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미궁의 마녀 (2)
마물들의 습격이었다.
심연의 존재라서 밤이 깊은 시간에 더욱 흉포하고 활동성이 높아진다.
“다른 생존자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어서 밖으로 나가죠.”
시르케가 서둘러 전투에 참여할 것을 재촉했다.
“아무래도 만만치 않은 맹공이 시작된 것 같네.”
“오늘 밤은 이대로 무사히 넘어가나 했더니… 틀려 먹었어.”
몰려오는 마물들을 보며 레이나가 표정을 굳혔다.
날이 어두워져서 기습에 취약한 상황인 건 둘째 치고, 휴식을 방해받는 게 싫다.
그녀의 고기 스튜가 아직 남아 있는 걸 보며 전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수인족은 식사 시간을 방해받는 걸 끔찍이도 싫어한다.
‘이번엔 좀 난폭하게 싸우겠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녀가 이성을 잃는 편이 좋을 수도 있었다.
대미궁의 마지막 층계까지 함께했던 동료다. 전투방식이 가끔 저돌적이긴 하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일단 마법 공학 포탑은 전진 배치할 필요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거점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서 싸워보죠.”
옆에 있던 시르케가 먼저 제안을 해왔다.
시기적절한 판단이었기에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자. 내구도가 조금 닳긴 했어도 앞으로 몇 시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야.”
“흑마법사를 처치하고 얻은 전리품도 활용하는 게 어떻겠어? 딱히 아껴둘 만큼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레이나가 말했다.
그녀는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마물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퍼걱! 푸콱!
상당한 규모의 군세였는데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레이나의 부탁이니, 한번 써먹어볼까. 골동품 상점에 팔아먹기도 뭐한 물건이고.”
전요한은 품에서 허름한 고서를 꺼내 들었다.
카이론의 비술서.
이걸 활용하면 저번에 쓰러뜨렸던 괴수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아군으로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소생하려면 그만큼의 제물이 필요하겠지.’
마침 눈앞에서 마물들이 무더기로 죽어가고 있었다.
놈들의 희생을 원동력으로 삼아 비술서를 활성화해 봤다.
“원리를 몰라도 마력만 부여하면 자동으로 흑마법이 시전되는군요. 제작에 꽤나 공을 들인 비술서입니다.”
검푸른 빛을 발하는 고서를 보며 시르케가 말했다.
전요한이 휘파람을 불자 널부러져 있던 괴수들이 눈을 번뜩이며 몸을 일으켜 세운다.
“저번에 상대할 땐 상당히 골치 아팠는데… 이렇게 아군이 되고 나니 든든하네요.”
제법 위용 있어 보이는 괴수들의 모습을 보며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론이 부리던 권속이니만큼 하나하나가 우두머리 수준.
오늘 밤에 사용할 카드로 손색이 없었다.
[외곽 지대에서 몬스터 군세의 침입이 감지되었습니다!]
[거점의 초입부가 격파당했습니다! 해당 구역의 수호석이 비활성화됩니다!]
[거점의 중부가 격파당했습니다! 해당 구역의 수호석이 비활성화됩니다!]
방어진을 구축하고 기다리자 경계경보에 가까운 시스템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예상대로 침공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조바심이 날 법한 상황이었으나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몬스터 군세가 거점의 최심부로 진격해오고 있습니다!]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여 중추석을 수호하세요!]
어느덧 침입한 몬스터들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몰려와 있었다.
적의를 감지한 녹티스가 서슬 퍼런 마력을 내뿜기 시작했고 모여 있던 괴수들도 그르렁거리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이윽고 지면이 울리면서 놈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혹여 적진에서 아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대기하세요. 절대 앞으로 뛰쳐나가거나 해선 안 됩니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시르케가 미리 주의를 줬다.
그녀는 점차 농도가 짙어지는 마기를 통해 마녀가 이번 전투에 개입하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몬스터 군세가 거점의 최심부로 진입했습니다!]
화산재처럼 짙은 회갈색 안개가 전운처럼 점차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상위 악마와의 결전 당시와 상당히 유사한 상황이다.
“사, 살려줘!”
“으아아아악!”
짙은 안개 너머로 가장 먼저 보인 건 쫓기듯 달려오는 인파의 모습이었다.
“뭐, 뭐야 어째서 우리 부족의 일원들이 여기에?!”
전방에서 혼자 싸우던 레이나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시르케의 경고를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인다.
“그냥 물러나 있어, 레이나. 내가 알아서 해치울게.”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다독인 후 전요한은 괴수들에게 공격 신호를 내렸다.
“캬아아아!”
“키루루룩!”
저마다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 녀석들이 쫓겨 오던 인파를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레이나의 표정이 믿기 어려운 듯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응?”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얼굴 없는 괴생명체로 변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도플갱어야. 환각 마법을 사용해서 상대에게 소중한 존재의 모습으로 접근해오지.”
녀석들의 촉수 공격에 당하면 치명적인 신경독 때문에 산송장이 되어버린다.
물론, 레이나도 대미궁에서 잔뼈가 굵었던 수인족이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위, 위험하잖아! 그런 건 미리 이야기했었어야지!”
단지, 너무 오랫동안 잠이 들었던 탓에 감각이 무뎌졌을 뿐이다.
그녀는 뒤로 물러난 후, 우두머리 괴수들만 계속 날뛰도록 내버려 뒀다.
[1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15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덕분에 전요한은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오늘 밤 침공해오는 몬스터들을 해치우면 이렇게 한정적으로 포인트가 벌린다.
그중 일부는 거점 방어를 위해 다시 소모해야 하지만 말이다.
[1,000포인트를 소모하여 ‘대인 지뢰’ 1기를 설치합니다.]
전방에 대인 지뢰를 원격 배치하자 곧이어 굉음과 함께 그 주위의 몬스터들이 폭발에 휩쓸렸다.
콰아아앙!
[1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15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짙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는데 지금 몰려오는 몬스터들은 상당히 밀집한 상태이다.
그래서 대인 지뢰의 효율이 제법 좋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적진에 일시적인 공백만 만들어낼 뿐, 대규모 웨이브를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크롸롸롸!”
“키에에엑!”
최전방에 배치했던 우두머리급의 괴수들이 조금씩 상처를 입어갔다.
녀석들의 배후에서 마력탄을 토해내는 포탑 역시 과열로 인해 내구도가 점차 깎여나가는 상황.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불길한 무언가가 새롭게 출현할 조짐을 보였다.
스르르르.
저만치 쌓여 있는 몬스터 사체들 사이로 음산한 기운이 휘감기듯 맴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분해된 살점과 뼛조각들이 응집하며 어떤 형상을 갖춰갔다.
비대하면서도 흉측한 외형의 이족보행 돌연변이.
주위의 다른 녀석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레이드 몬스터인 모양이군요.”
“이렇게나 몰려오는 와중에 돌연 생성되다니… 여기서 대기하고 있지 않았으면 곤란할 뻔했네.”
뒤에서 지켜보던 시르케와 레이나가 곤란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까지 전투가 길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전요한 쪽으로 집중되었다.
“뭐, 해치우면 그만이지. 괜찮은 보상을 줄 수도 있잖아?”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수밖에 없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지 알아보기 위해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곧이어 초승달 형태의 푸른 오라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고, 위협을 느낀 돌연변이가 이쪽을 향해 괴성을 내질렀다.
“쿠오오오오―!”
* * *
광기의 도살자.
녀석은 핏빛으로 물든 대도를 들고 있었다.
주인의 체격만큼이나 거대하고 넓적한 그 무기는 한 차례 드높이 들어 올라가더니, 이윽고 굉음과 함께 지면을 강타했다.
콰지지지직!
지면이 갈라지며 뻗어 나간 진홍색 마기가 반대편에서 전요한이 날렸던 푸른 오라와 맞부딪친다.
그로 인해 충격파가 발생했고 영향권에 있던 주위의 몬스터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요한의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치다니….”
“잘은 모르겠는데 등급이 상당히 높은 개체인 것 같네.”
지켜보던 시르케와 레이나의 표정에 긴장한 기색이 어렸다.
“방금 눈으로 확인했겠지만, 공격대장은 강력한 우두머리야. 게다가 수준급의 지휘 능력까지 지니고 있지.”
이 사실을 모른 채 전투에 임했다면, 아마도 곤란한 상황이 발생했을 터다.
지능이 높은 우두머리는 교활한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광기의 도살자가 나타나고 나서부터 아군인 우두머리급 괴수들은 조금씩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캬아아아!”
“키루루룩!”
밀려오는 몬스터 군세가 발을 묶은 탓에 녀석들은 저만치서 진홍색 마기를 날려대는 광기의 도살자를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광기의 도살자가 곡사포처럼 입에서 토해내는 불안정 유기체도 상당한 문젯거리였다.
질퍽한 소리와 함께 묵직하게 생긴 핏덩어리가 이쪽으로 떨어지자 전요한은 모두에게 전투태세를 갖추게 했다.
“이제부터 우리도 참전하자. 계속 내버려 두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식할 거야.”
얼핏 보기에 핏덩어리 같지만 실은 저건 바로 변이체의 막 태어난 유충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곧 고치로 변하며 견고해질 것이기에 서둘러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츠르르르.
서슬 퍼런 검신에 의해 표피가 꿰뚫린 유충이 기분 나쁜 녹색 액체를 쏟아내며 뒤집힌다.
유충 상태에서도 위협을 감지하면 폭발하여 맹독 물질을 퍼트리기에 상당히 귀찮은 존재.
본격적인 레이드에 앞서 그 위험성을 미리 알려주었다.
“변이체 권속은 체구가 상대적으로 작지만 그만큼 날쌔며 군집 행동을 선호해. 심심치 않게 자폭 테러도 감행하지.”
갈고리 형태로 예리하게 튀어나온 발톱과 우악스러운 앞니.
녀석들이 그걸 앞세워 무더기로 달라붙으면 고립된 상황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적진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는 건 여러모로 피해야겠죠.”
“전요한, 너는 오러라도 날릴 수 있지만 나는 초근접 전투형이잖아? 아쉽지만 일단 뒤로 빠져 있을게.”
시르케와 레이나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전요한은 광기의 도살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녀석은 계속해서 권속들을 토해내며 우두머리 괴수들을 향해 진홍색 마기를 날려 보내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저 녀석의 기세를 꺾어 줘야겠군.”
전요한은 덤벼드는 마물들을 녹티스로 베어내며 다가갔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광기의 도살자가 괴성을 내질렀다.
“키아아아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변이체들이 하나의 지류를 형성하듯 모여들기 시작한다.
녀석들이 거의 군집했을 즈음 거점 상점에서 대인 지뢰를 새롭게 구입했다.
콰아아앙!
[1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15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2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
벌이는 그렇게 썩 만족스럽지 않으나 골칫거리를 한 번에 제거하는 수단으로는 이게 제법 괜찮다.
모여든 변이체들이 대부분 폭사해 버리자 광기의 도살자는 이쪽을 향해 넓적한 대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아마도 진홍색 마기를 다시 날리려는 것 같은데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순순히 당해줄 줄 알고!”
거리를 거의 좁혀오던 전요한이 눈을 부라렸다.
그가 녹티스를 들어 올리자, 더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광기의 도살자는 광폭화 상태로 돌변했다.
쿠오오오오―!
군중제어 스킬, 「망자 군주의 포효」를 시전하면서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