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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33화 (133/180)

제133화. 상아탑의 시련 (6)

정면충돌의 가능성이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오랜만에 깨어난 수인족 동료가 활약하기엔 더없이 좋은 무대이다.

“죽어! 이 지저분한 놈들아!”

고개를 돌려보니 레이나는 한발 앞서 돌격 자세로 적진을 향해 파고드는 중이었다.

아마도 끓어오르는 수인족의 야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전요한도 녹티스의 영향을 받는 탓인지 점차 감정이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저번에 마검사 라스에게서 배웠던 검술을 사용해볼까.’

민첩한 움직임과 함께 장검이 휘둘러지는 궤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어서 풍압과 함께 매서운 참격이 언데드 기마병을 난도질했고 녀석은 낙마하여 지면에 머리를 처박았다.

콰앙! 콰앙!

한편, 후위에선 3레벨까지 업그레이드한 마법 공학 포탑들이 강력한 위력의 마력탄을 적진에 토해낸다.

그 덕분에 언데드 정예병들은 아군 진영으로 파고드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내가 네놈들의 잔머리에 놀아날 것 같으냐!”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분개한 언데드 기마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적진으로부터 강행 돌파를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보였다.

눈앞의 언데드 정예병들이 자살 테러 부대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요한은 미리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화르르륵!

시르케의 화염 장벽이 전선을 넘어오려던 언데드 정예병들의 시도를 원천봉쇄했다.

그로 인해 최전선에 있던 아군이 전진에 고립되긴 했지만 타개책은 있었다.

수적으로 여전히 열세였음에도 전요한이 지면에 「헬레나의 성정」을 박는 순간 판도가 달라졌다.

[‘헬레나의 성정’을 기치로 내건 지점이 일정 시간 동안 대천사의 성역으로 간주됩니다!]

[대천사의 성역에선 악마종의 위세가 약화되고 경건한 신념을 지닌 자들에 한해 가호가 내려집니다!]

경건한 신념은 타락하지 않은 모두에게 생겨날 수 있었다.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장면에 레이나가 경건한 표정을 지었다.

“저, 뭔가 계시를 받은 것 같은 기분이에요.”

“여기서 싸우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야.”

전요한은 격려하며 자신감을 북돋아줬다.

그렇게 해서 소수 정예로 고군분투한 결과 일행은 전투에서 최종 승리할 수 있었다.

“크으… 내가 직접 나설 수 있었더라면….”

마지막으로 남은 언데드 기마대장에게서 씁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녀석의 수급을 벤 후 전요한은 지면에 박힌 성유물을 회수했다.

전리품을 분배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외부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은신 중인 척후병이 있었다.

아마도 얼마 전에 마주친 수인족 대장이 이쪽 상황을 염탐하기 위해 보낸 녀석일 터다.

휘이이익!

초승달처럼 날이 휜 단검이 척후병이 몸을 숨기고 있던 벽면에 꽂혔다.

레이나의 보조 무기.

그녀는 놀라서 도망치는 척후병을 향해 경고하듯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이런 식으로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땐 정말로 죽여버릴 거야!”

척후병을 보낸다는 건 경쟁에서 밀릴 경우 불가침을 무단 파기할 의도가 있단 의미다.

아무래도 수인족 집단과는 좋게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수인족들도 이런 식으로 습격을 당했을까요? 저희만 발목을 잡혀 있었던 게 아닌가 걱정스럽군요.”

척후병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시르케가 물었다.

경쟁에서 뒤처져 있을 가능성.

현 시점에선 중대한 문제라 생각했는지 일행의 시선이 전요한게 집중되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어. 여긴 수호석이 배치된 교차로잖아? 만약 추월당했다면 중간에 서로 마주쳤겠지.”

“아….”

간단한 설명에 레이나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수호석은 이쪽에서 먼저 각인했으니 정황상 수인족들은 아직 여길 지나치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쪽이 줄곧 앞서가고 있단 이야기.

하지만 척후병이 상황을 파악하고 되돌아갔으니 그들도 분발하여 속도를 낼 터였다.

“그럼 다시 앞으로 나아가자 아직 갈 길이 멀어.”

이번 경쟁의 핵심은 바로 속전속결이었다.

전요한이 앞장서서 걷자 레이나와 시르케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묵묵히 뒤를 따랐다.

* * *

전요한이 소환했던 마법 공학 포탑들은 나름 최신형이라 기동 모드로 형태를 변형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치 기갑 전차처럼 활용하는 것이 가능했고 이는 공략에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다.

“너는 이런 쪽으로는 정말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구나.”

순수하게 감탄한 레이나가 말을 건네왔다.

나름 실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녀도 이보다 더 나은 공략 방법은 떠올릴 수 없는 모양이다.

“레이나도 용감하게 잘 싸우던데? 캠핑을 할 때 사슴고기를 무지막지하게 해치우더니 그새 원기를 회복한 모양이야.”

“내, 내가 뭘 무지막지하게 해치웠다는 거야? 누구든지 배가 고프면 그 정도는 먹게 되어 있다고!”

예상치 못한 발언에 레이나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엔 전사처럼 무뚝뚝하지만 이럴 땐 미숙해서 상당히 귀여운 그녀다.

쓴웃음을 지으며 전요한은 정면의 아치형 관문을 바라봤다.

유적지의 최심부를 지키고 있는 최종 보스가 저 너머에 있었다.

* * *

아치형 관문을 넘어서자 철창이 철컥! 하고 내려앉았다.

“드디어 마지막 전투로군.”

“이번엔 어떤 녀석일지 모르겠군요.”

레이드를 준비하는 일행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묻어나왔다.

쉴 새 없는 전투로 피로함이 누적되다 보니, 상성이 불리한 상대는 아닐지 신경 쓰게 된다.

“분명 만만한 상대는 아닐 거야. 그래도 맞서 싸워서 쓰러뜨려야만 해.”

전위에 서 있던 전요한이 멋진 말을 해주었다.

옛 동료들과 함께 있는 탓인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진지한 모습이다.

적지 않은 위화감을 느낀 시르케가 실눈을 떴다.

“레이나가 합류했다고 안 어울리게 무게를 잡는군요. 그냥 평소대로 하는 편이 좋을 겁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흠흠. 난 항상 이런 모습이었는데.”

헛기침을 한 후 전요한은 열주식 기둥이 늘어선 통로를 앞서 걸었다.

여긴 비유하자면 요새의 내성으로 연결되는 외나무다리.

언데드 정예병들을 앞세워 최심부로 진입하자 저주받은 흑마법사, 카이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붉은 로브를 걸친 앙상한 몰골의 이국적인 사내.

한때 제법 악명을 떨쳤던 그는 단단히 약이 오른 상태였다.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건방진 놈들아! 하지만 너무 좋아하진 말아라. 곧 너희들은 고통에 못 이겨 이 카이론 님에게 어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나름 분위기를 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대사가 심히 삼류 악당스럽다.

어쩌면 오랜 세월을 혼자 살아오다보니 영혼이 없는 것일지도.

카이론을 어서 자유롭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일행은 언데드 정예병들을 진격시켰다.

최심부는 열주식 회랑으로 둘러싸인 콜로세움의 형태.

그래서인지 영화에 나오는 검투사라도 된 느낌이다.

“너희들의 능력으로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으냐? 한때 난 저주 마법으로 왕국 하나를 멸망시켰던 인물이다!”

다가오는 일행을 본 카이론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사방에서 거대한 괴수들이 여럿 소환되었다.

“골치 아픈 녀석들이군요.”

괴수들의 정체를 확인한 시르케가 미간을 짚었다.

이후 그녀는 숲속에서 얻었던 소환 주문서를 꺼내 들었다.

간단히 소환 의식을 치르자 흙먼지가 뭉게뭉게 일어나더니 그 안에서 이무기가 머리를 내밀었다.

“너무 나서진 말고 적당히 시선만 끌도록 하세요.”

이무기는 시르케를 향해 츠릇! 하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언데드화된 괴수들이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포위망을 서서히 좁혀왔다.

“캬아아아!”

“키루루룩!”

언데드화된 괴수 중엔 이족보행의 티렉스도 있고 머리가 여럿 달린 히드라도 있다.

이무기는 그중에서 자신과 비슷한 종인 히드라를 향해 큼지막하게 입을 벌렸다.

쏴아아아아아―!

주위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 어린 숨결.

그 위력은 보기에 제법 괜찮았지만 히드라가 맞대응하며 내뿜는 불꽃엔 미치지 못했다.

이무기가 조금씩 밀려나자 레이나가 녀석을 돕기 위해 높이 도약했다.

휘이이익!

휘이이익!

그녀의 단검은 히드라의 거대한 몸체에 대부분 적중하며 나름 유효한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보였기에 전요한은 마법 공학 포탑을 고정 모드로 변환시켰다.

콰앙!

콰앙!

마법 공학 포탑은 거대 괴수를 상대로도 제법 준수한 억지력을 발휘해 주었다.

스플래시 데미지가 추가된 마력탄이라 단위 면적이 넓은 개체에게 효율이 좋은 것이다.

물론 이걸로도 잠시 시간을 끄는 정도만 가능할 테니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죠. 흑마법사는 제가 영계 마법으로 최대한 붙잡아 두겠습니다.”

거대 괴수들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시르케는 본격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 * *

전요한과 레이나는 전위에서 히드라를 떠맡았다.

녀석은 어찌나 포악한지 먼저 보냈던 이무기를 일방적으로 제압해가는 중이었다.

“캬아아아!”

일단 이무기부터 구하기 위해 앞을 막아서자 히드라가 여러 개의 머리를 이용해 위협적인 공격을 해왔다.

기본적으로 거대 뱀의 일종이라 녀석에겐 독니도 있고 마성을 지닌 보석안도 있다.

더욱 성가신 건 재생 능력.

신화에서처럼 머리를 잘라내면 금방 다시 생겨나는 수준까진 아니어도 웬만한 상처는 신속히 원래대로 복원해냈다.

“레이나, 내가 녀석에게 접근할 수 있게 최대한 앞에서 시선을 끌어줘.”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레이나가 히드라를 향해 거침없이 돌격했다.

그녀는 뛰어난 육체능력을 지닌 수인족답게 혼자서도 히드라가 퍼붓는 맹공을 잠시 버틸 수 있었다.

화르르르륵!

시르케가 수정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히드라의 이동 경로에 화염 기둥을 세웠다.

그로 인해 히드라가 멈칫하고 있을 때, 기운을 차린 이무기가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다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이틈을 노려야 해!’

기회라고 생각한 전요한은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히드라의 아홉 머리 중 하나가 방향을 틀어 이쪽을 바라봤다.

녀석은 매서운 움직임으로 물어뜯으려 했지만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곧, 푸욱!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늘이 뚫렸고 전요한은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리고는 환영의 가루가 담긴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시르케가 만들어놓은 걸 조금 받아두길 잘했군.’

머리에 박힌 단검 끝자락에 주머니를 매달았다.

전요한이 뛰어내리자,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법을 시전한다.

화연이 날린 화염 구체가 히드라의 머리에 작렬했다.

이후 회갈색 먼지가 걷히자 공격을 당한 히드라의 머리가 해롱해롱하는 모습이 보였다.

“잘했어요! 이러면 환각 때문에 다른 머리들도 적으로 인식하게 될 겁니다!”

시르케의 예상대로 히드라의 머리는 서로 물어뜯으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머지 괴수들은 부탁해. 나는 흑마법사를 상대할 테니까!”

시르케의 영계 마법으로 구속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전요한은 카이론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크크… 내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예상대로 카이론은 막 구속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였다.

“어서 덤벼라, 난 그깟 알량한 신성력 따윈 전혀 두렵지 않으니까!”

이윽고 녀석은 코웃음을 치더니 자신의 루비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후 허공에 생성된 여러 개의 검푸른 불꽃 송이가 허공을 찢으면서 전요한을 향해 날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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