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상아탑의 시련 (4)
“이건 「악마종의 소환술」입니다! 기습 공격에 당하지 않게 조심하세요!”
배후에 있던 시르케가 외쳤다.
상위 서열의 마족이 등장하기라도 하면 골치 아픈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
제1층계의 전장에서 체력을 상당히 소진한 탓이었다.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런 위협 따윈 익숙하니까!”
전요한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다시금 전의를 불태웠다.
대미궁에서 생사의 기로를 여러 번이나 넘나들며 쌓아온 경험이 있는 덕분이었다.
“아주 자신감이 넘치는군그래? 하지만 그분의 화신이 나타나도 과연 여유가 남아 있을까?”
그들을 적대하던 사내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은 마기에 정신이 침식당한 일행을 계속 전진시켰다.
“목숨을 걸고 싸워서 벨리알 님의 영예를 드높여라. 그렇지 않으면 전부 내 손에 죽게 될 것이야!”
전혀 자신의 동료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마치 노예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고압적인 태도.
주문술식을 마친 시르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이지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이군요.”
지구의 이능력자들과는 복장이 많이 다른 걸 보니, 다른 세계에서 온 자였다.
어쩌면 자신처럼 에테리아 대륙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저런 자를 살려두면 장차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그녀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기로 했다.
스르르르!
푸른 영령의 물결이 허공에서 굽이치며 해룡의 형상을 이루었다.
주변을 휩쓸어버릴 듯한 그 맹렬한 기세에 사내는 순간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히익! 뭐, 뭐야?”
이도니아 왕국의 대마법사였던 시르케가 시전하는 영계 마법은 수준부터가 달랐다.
사내가 허겁지겁 대응책을 마련하려 할 때였다.
사사사사삭!
어둠의 공간으로부터 수많은 촉수들이 튀어나오며 바다용과 맞서 싸웠다.
나머지 일부는 사각지대에서 시르케와 전요한을 노린다.
“시르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겠어?”
“저를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당신의 걱정이나 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시르케는 과잉보호를 받는 아이처럼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공간도약을 시전하여 촉수들의 집중공격을 모조리 피해냈다.
“그거 이제 다시 쓸 수 있게 된 모양이네?”
녹티스를 휘둘러 촉수들을 베어내며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기껏해야 한 번에 몇 걸음 정도 이동할 수 있는 공간도약이지만, 마법사에겐 매우 유용한 생존기다.
“실은 얼마 전부터 다시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마력 보유량이 충분하지 않아서 실전에선 사용하는 걸 피했을 뿐이죠.”
가까운 거리라도 공간도약은 단시간에 반복 사용하는 경우가 잦아 마력 소모량이 상당했다.
이로 인해 마력이 한계치까지 소진되기라도 하면 마법사로서는 전투불능 상태가 되는 격이다.
하지만 시르케는 현재 한두 시간 정도는 실전에서 공간도약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어서 예전의 경지까지 도달하라고. 그래야 나도 조금은 편해질 것 같으니까.”
동료 중엔 아직까지 시르케와 비견할 만한 실력자가 없었다.
채린과 멜리사가 4성 돌파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 정도의 전력은 대미궁에서도 여럿 봐왔다.
최소한 5성 정도는 되어야 예전 동료들과 비등한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전투에나 집중하시지요. 상대는 못해도 중상급 위계의 악마입니다.”
잠시 물러나는 촉수들을 보며 시르케가 말했다.
막 전투를 마친 전요한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이만큼의 공격을 퍼붓는 녀석은 오랜만이네.”
짐작하건대, 대략 마계 후작 정도의 전력 같았다.
질투의 죄악을 섬기는 데스나이트, 베르길리우스와 필적하는 상대란 의미다.
“저번에 베르길리우스를 쉽게 물리쳤다고 방심하면 곤란합니다. 여기는 지구가 아니니까요.”
지구에서는 마족들이 차원 개입으로 인한 간섭을 받았다. 기존의 전력을 상당 부분 발휘하지 못하는 페널티.
하지만 차원의 틈새에 존재하는 던전에선 그러한 페널티가 더는 적용되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이쪽도 당시와 비교하면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어. 마계 후작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를 한 손에 쥔 채 전요한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다시 한번 뇌리에 누군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싸우는 마족 유형은 현혹계가 많다. 오감을 교란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짓밟혀도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지.
이번엔 붉은 머리칼의 마검사, 라스가 아니었다.
백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귀공자, 알체른.
우아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많아 보이는 그가 함께 녹티스를 쥐며 전방을 바라본다.
- 어떤 수작에도 넘어가지 않으면 마족은 하는 수 없이 외압을 가하려 한다. 그 순간을 노리는 거다. 녀석의 치명적인 부위에 확실한 타격을 주고 환각의 공간을 깨부숴야 한다.
어째서 그의 이름이 알체른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진정한 정체에 대해 생각할 여유 따윈 없었다.
알체른과 혼연일체가 된 채, 전요한은 다시금 엄습해오는 촉수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스걱! 스걱!
촉수들의 너머엔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있었다.
“저 건방진 놈을 심판하여 주십시오, 벨리알 님! 당신의 그 위대한 권능으로!”
마계후작의 화신을 강림시킨 원흉이었다.
전요한이 단번에 거리를 좁혀 놈을 베려고 할 때였다.
“어디를 보는 것이냐? 나보다 녀석이 더 중요한 모양이지?”
화신으로 강림한 벨리알의 목소리였다.
단번에 녀석임을 알아챈 전요한은 발을 돌리려다, 알체른이 한 말을 떠올렸다.
‘어떤 현혹에도 넘어가지 말라고 했었지.’
오감을 교란하고 함정에 빠뜨리는 건 상위 악마종의 주특기였다.
전요한이 침착하게 정신을 집중하자 미래시가 발동했다.
‘녀석은 저기에 없다. 아무런 색채도 보이지 않아.’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위험을 예고하는 붉은색이었다.
미래시에 의존한 채, 전요한은 날아오는 촉수들을 모조리 베어냈다.
“어떻게 된 놈이냐? 인간 주제에 어떻게 나의 환술을 간파하는 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벨리알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화려한 검무를 추며 전요한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질투의 죄악도 베어 넘겼는데, 너 까짓 것쯤이야 별 문젯거리도 되지 않아.”
“뭐라고? 그렇다면 네놈이 소문의 그 말살자란 말이냐?”
전요한의 존재는 이미 마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지구의 여신이 유일하게 선택한 체스 말이자, 심상치 않은 잠재력의 소유자.
방심해서는 곤란하다고 여긴 벨리알이 결국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미궁에서는 제아무리 네놈이라 해도 나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차원의 틈새에서는 온전한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비록 화신으로 현신했다고는 하나, 마계 후작의 권능을 발현하는 덴 별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몸소 나서는군!’
벨리알이 진검승부를 하려 하자 전요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각종 현혹술로 속이려 들고 있지만, 미래시는 녀석의 치명적인 부위를 가감 없이 드러내줬다.
- 달려들어라. 동료를 지켜내겠다는 너의 순수한 열망을 담아서. 그러면 이번엔 분명 닿을 수 있을 테지.
지난 삶의 일부를 회고하듯, 알체른이 눈을 감았다.
동시에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가 몰아치는 격노처럼 울부짖기 시작한다.
고오오오오!
말로는 형언하지 못할 고양감이 전요한을 휘감았다.
“크아아아아!”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켜내고자 했던 것들.
하지만 끝내 잃어야만 했고 혼자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그것은 대미궁에서 동료들을 잃었던 자신의 경험과 교차되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촤락–!
흉측한 괴물의 몸체가 검은 피를 쏟아냈다.
이후 반으로 갈라지며 촉수들이 사방으로 힘없이 늘어진다.
- 그래, 그거면 된 거다. 녀석을 베었을 때의 각오를 잊지 마라.
대견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던 알체른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며 뇌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 그녀를 잘 부탁한다. 잠시 시선을 돌리고 있으면 턱없이 무리한 짓을 저지르곤 하니까.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검신에 묻은 혈흔을 털어내며 전요한은 시르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마침 시르케도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요새 들어 당신답지 않게 확실히 마무리 짓는군요. 혼자서도.”
“글쎄. 잘 모르겠는걸.”
정말로 혼자서 벨리알을 쓰러뜨린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알체른은 그저 녹티스의 옛 주인이었던 걸까.
아니면 짐작하는 대로 전생의 자신이었을까.
진실은 여전히 저 너머에 있다.
“마, 말도 안 돼! 벨리알 님이 저딴 애송이에게 패배하다니!”
주위의 어둠이 걷혀가자, 정적을 깨고 갈색 머리칼의 사내가 소란을 피웠다.
전요한과 시르케는 고개를 돌려 녀석을 흘겨봤다.
“저 녀석은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긴요. 이대로 내버려 두면 많은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칠 겁니다.”
시르케가 단호하게 처단을 제의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사내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머, 멈춰라! 안 그러면 이놈들을 희생시켜서라도 필사적으로 싸우겠다!”
같잖은 인질극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저들은 이미 마기에 정신이 침식당하여 돌이킬 수 없는 상태.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고 해도 늦은 타이밍이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고 싶은 모양이군. 견뎌낼 자신이 있으면 어디 한번 해봐.”
전요한이 마음대로 하라며 코웃음을 쳤다.
시르케도 혼자서 팔짱을 낀 채 노려보자 사내는 식은땀을 흘렸다.
“나, 나는 긍지 높은 칼슈미텐 백작가의 혈통이다! 네놈들 따위가 건드릴 상대가 못 돼!”
“칼슈미텐?”
어디선가 들어본 가문명인지 시르케가 반응을 보였다.
사내는 그 틈을 타서 곧장 수풀 너머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뭐야, 동료들도 내버려 두고 혼자 탈출하는 건가?”
어이가 없어진 전요한이 실눈을 떴다.
그는 발목을 붙잡아 달라고 요청했으나, 시르케가 고개를 저었다.
“예상대로 저자는 에테리아 대륙에서 넘어왔습니다. 무슨 속셈인지 한번 알아보도록 하죠.”
소미궁으로 진입 가능한 루트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상당한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만큼, 녀석이 왜 여기에 왔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대로 뒤를 밟으면 새로운 단서를 찾을 수도 있겠군. 그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 보자고.”
전요한이 먼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듯이 연기하며 뒤쫓자, 사내는 아연실색하며 속도를 높였다.
“그만 좀 따라와라! 나 같은 놈을 때려잡는다고 무슨 보상을 얻는 것도 아니잖아!”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기는 했다.
하지만 전요한과 시르케가 원하는 건 소미궁에 대한 정보.
사내가 어떤 귀중품을 지니고 있는지가 아니었다.
“따, 따라잡힌다! 히익!”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사내는 달리던 도중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덕분에 붙잡을 생각이 없었던 전요한은 순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해? 이대로 붙잡아?”
“하는 수 없죠. 기회를 줘도 제대로 도망치지 못하는데.”
시르케가 한심하다는 듯이 사내를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무심코 정면에 있는 정체불명의 거대한 수정을 바라봤다.
“…이건?”
자신이 잠들어 있었던 것과 형태가 동일했다.
암석에 박혀 있는 수정 안엔 여우귀가 돋보이는 수인족이 한 명 잠들어 있었다.
“레이나?”
전요한이 예전 동료였던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