터 심각한 출혈이 잇따른다.
“크롸아아아!”
잠시 몸을 사릴법한 상황인데도 광기의 도살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며 전요한에게 다짜고짜 돌격해온다.
“일기토를 신청하는 거냐? 그럼 사양하지 않지!”
여유로운 자세로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전장 한복판임에도 다른 몬스터는 녀석을 제대로 돕지 못하는 상황.
대부분이 레이나와 시르케의 공격에 으깨지거나 마법 공학 포탑이 토해내는 마력탄에 벌집이 될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방해받지 않고 광기의 도살자를 처리할 수 있다.
[3,000카르마를 소모하여 ‘하급 결계석’을 구입합니다.]
지금까지 모인 포인트가 제법 많았기에 거점의 가상 상점을 이용했다.
결계석은 대인 지뢰와 달리 살상력은 약하지만 구속 제어 능력이 뛰어나다.
치지지지직!
하급 결계석이 설치되자 곧이어 광채를 띤 마력 사슬이 광기의 도살자를 휘감는다.
“아무래도 지금이 결정타를 날릴 기회 같네.”
잠시 물러나 있던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그녀의 건틀렛이 반짝이더니 백청색의 강기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수인족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힘의 원천.
검사가 오랜 수련 끝에 이끌어내는 오러와 비슷한 개념이었다.
크르르!
자신을 향해 맹렬히 돌격해오는 레이나를 보며 광기의 도살자가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뿐.
녀석은 결계석의 마력 사슬에 몸체가 얽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푸우우욱!
건틀렛이 꿰뚫고 지나간 복부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났다.
다시 자세를 잡은 레이나가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했다.
그때, 광기의 도살자를 구속하던 마력 사슬이 일순간 끊어졌다.
광폭화로 폭주하는 진홍빛 마기를 끝내 버티지 못하고 결계석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쿠오오오오!”
굉음과 함께 무자비하게 내리쳐지는 핏빛 대도.
레이나는 이를 피하기 위해 공격을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이후 시르케가 영계 마법을 시전했고 나선형으로 휘몰아치는 푸른 불꽃이 광기의 도살자를 덮쳤다.
화르르륵!
푸른 불꽃은 진홍빛 마기를 압도하며 어스름한 살덩어리를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덕분에 광기의 도살자는 최후의 결전을 준비해야 할 정도로 취약해진 상태.
여기저기서 달려들던 변이체 권속들을 해치운 레이나도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어서 마무리를 지어, 전요한! 지금이 최고의 타이밍이라고!”
전황이 유리해서 그런지 그녀는 기세가 올라 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이대로 광기의 도살자가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들 조심해. 녀석에겐 아직 최후의 한 방이 남아 있으니까.”
마무리 일격을 노리고 있던 전요한이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괴수들에게 명령하여 광기의 도살자를 전력으로 협공하게 했다.
퍼펑펑펑!
연쇄 다발적인 폭발이 광기의 도살자를 덮친다.
그로 인해 살점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내렸으나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온다.
“크르르르!”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광기의 도살자가 붉은 눈을 부라렸다.
서리 불꽃에 의해 잠식당한 채, 여러 개의 바람구멍이 나버린 몸체.
여전히 비대하긴 하지만 이전보단 덜 위압적인 그것이 순간 흉측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서, 설마?”
심상치 않은 광경에 레이나가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둔탁한 폭발음과 함께 광기의 도살자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 수백여 개의 파편이 시야를 덮쳤다.
한편, 자폭을 예상했던 시르케는 한발 앞서 그에 대해 나름의 대비를 해둔 터였다.
늦지 않게 거대한 장벽을 생성하여 자폭으로 인한 피해를 완전히 봉쇄한다.
“다들 무사해? 다친 데는 없어?”
레이드가 끝나자 레이나가 먼저 말을 건네왔다.
전요한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세워보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이 정도로는 당해주지 않으니까.”
“어서 잔당을 마무리 짓도록 하죠. 공격대장도 사라졌으니까요.”
잡담할 여유 따윈 없다며 시르케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머지는 전부 평범한 마물들뿐이잖아?”
마법 공학 포탑의 화력에도 밀려서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는 녀석들이었다.
뿌옇게 내리깔린 안개를 가르며 전요한은 자신 있게 앞장섰다.
* * *
몬스터들의 사체가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다.
예상대로 전력은 별로 보잘것없는 개체들이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까는 감지하지 못했던 존재가 느껴집니다. 은신 마법이라도 썼던 걸까요?”
안개 너머를 바라보며 시르케가 고개를 갸웃했다.
슬슬 걷힐 거라 생각했는데 그 밀도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짙어지고 있다.
“으으… 대체 여긴 어디지.”
이젠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렸는지 레이나가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외견상으론 한참 전부터 같은 루트를 무한 반복하는 상황.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로선 광활한 늪지대에 빠진 기분일 것이다.
“언제쯤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여기는 우리 거점이잖아.”
레이나가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전요한은 뒤돌아보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벗어나려고 하면 안 돼. 오히려 더 깊숙이 들어가야 하지.”
“응? 그게 무슨….”
“이건 일종의 의식 교란이야. 눈앞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당하지.”
그래서 중간에 방향을 틀지 말고 최심부를 향해 우직하게 전진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
알고 보면 간단한 파훼법이지만 그걸 단번에 알아차리긴 어렵다.
상황을 설명해주자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게 최선이겠군요. 근원을 없애지 않으면 안개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만한 이상 현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마녀가 유력했다.
아직 제2층계에 불과하니 메데이아가 직접 나섰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정체를 추측해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앳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왜 싸우는 거야…? 혹시 또 나 때문이야?
안개를 일으킨 악의 근원.
왜곡되기 시작하는 주위 풍경에 모두의 표정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 * *
“이런. 조금 늦어버린 건가?”
“아무래도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나 보네요. 저번처럼 기습해올지 모르니 조심해야겠습니다.”
레이나와 시르케가 잔뜩 긴장한 채로 주위를 경계했다.
전요한은 말없이 자신의 위치에서 상황을 주시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자극해선 안 돼. 왜곡 현상이 더 심해지면 그로 인해 모두의 발목이 묶일 거야.”
지금 저 소녀는 모종의 이유로 의식이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모두에게 주의를 주며 다른 존재가 있진 않은지 확인했다.
“다행히 성가신 녀석들은 없나 보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집단이 끼어들면… 어라?”
레이나가 말을 멈추고 귀를 쫑긋했다.
이후 그녀의 시선이 향하던 너머로부터 수인족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거야?”
“거점을 빼앗으려고 온 건데 이러고 시간낭비나 하는 중이라니, 제대로 말아먹었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여기로 찾아온 목적은 상당히 불순했다.
‘괜히 방해만 될 거 같은데.’
전요한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나부랭이들 대신 이상 징후를 일으킨 장본인에게 집중해야 하는 탓이었다.
- 홀로 남겨지는 건 싫어. 난 모두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처량한 독백은 무의식적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하지만 그녀가 위험한 존재라는 걸 감안하면, 조심할 필요성이 있었다.
“젠장… 또 무슨 일이….”
“너, 너무 무섭다고.”
우연히 조우한 수인족들이 움츠러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심령 현상 때문에 정신적 혼란이 극한까지 치달은 모습.
하나같이 신경질적이고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빌어먹을 악마종 같으니…. 네년이 하는 말 따윈 하나도 관심 없다고….”
이상 증세를 보이던 한 명이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은 건 그 순간이었다.
악마종.
주위에서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을 때 의심해볼 만한 존재다.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계속 들어보니 확실해 보였다.
“하아….”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전요한은 이어질 공격에 대비했다.
이렇게 된 이상 같은 일행이라도 챙겨야 한다.
- …악마종? 아직도 내가 악마종이라고 받아주지 않는 거야? 이 세계에 남고 싶어서 난 모든 걸 포기했는데….
상대는 완전히 능력이 개방되지 않은 미성년의 나이.
그런 악마종은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면 이성을 잃고 날뛰는 경우가 많다.
콰드드득.
기괴한 소리와 함께 주위 공간이 급속도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풍경이 일변하며 지옥도와 함께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 이제 어쩌지?”
“모르긴 몰라도 저번보다 더 심각해진 것 같습니다만.”
레이나와 시르케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오랜 경험을 통해 그녀들은 앞서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다.
- 내가 원했던 게 아니야… 그런데 모두 죽어버렸어… 그들이 이상한 말을 해서 부추기는 바람에….
현 상황에서의 유일한 대비책은 우선 듣는 것이다.
무언가 악몽을 꾸는 듯한 말투인데, 그 여파가 그림자처럼 발생할 터였다.
사사사삭!
안개의 저 너머로부터 거무스레한 무언가가 일순간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후 그것은 다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아까 문제 발언을 내뱉었던 수인족이 머리 위에 나타난 어떤 형상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기괴하게 그려진 추상화가 실체를 갖춘 것처럼 괴이한 형상을 한 사념체.
주위의 모두가 반응도 하기 전에 사념체는 마수를 뻗어 주인의 심기를 거스른 수인족을 가차 없이 응징했다.
푸콱!
파열음과 함께 수인족의 사지가 일순간 잘려나갔다.
실로 허무한 죽음.
동료가 무력하게 참살당하는 모습은 모두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미, 미친….”
“말도 안 돼….”
트라우마가 도져서 성급히 자리를 이탈하는 인원까지 발생한다.
“으아아아!”
한밤중에 거점을 털려고 올 정도로 담대한 녀석들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동요하지 말고 내 말을 잘 들어. 사념체는 이제부터 도망치려는 자를 우선적으로 노릴 거야.”
“그, 그럼 저 사람은?”
레이나가 저만치 도주 중인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성 역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사념체에 의해 참살을 당하고 말았다.
“쿨럭….”
허리가 두 동강 난 여성이 눈을 부릅뜬 채로 피를 토하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희생자는 두 명.
함께 자리에서 이탈하려던 몇몇 이들은 두 다리가 얼어붙었고 그들의 지도자인 수인족 역시 이성이 마비되었는지 말을 더듬거렸다.
“어, 어떻게 해야….”
자고로 강자와 약자의 개념은 상대적인 것.
강철 부족의 일원들에게 모두 인정받은 전사도 이 순간만큼은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