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0화. 상아탑의 시련 (3)
“후우, 드디어 끝났군요.”
시르케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필사적으로 전장에서 싸운 결과 무사히 제1층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었어. 대체 뭐였던 거지?”
그녀와 등을 맞댄 채 생각하던 전요한이 물었다.
동화적인 세계에서의 가상체험이었다 하더라도 납득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군요. 어쩌면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 과거의 단편일지도.”
신적인 권능을 이용하면 전생의 일부를 체험하는 것도 가능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던 이유는 그 때문일까.
하지만 현재 주어진 단서만으로는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네 가설이 맞을지도 몰라. 라스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거든.”
전요한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
그것의 이능을 이끌어냈을 때, 마검사 라스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마치 내가 라스란 인물이 되어가는 듯한 느낌이었지.’
분명 라스는 어딘가에 실존했던 영웅이었을 터다. 동료인 율리케 역시 마찬가지. 지난 전장의 현실감을 느껴본 입장에선 그들을 도저히 허구의 존재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이제부터는 제2층계입니다. 더는 경계지점의 초입부가 아닌 모양이군요.”
잠시나마 한숨 돌리던 시르케가 다시 신경을 곤두세웠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마녀의 집이 있었던 무대 배경과는 달리 사방에 생기가 돌았다.
“그렇다면 다른 차원에서 진입한 자들도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소미궁의 구조인 것 같은데.”
전요한은 몸을 일으킨 후 주위를 둘러봤다.
소미궁은 진입 가능한 루트가 여러 개라서 초기엔 각자 시작하는 위치가 다르다.
“아마도 이곳의 특성을 이용해서 다른 차원의 종족들과 이간질하려는 속셈 같습니다.”
의도를 알아챈 시르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정황상 여기는 질투 대리, 메데이아가 지배하는 차원의 틈새.
학원도시의 상아탑 중층부엔 그곳으로 진입할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다.
“무슨 짓을 했는진 몰라도 원로원의 장로들도 전부 속은 것 같네. 이런 데가 요람이라니.”
그들이 요람이라 부르는 곳은 대재앙이 일어나더라도 안전한 인류의 성역이어야 했다.
한데 여기는 마계 진영에 넘어가 있는 상황.
예언서에 대체 뭐라고 적혀 있는진 모르겠지만 스스로 화를 부추긴 꼴이었다.
“우리가 깨부수면 됩니다. 누구보다 먼저 근원지를 찾도록 하죠.”
시르케는 서두르라며 전요한을 뒤에서 부추겼다.
한창 수색을 진행하고 있을 때, 수풀 너머로부터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스사사사삭!
진형을 갖추고 기다리자, 이윽고 거대한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츠르츠츠!
[푸른 비늘의 거대 뱀]
몬스터 등급 : ★★
고유 특성 : 원시밀림의 포식자
행동 패턴 : 냉 속성의 광역기 위주, 분노할 때마다 저주 마법 시전
취약 요소 : 화 속성의 데미지
호박처럼 황금빛을 띤 마성의 눈동자. 야생 밀림의 원시적인 생명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비늘.
꽤나 친숙한 이미지인 이유로 한국에선 이무기라고 불리는 녀석이었다.
“공격 개시. 빠른 공략을 최우선 과제로 삼죠.”
먼저 포지션을 잡은 시르케가 먼저 이무기를 향해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콰콰콰쾅―!
강렬한 폭발음이 주위 공기를 뒤흔들며 숲을 가득 메웠다.
이후 허공을 수놓는 화려한 검술에 의해 하나둘씩 생채기가 나기 시작하는 이무기의 비늘.
마침내 성난 이무기가 큼지막한 입을 벌리며 분노에 찬 광역기를 내뿜었다.
쏴아아아아아―!
한파처럼 들이닥치는 숨결로 인해 주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시르케가 마력 방벽을 세워 버티고 있을 때였다.
이무기가 머리를 돌려 마성의 눈빛으로 전요한을 매섭게 쏘아봤다.
“으음…?”
이번엔 마비 공격. 이무기가 시전하는 저주 마법 중에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유형이었다.
하지만 절대면역을 지닌 전요한에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노려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눈높이 교육을 시켜주마!”
신속하게 펼쳐지는 검술이 더욱 위협적으로 변했다.
츠르르!
이윽고, 무기력한 혓소리를 끝으로 이무기가 마침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별로 좋은 전리품은 주지 않는군요. 조금 기대했는데.”
드랍된 뱀 비늘을 확인한 시르케가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멀리서 여러 갈래의 마법 화살들이 쏟아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쏴아아아아아!
시르케가 다급히 펼친 수호 결계로 버티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네놈들을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은빛 갈기를 지닌 수인족.
대미궁에서 줄곧 악연이었던 웨어울프가 수풀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어떻게 해야 할까요? 화살 비 때문에 잠시도 수호 결계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시르케가 곤란하다는 듯이 허공을 가리켜 보였다.
데리고 온 인원이 제법 되는지 화살은 사방에서 그칠 줄을 몰랐다.
“내가 해치우고 올게. 마침 저 녀석하고는 끝맺어야 할 과거가 있으니까.”
전요한은 위장 마법으로 주위의 시야를 차단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 은신 상태가 되어 유유히 적진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매우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 눈치 채는 이는 없었다.
이윽고 수인족들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전요한은 몸을 낮추고 상황을 살폈다.
후위에 여러 다발의 마법 화살을 계속해서 쏘아 올리는 궁사들이 셋.
버프 스킬로 그 위력을 배가시키는 마법사도 둘이나 있다.
기본적으로 궁사와 마법사는 기습에 취약한 포지션.
여럿이긴 해도 현재의 전력을 고려하면 승산은 충분했다.
스윽.
배후의 시르케가 확인한 후 계획했던 바를 행동에 옮겼다.
서걱!
참격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여러 다발의 화살을 쏘아 올리던 궁사들의 허리를 베어 넘겼다.
인근의 수풀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당황한 적들이 내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다들 조심해! 아군이 당했다!”
“대체 어디야? 어디 숨어 있어?”
하지만 시르케가 걸어준 은신 효과는 수준급이었기에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궁사들도 처리했으니 이제부턴 굳이 무리할 필요 없겠지.
수풀에 숨어 침착하게 적진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은빛 갈기의 웨어울프가 화가 난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감각이 매우 뛰어나서 이대로 있으면 곧 위치가 발각될지도 몰랐다.
“저기 봐! 적들이 몰려온다!”
“다들 전투태세를 갖춰!”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때마침 놈들의 적대세력이 도착해 주었다.
쏴아아아아아―!
한파처럼 들이닥치는 빙결 마법으로 인해 주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적대 세력의 마법사가 시전한 광역마법.
녀석이 시선을 끄는 동안 전요한은 적진의 후위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사, 살려줘! 제발!”
빙결 마법에 발이 묶여 있다가 졸지에 접근을 허락하고만 남자 마법사가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전요한은 거리낌 없이 녹티스를 휘둘러 녀석의 머리를 벴고, 이어서 도망치려던 여마법사의 심장을 뒤에서 찔렀다.
“꺄아아아악!”
배후를 완전히 정리한 후 돌아서자 육체능력을 완전히 이끌어낸 웨어울프의 모습이 보였다.
“네놈, 거기에 숨어 있는 것 다 안다. 내 후각은 매우 예민하니까 말이야.”
역시 웨어울프의 감각은 상급의 위장 마법으로도 속일 수 없었다.
첨예한 눈빛으로 웨어울프와 신경전을 벌이던 전요한은 황금 반지를 낀 손을 들어 올렸다.
치지지직!
전격 마법으로 주위를 태우면 웨어울프의 후각도 조금은 무뎌질 것이다.
“머리가 좋군. 하지만 너에겐 이미 피 냄새가 배어 있어. 그건 손쉽게 지우지 못할걸?”
웨어울프는 어림없다는 듯이 씨익 웃어 보였다.
대미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녀석답게 잔머리만으로는 이기기 힘든 상대다.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볼까, 칼미쉬? 별로 대단하진 않겠지만 말이야.”
“이, 이 목소리는? 크르르르!”
상대가 누군지 눈치챈 웨어울프는 사나운 울음소리를 냈다.
이후 녀석은 매서운 동작으로 거리를 좁혀와 전요한의 목젖을 향해 예리한 앞발을 휘둘렀다.
카랑! 하는 울림과 함께 녹티스가 아슬아슬하게 그 일격을 받아낸다.
“육체능력은 확실히 예전보다 나은데, 그것만으로 충분하겠어? 움직임이 전부 읽히고 있는데.”
“잘난 체 하긴! 방금도 운 좋게 막아낸 것 아니냐?”
웨어울프는 전요한이 조금 봐주고 있단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간단히 베어버리면 예전에 방해를 당한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하는 탓이었다.
“크윽!”
점차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자 웨어울프가 주위 동향을 살폈다.
현재 녀석의 파티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
전요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학살당한데다, 적대 세력까지 나타나서 사면초가였다.
“어떻게 된 거지? 처음에 보여줬던 자신감이 더는 보이지 않는데?”
전요한은 순식간에 접근해 심장을 노렸다.
칼미쉬가 식은땀을 흘리며 기다란 손톱으로 응수를 해온다.
녀석은 별로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분위기였지만, 여기서 확실히 일을 매듭짓는 편이 좋았다.
스걱!
이윽고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녹티스가 놈의 왼팔을 잘라냈고 칼미쉬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놈이!”
칼미쉬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지 아를 악물었다.
육체적인 능력이 극대화된 수인족이지만, 재생하려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회복력 둔해졌을 때 해치우자!’
전요한은 칼미쉬의 오른팔마저 잘라낸 후 그 심장에 검 끝을 찔렀다.
푸욱!
녹티스가 서슬 퍼런 기운을 내뿜으며 웨어울프의 마력을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수급을 잘라내자 웨어울프는 완전히 숨이 끊겼다.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최후를 받아들인 얼굴을 한 채 말이다.
“후우. 해내셨군요.”
배후에서 지켜보던 시르케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이후 그녀의 시선은 새롭게 접근해온 무리에게로 향했다.
“다음 차례는 저들인 것 같군요. 그리 선량해 보이는 무리가 아니니 주의해야 할 겁니다.”
놈들은 웨어울프 일당의 전리품을 탐욕스럽게 줍고 있었다.
전투 도중에도 저러는 걸 보면 약탈자의 기질이 다분하다.
“배후에 악마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죄악의 사도라면요.”
“내게 맡겨. 저런 자식들을 상대하는 건 내 전문이니까.”
전요한은 당당하게 다시 한번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무리를 이끌던 사내가 씨익 웃더니 자신의 동료들을 앞으로 내세웠다.
“끝까지… 싸운다….”
“벨리알 님을… 위하여….”
이제 저들은 정신이 완전히 침식되어 꼭두각시나 다름없다.
“건방진 녀석, 운 좋게 어부지리 좀 누렸다고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구나! 이참에 널 죽이고 저기 있는 이쁘장한 계집과 놀아 봐야겠어!”
사내는 악의 넘치는 한마디를 건네왔다.
녀석이 음흉한 표정으로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걸 본 시르케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기분 나쁘게.”
이후 시르케로부터 즉각적인 보복이 이어졌다.
지면 아래서부터 맹렬히 치솟아 오르는 얼음 가시들이 사내의 일행을 위협하기 시작한다.
“치잇, 비겁한 마법사 같으니라고. 네년이 수작을 부린다면 나도 가만히 있진 않는다!”
말을 마친 사내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악마의 마법진이 그려진 스크롤이었다.
녀석이 그것을 찢자, 주위는 어두운 암막에 휩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