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미궁의 마녀 (1)
“그 정도로는 나를 막지 못해!”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전요한은 오히려 기세를 드높였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검푸른 불꽃송이를 그대로 베어 넘기고 거리를 좁힐 생각이었다.
스릉!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가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 순간, 창백한 피부를 지닌 흑발의 사내가 뇌리에 떠올라서 말을 걸어온다.
- 흑마법사의 공격패턴은 다양하다. 절대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대응하면 안 돼. 숨겨진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바람의 검사, 라시엔.
어째서인지 낯이 익은 얼굴과 목소리였다.
일전에 마주했던 두 인물들처럼 그 또한 녹티스의 옛 주인이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의문을 가질 여유 따윈 없어.’
전요한은 그저 라시엔의 도움을 받는 일에 집중할 뿐이었다.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왠지 모를 그리움에 이끌리게 된다.
촤아아악!
검푸른 불꽃 송이들이 검격에 갈라지더니 허공으로 흩어졌다.
갑작스레 달라진 움직임에 카이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뭣이?!”
다급히 암흑 장막을 펼쳐보지만 전요한은 거침없이 연속 공격을 퍼부었다.
“소환 마법을 완성할 시간은 주지 않겠어!”
얼마 전부터 카이론은 상위 악마를 불러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다.
라시엔과 함께 검을 맞잡은 채, 전요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검술의 심상이 떠오르는데, 그 이치가 매우 심오했다.
실패했을 경우의 위험이 적지 않았지만, 기회를 놓치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스르르르!
녹티스가 서슬 퍼런 불꽃을 사납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눈앞에 그려지는 희미한 윤곽선이 어느덧 완연한 실체를 갖추었을 때였다.
순간 뇌리에 어떤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쾌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검술로 거상의 괴마를 압도하는 라시엔.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전요한이 시전하고자 하는 궁극의 검술이었다.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수차례 검흔을 남긴 끝에, 마침내 괴마를 쓰러뜨린 라시엔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 지금의 수준이라면 분명 따라할 수 있을 거다. 왜냐하면 너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니까.
‘라시엔이 나라고?’
전요한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뇌리에 나타났던 인물들은 전생의 모습이란 말인가.
하지만 깊이 고민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흑마법사를 물리치는 일에 집중해야 했던 탓이었다.
-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없어질 땐, 단지 그것만 신경 쓰면 된다.
라시엔은 웃는 건지 슬퍼하는 건지 모를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손을 잡자 눈앞의 영상은 사라지고 다시 현실의 감각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전요한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라시엔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 움직임은 유려하면서도 끊어짐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일관되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한 변칙성을 내포하는 극의.
그것은 무한히 뻗어 나가는 수백여 개의 검이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하나가 되었다가도 다시 흩어지며 연속적인 형상을 갖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맞부딪친 순간 일시에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 버리는 암흑 결계.
일방적으로 압도당하며 뒤로 밀려나는 카이론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검붉은 피를 쏟아냈다.
그 시선은 오직 전요한만을 바라본 채 끊임없이 뭔가를 찾으려 하고 있다.
“사라져라, 흑마법사!”
최후의 일격을 남겨두고 전요한이 눈을 불태웠다.
이후 카이론을 띄워 올린 후 높이 도약하여 검 끝을 내리꽂는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을 때, 카이론은 수많은 검흔을 입은 채 심장을 찔려 있었다.
“빌어먹을, 조금만 더 시간을 벌었더라면….”
한 차례 검붉은 피를 토해낸 후 쓰러진 카이론이 중얼거렸다.
간발의 차이로 졌다고 생각하지만, 누가 봐도 압도당한 것에 불과했다.
“어떻게 싸웠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어.”
말을 마친 전요한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헬레나의 성정.
죄악에 타락한 자를 심판하기엔 더없이 좋은 성유물이었다.
“크크… 어서 끝을 내라, 하지만 여기서 쉽게 탈출할 수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정신을 차린 드락실이 마지막으로 비꼬듯 말했다.
전요한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헬레나의 성정이 드락실의 심장에 박혔고 녀석은 검은 재로 화하여 바람에 흩날렸다.
* * *
“후우.”
긴박했던 전투가 끝나자 전요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나와 시르케도 막 괴수들을 물리친 상태.
헬레나의 성정은 내구도가 완전히 닳아버렸는지, 서서히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다.
“이제 중추석을 각인하러 가자. 저기서 경쟁자들이 지켜보고 있어.”
동료들을 불러 모은 후, 전요한은 최심부 입구의 철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언제부터인지 수인족 무리가 몰려와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초조한 반응을 보이는 중일 터.
아무튼, 곧 있으면 철창은 다시 해제될 것이고 녀석들은 순순히 돌아가 주지 않을 것이다.
[현재 거점의 중추석에 각인을 시도합니다.]
[각인 진행률 : 5%]
[각인 진행률 : 12%]
[각인 진행률 : 17%]
…….
중추석에 각인을 하는 과정은 다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간단히 손만 갖다 대고 있으면 되긴 하지만 그동안 전투에 참여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
그럼에도 수인족 패거리는 좀처럼 가까이 접근해오지 못했다.
“뭐, 뭐야!”
“최종 보스전을 저렇게 간단히 끝내 버리다니, 엄청난 실력자들이잖아?!”
전요한 일행의 가공할 전력을 그동안 지켜본 탓이었다.
게다가 후위에 있는 마법 공학 포탑 역시 매우 위협적이다.
“어, 어이! 그러지 말고 잠시 이야기 좀 하자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수인족 대장이 다급히 대화를 요청해왔다.
뻔한 수작이었지만 전요한은 시간도 끌 겸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분명 우리가 경쟁에서 이겼을 텐데.”
“아아, 그렇긴 하지. 한데 말이야… 여기까지 힘들게 온 우리 입장도 조금 생각해줘야 하지 않겠나?”
접근 허가를 받은 수인족 대장이 가까이 다가오며 무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레이나와 시르케는 그가 수상한 짓을 못하도록 지금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중이다.
“우리 보고 이 거점을 양보하라는 말이야?”
“솔직히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같군. 혹시 우리가 다른 거점에 도전할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여길 잠시 공유해줄 수 없겠어? 물론 비용은 지불할게.”
[각인 진행률 : 78%]
중추석의 각인 의식은 계속해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 질문을 던졌다.
“어떤 비용을 지불할 건데?”
“음, 글쎄… 마법석으로 할까? 지금까지 별로 못 모았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줄 수 있어. 아니면 그간 얻었던 전리품도….”
[각인 진행률 : 84%]
마음에도 없던 흥정.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주며 전요한은 정신을 집중했다.
수인족 대장의 신체 동작, 어조의 변화, 심리적인 거리선 등이 분석되기 시작한다.
[각인 진행률 : 92%]
자, 이제 어떻게 나올 셈이냐.
각인 의식도 거의 끝나가고 있을 때, 마침내 수인족 대장이 본성을 드러냈다.
스르르르.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미세한 마력 실들이 지면을 통해 그의 몸으로부터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꼭두각시 인형 조종 스킬.
수상쩍은 기운이 느껴져서 경계하고 있었는데, 역시 녀석의 배후에 악마가 있었다.
“동족이라도 악마의 하수인은 용서할 수 없어!”
“더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당신들을 이곳에서 처단하겠습니다!”
단서를 잡아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어지자, 레이나와 시르케가 일시에 달려들었다.
수인족 대장은 기민한 몸놀림으로 그 공격들을 피한 후, 재빠르게 도주를 시도했다.
“역시 눈치 하난 빠르군! 처음부터 만만히 볼 녀석이 아니었어!”
다급했는지 전신에 마기를 두르며 신체능력을 강화한다.
녀석은 민첩한 움직임으로 임기응변을 하며 전장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듯 보였다.
[각인 진행률 : 100%]
[현재 거점이 당신의 파티 소유로 점령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거점을 점령한 파티는 그 내부의 모든 시설물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최심부와 연결된 진입로를 폐쇄할 수도 있었지만 수월한 일처리를 위해 그건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여분의 포인트로 ‘대인 지뢰’ 1기를 활성화합니다!]
[‘대인 지뢰’는 적대 세력에게만 반응하며 원격 설치가 가능합니다!]
제2층계부터는 우두머리 수준의 파수꾼을 해치우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었다.
로테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 후, 전요한은 적절한 위치에 대인 지뢰를 원격 설치했다.
그리고 얼마 후, 굉음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다른 파티장을 대인 지뢰로 폭사시켰습니다!]
[1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악마의 하수인이던 수인족 대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
이런 걸 두고 제 무덤을 판 격이라 하는 모양이다.
내심 꼴좋다 여긴 후 전요한은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기 시작하는 잔당들을 노려봤다.
저들을 이대로 살려 보내면 나중에 분명 후환이 돼서 돌아올 터다.
곧, 최심부 출입문의 철창이 다시 닫혔고 그 안에선 수인족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수인족 잔당들을 해치운 후, 전요한 일행은 캠핑을 준비했다.
계속되는 전투로 피로한 것도 있었고, 당분간은 여기를 지켜야 하는 탓이었다.
“아마도 이번 층계에서는 서바이벌이 주된 요소인 모양입니다.”
시르케의 말에 의하면, 이와 같은 거점이 최소한 10여 개는 될 것이라고 했다.
“과연 소미궁답네. 제2층계부터 이 정도의 규모라니.”
레이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한편, 전요한은 피곤한지 막사의 간이침대에 드러누웠다.
“나는 좀 쉬어야겠어. 피곤해.”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를 사용하는 건 체력 소모가 상당했다. 검에 깃들어 있는 이능의 격이 그만큼 드높고 다루기 까다롭기 때문이었다.
“뭐? 그럼 우리보고 경계를 서라는 거야?”
“레이나, 너는 지금까지 잠들어 있었잖아. 이제는 대타 좀 해줘.”
일방적인 주장을 끝으로 전요한은 깊은 잠에 들었다.
한참 후에 눈을 뜨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시르케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깨어난 겁니까?”
상당히 오래 곁에 있었는지 조금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다.
상체를 일으킨 후, 전요한은 그녀와 마주 봤다.
“어라, 너에 대한 꿈을 꿨던 거 같은데 기억이 안 나.”
“그렇다면 또 곤란한 일을 겪었나 보군요. 당신은 난처할 때마다 저를 찾으니까요.”
시르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어둑해지고 나서 흉흉한 마물들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빈도수가 높지 않지만, 밤이 깊어지면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하겠죠.”
소미궁의 주인은 질투를 대리하고 있는 마녀, 메데이아였다.
그녀가 무언가 수작질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말에 전요한은 씨익 웃었다.
“빨리 나타나 줬으면 좋겠는걸? 그러면 이렇게 매번 층계를 공략할 필요도 없으니까.”
바깥에서 괴상한 마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