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32화 (132/180)

제132화. 상아탑의 시련 (5)

“어서 레이나를 구출하세요. 그녀가 갇혀 있는 걸 보고만 있을 겁니까?”

시르케가 뭐 하냐며 재촉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푸른 수정에 손을 가져다댔다.

‘이렇게 해야만 풀려났었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봉인은 오직 자신에게만 반응했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동료들을 소생시킨 후 잠들게 했는진 의문으로 남아있다.

“으음….”

수정에 균열이 일어나자 레이나는 점차 눈을 떴다.

여우귀가 꿈틀거리더니 쫑긋하고 곤두선다.

“여, 여기는?!”

오랫동안 의식을 잃었던 탓에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단 표정이다.

“진정해, 이곳은 안전하니까.”

전요한이 부들부들 몸을 떠는 레이나의 양어깨를 붙잡았다.

끔찍한 악몽이라도 꿨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이틈에 도망가야….”

바닥에 쓰러져 있던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수인족 여인에게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지금이라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은 죄악의 사도니까요.”

등을 보인 채 달려가는 사내를 향해 시르케가 한숨 쉬었다.

허공에 지팡이가 한 차례 휘둘려졌고, 그는 다시 한번 지면을 나뒹굴었다.

“크윽!”

무거운 중력이 전신을 압박하며 고개조차 들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옛 동료 간의 감동적인 재회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납작 엎드린 채 가만히 있는 겁니다.”

본인의 일행을 노예처럼 부렸던 사내라 그런지 이 같은 장면에 별 감흥도 없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젓던 시르케는 시선을 다시 레이나에게로 향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기운을 차리려면 휴식이 필요하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어렵습니다.”

현재 위치는 메데이아의 소미궁 제 2층계였다.

당장의 위협이 사라졌다곤 하나, 부단히 움직여야 한다.

“나, 나는 괜찮아. 단지 힘이 조금 빠져 있었던 것뿐이니까.”

말을 마친 레이나가 부축을 받으며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신체기능이 점차 돌아오는 걸 보니 그녀의 말대로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꼬르륵.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는 점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런, 먹을 걸 구해다 줘야겠네. 너는 굶주리면 힘을 제대로 못 쓰잖아?”

전요한이 곤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그 말에 레이나는 얼굴을 붉혔다.

“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지금 나를 먹보 취급하는 거야?”

야성이 강한 수인족이라 해도 대놓고 식탐을 드러내는 건 꺼려했다.

더욱이 교배기의 여우귀 암컷이라면 상당히 내숭을 떠는 편이다.

“눈치 보지 않아도 돼. 마침 우리도 슬슬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시기이니까.”

소미궁에 진입한 이후 이렇다 할 식사거리를 마련해두지 못한 상태였다.

여기는 숲속이니 적당한 동물을 사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정말로 캠핑을 할 생각입니까? 주위에 어떤 위협이 있는지 더 확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원시적인 도구로 수렵 준비를 하자 시르케가 생각을 물었다.

아무래도 인근 일대를 더 수색하는 편이 낫다는 게 그녀의 의견이다.

“그건 저번에 얻은 마장병기에게 맡기는 편이 좋지 않겠어? 기계종과의 전투 이후엔 제대로 활용해본 적이 없잖아.”

잠시 고민하던 전요한은 절충안을 내놓았다.

마장병기는 마도공학자인 이안네스가 남긴 유산 중 하나다.

“뭐, 나쁘지 않은 판단이군요. 실은 저도 좀처럼 써먹을 기회가 생기지 않아서 시무룩하던 차였습니다.”

시르케가 부리나케 마장병기를 소환했다.

이후 녀석을 어딘가로 떠나보낸 후 캠핑을 위한 준비 작업을 시작한다.

“얼마나 시간을 보낼진 모르겠지만, 기분은 좀 내보죠.”

모처럼 셋이서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대미궁에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시르케는 모닥불에 불을 붙였다.

* * *

숲속에서의 캠핑은 제법 풍요로웠다.

사냥을 통해 얻은 사슴고기로 적당히 배도 채우고, 채집해온 과일로 즙을 내서 목도 축였다.

덕분에 인질로 붙잡혀 있던 사내는 죽을 맛이었지만.

“나, 나도 한입만 주지.”

물론, 그의 말에 귀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너희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는 다른 차원하고 연결되어 있단 말이네?”

머릿속으로 정리해본 레이나가 확인하듯 말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걱정돼. 지구에 사는 인간들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사소한 다툼으로 출발한 일도 종족 간의 전쟁으로 불길이 거세질 수 있었다.

시르케도 그 위험성을 지적하며 빠른 공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어서 소미궁을 정리해야만 합니다. 배후의 악마들이 각 종족들을 어떻게 이간질할지 모르니까요.”

“그렇겠군. 골치 아픈 상황인 것 같으니 나도 거들어 줄게.”

레이나는 흔쾌히 도와주겠다며 일행에 합류했다.

다음 목적지는 얼마 떨어진 위치에 있다는 유적지.

마장병기가 수집해온 정보를 바탕으로 일행은 그곳을 찾기 위해 이동을 계속했다.

도중에 몇 차례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긴 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파티원들 대다수가 숙련된 경험자인 덕분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어도 실력은 녹슬지 않은 모양이네?”

“예전에 비해선 많이 모자라지만, 이걸로도 충분해.”

한참을 더 나아가자 가려진 수풀 사이로 장대한 유적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요새 같네.”

“거점으로 삼기엔 확실히 적합한 구조를 갖추고 있군요.”

눈앞의 경관을 바라보며 레이나와 시르케가 한마디씩 했다.

선두에 있던 전요한은 뒤돌아선 후 그들에게 한 가지 경고를 해주었다.

“여기서도 다른 파티와 조우할 수 있어. 그러니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돼.”

유적지 내부로 발을 들이자, 미궁 구조가 시야에 들어왔다.

초입부에서부터 등장한 갈림길을 보며 곁에 있던 레이나가 코를 킁킁거렸다.

마치 협곡처럼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높다란 장벽 탓에 내부는 상당히 어둑한 편이다.

“진입로가 여러 개로 나뉘어 있는걸?”

어느 진입로를 따라가도 종국엔 최심부까지 도달 가능하다.

무대상으로 나름의 전략적 요소가 도입된 셈.

교차 지점엔 서로 워프할 수 있는 크리스털 장치가 존재한다는 점도 염두에 두는 편이 좋다.

왼쪽 갈림길로 향하자, 벽면에 석상처럼 굳어 있던 해골 병사들이 깨어나 우리를 막아섰다.

삐걱.

별로 대단한 녀석들은 아니었지만 중간중간에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일부러 속도를 내지 않았다.

한창 공략을 진행하던 도중 후위에 있던 시르케가 심각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

“잠시 정지하세요. 누군가 따라오고 있습니다.”

생포했던 사내는 캠핑 장소에 결박시켜 놓고 왔으니 다른 존재였다.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자 한 무리의 수인족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뭐야?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일행이 있었잖아?”

“어떻게 해야 하죠, 대장? 그냥 되돌아가기엔 너무 손해가 막심한데 말이죠.”

그들은 대부분이 고양잇과의 수인이었고 같은 부족인 듯했다.

대장이라고 불린 사내를 보며 전요한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협상을 해야겠군. 우리가 한발 늦긴 했지만 말이야.”

예상대로 수인족 대장은 물러나지 않고 뻔뻔하게 이쪽으로 다가왔다.

만약 협상에 불응하면 곧바로 전투가 벌어질 터.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이긴 해도 일단 그건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앞서의 전투 때문에 시간이 지체된 탓이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진입로는 크게 두 갈래가 있으니 중간에 서로 만나지 않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겁니다.”

전요한이 제안한 선택지는 서로에게 최선이었다.

물론 중간에 상대가 불가침을 파기할 가능성은 있지만 말이다.

“좋아, 그런 거라면 응해주지. 우린 이래 봬도 꽤나 실력파니까.”

수인족 대장도 일리가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파티원들을 이끌고 사라지자 시르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통했네요. 같은 종족인 레이나를 보고 봐준 느낌도 들고요.”

“아직 모르는 일이야. 우리보다 뒤처지는 것 같으면 중간에 뒤통수를 칠 수도 있고, 나중에 깔끔히 패배를 승복 안 할 수도 있어.”

레이나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뒤쪽을 응시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것은 서로 무의미하게 충돌하는 걸 막기 위한 일시적인 합의에 불과하니 안심하긴 이르다.

“일단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만 집중하죠.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요.”

대화를 일축한 후 전요한은 다시 유적지 공략에 앞장섰다.

다른 대안이 없다면 문제가 뭐든 이대로 계속 나아갈 수밖에.

일행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묵묵히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수인족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요한은 미래시를 최대한 활용했다.

피해갈 수 있는 함정은 굳이 건드려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고, 이동경로도 최단거리로 잡았다.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서 중반부 즈음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앞서가던 캣시가 멈춰 서더니 황금색 문양이 그려진 벽면을 보며 꼬리를 흔들었다.

전요한은 그 앞으로 다가가 숨겨진 스위치를 눌렀다.

스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옆으로 밀려났고 어둑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부 공간으로 들어서자 촛불이 밝혀진 제단 위에 보물 상자 하나가 보였다.

[헬레나의 성정]

성급 : ★★★★

설명 : 예전에 이세계의 어떤 성인이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을 때 그의 육체에 박혔던 대못입니다.

내구도가 많이 닳아 있지만 푸르스름한 신성력이 서려 있다.

“이건….”

“여길 공략하는 도중에 요긴하게 쓰일 거야.”

신성력이 깃든 유물은 악마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비밀 공간 밖으로 나오자 어디선가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덜그럭. 덜그럭.

아무래도 이곳의 지배자가 더는 우리를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한 전요한은 녹티스를 빼 들었다.

“다들 조금 뒤로 물러나자.”

일행을 조금 전 지나쳤던 교차로까지 퇴각시켰다.

그러자 거기에 있던 커다란 크리스털 장치가 버프 효과를 부여했다.

[각인된 수호석의 영역 안으로 진입했습니다!]

[종합 능력치가 10 상승하고 ‘불굴의 의지’ 상태가 됩니다!]

앞으로 아레나 유형의 전장에서 수호석은 자주 접할 수 있을 터다.

불리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이런 전략적 요소를 잘 활용하면 승패가 갈리기도 한다.

“여기서 교전하면 그나마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야.”

함께 진영을 구축한 전요한은 그간 아껴 두었던 유물 하나를 꺼냈다.

조그만 미니어처 형태의 마법 공학 포탑 한 묶음.

저번에 기계종 여왕을 쓰러뜨린 후 얻은 보상인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법 사용 가치가 있다.

[‘마법 공학 포탑 Lv.1’ 3기가 소환되었습니다!]

마법 공학 포탑은 그 이름에 걸맞게 제법 위용이 있었다.

지금 상태로도 그럭저럭 쓸 만하지만 업그레이드하면 위력이 확실히 배가된다.

[마력을 투자하여 현재 소환 중인 마법 공학 포탑의 레벨을 한 단계 올렸습니다!]

[마법 공학 포탑이 발사하는 마력탄의 사거리, 장전 속도, 위력이 각각 상승하고 스플래시 데미지가 소폭 추가됩니다.]

마법 공학 포탑을 2레벨로 업그레이드하니 조금은 쓸 만해졌다.

하지만 수적 열세가 예상되는 만큼 이 정도로 만족하면 곤란하다.

[마력을 투자하여 현재 소환 중인 마법 공학 포탑의 레벨을 한 단계 더 올렸습니다!]

[마법 공학 포탑이 발사하는 마력탄의 사거리, 장전 속도, 위력이 각각 상승하고 스플래시 데미지가 소폭 추가됩니다.]

3레벨에 도달하자 마법 공학 포탑의 형태가 이전보다 더 위협적으로 변화했다.

이 정도면 이번 전투를 수행하기에 적어도 화력 면에선 부족함이 없으리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포탑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줄지어서 나타난 언데드 기마병들이 아군 진영으로 들이닥쳤다.

“겁도 없이 내 성역에 함부로 침입해 왔구나! 너희들을 갈가리 찢어 죽인 후 오늘 밤의 유흥을 위한 노리개로 삼겠다!”

최전방에서 돌격해오는 언데드 기마대장이 일행에게 호통쳤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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