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상아탑의 시련 (2)
황야를 배경으로 한 전장.
전요한은 한 명의 기사가 되어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스걱! 스걱!
그가 휘두르는 대검에 적들이 속절없이 쓰러졌다.
“이봐, 라스! 전선이 무너질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동료 기사들 중 한 명이 최전방에서 물러나며 다급하게 묻는다.
정예 전력의 분발에도 파상공세를 막기엔 수적인 차이가 심하다.
“……!”
전요한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여기에서 왜 전투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만약 여기서 패배하면 적들에게 진입로를 내어주게 된다! 주군이 자리를 비우신 상태라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돼!”
기사단장이라고 불렸던 사내가 결사 항전의 뜻을 내비친다.
그 모습을 보던 전요한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이것이 잔혹동화라면 내버려 둘 경우의 결과는 썩 좋지 않을 것이다.
“어이, 왜 그렇게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는 거야, 라스! 이제 와서 겁이라도 난 거냐?”
지친 아군을 격려하던 기사단장이 멍하니 서 있는 전요한을 힐난했다.
그러고는 다시 최전방으로 나아가서 용맹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카랑! 카랑!
정예 전력의 헌신으로 전선은 얼마간 유지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허공에서 나타난 레드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으면서 전장은 무간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화르륵!
신화에나 등장하는 마법 생명체.
그런 엄청난 녀석을 직접 조종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화룡군주가 나타났다!”
“이런 제길, 하필 지금 타이밍에!”
차라리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던 기사들이 절망감에 휩싸인다.
아군에겐 당장 드래곤과 대적할 만한 전력이 없는 탓이었다.
줄곧 용맹한 모습을 보이던 기사단장마저도 침묵하고 있을 때였다.
콰드드득!
전선의 주위로 거대한 얼음 방벽이 생겨났다.
놀란 전요한이 고개를 돌리니 숨을 헐떡이는 시르케의 모습이 보였다.
“하아, 하아….”
시르케는 인근 영지의 다른 전장에서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대마법사님!”
“돌아오셨군요!”
뜻밖의 등장에 구원받은 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전개에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래야지!”
오랜 동료와 함께라면 이런 시련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렇게 믿으며 전요한이 판금 갑옷을 벗어 던졌다.
“라스, 무슨 짓이야?”
“대마법사님이 오셨는데 뭣 하러 무장 해제를 해?”
주위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복장을 한 후, 레드 드래곤과 대적 중인 시르케를 도왔다.
“제가 앞에서 최대한 시선을 끌겠습니다. 그동안 녀석에게 치명타를 넣으세요!”
“알았어. 잘 부탁한다.”
두 사람에게 긴말은 필요 없었다.
곧이어 격렬한 난투전이 벌어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화룡군주의 안면에 패색이 짙어져 갔다.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우다니, 네놈의 이름은 뭐냐?”
“전요한이다.”
“보아하니 제대로 된 칭호도 받지 못한 것 같군. 금은보화와 괜찮은 영지를 줄 테니 이쪽에 붙는 것이 어떻겠나?”
갑작스러운 포섭 제안이었다.
전요한은 뒤로 물러서며 씨익 웃었다. 그의 장검이 은은하게 푸른 검기를 내뿜고 있었다.
“글쎄, 아무래도 내가 손해 보는 장사 같은데?”
비록 전황이 안 좋긴 하지만 시르케와 함께라면 녀석을 물리칠 자신이 있었다.
“그 검, 확실히 예사롭지 않군.”
“당연하지, 이건 명검이니까.”
“그것을 소유할 만한 자질이 있는지 어디 한번 시험해볼까?”
화룡군주, 다릴이 자신의 마법검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사파이어가 박힌 사자 문양의 장식은 팬드래건 가문의 상징이었다.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검술명가.
단지 레드 드래곤만으로 출세한 것이 아니었다.
“시험이라면 아까 충분히 받았어! 네놈이 누군지도 솔직히 관심 없고 말이야!”
전요한이 도약하자 녹티스가 푸른 잔영을 남기며 물결치듯 다릴을 향해 날아들었다.
다릴은 얼어붙은 레드 드래곤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방패로 그 공격을 받아내려 했다.
전요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후 다릴의 머리를 노렸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다릴이 살짝 밀려났다.
루이는 바닥에 착지하면서 다릴의 다리를 베려 했다.
하지만 노련한 기사인 다릴은 예상했다는 듯 점프하며 루이의 머리를 향해 롱소드를 휘둘렀다.
“생각보다 꽤 하네?”
다릴의 육중한 공격을 받아내며 전요한이 말했다.
그는 녹티스를 양 손으로 들어 올려 다릴이 휘두른 마법검을 막고 있었다.
“아까 경솔하게 말했던 것을 사과하지. 너는 훌륭한 전사다. 역시 겉모습만으로는 상대의 실력을 파악할 수 없군.”
“그렇게 말해주니 기분이 좋은걸. 나름 유명하다는 기사한테 인정받다니 말이야.”
“그럼 이제부터 진심으로 상대하도록 하지.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다릴이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마법검이 검기를 발하며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다릴이 마법검이 허공에 휘두르자 거대한 화염이 전요한을 향해 날아갔다.
전요한은 녹티스를 휘둘러 그 참격을 반으로 갈랐다. 푸른 섬광과 함께 다릴의 일격은 그대로 소멸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다릴은 깜짝 놀라서 검을 고쳐 잡았다.
“나도 전력을 다해 널 쓰러뜨릴게, 다릴 경!”
그 말과 함께 전요한이 다릴을 향해 다시 한번 도약했다. 녹티스에서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와 전요한을 뒤덮었다.
전요한은 자신을 뒤덮은 빛의 구체와 함께 다릴에게 여러 각도에서 연격을 퍼부었다.
다릴은 가속도가 붙은 전요한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해 반격은 커녕 그의 공격을 방어하기 급급했다.
전요한의 모습이 사라지자 다릴은 주위를 둘러봤다. 멍하니 있던 그는 고개를 들고 나서야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참격을 보았다.
곧 푸른 섬광이 그를 뒤덮었다. 전요한은 바닥에 착지해서 다릴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내가… 졌다….”
쓰러지는 것을 자신의 검으로 간신히 버티며 다릴이 말했다.
전요한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패배를 인정한 상대를 향해 검을 휘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럼 좀 지나갈게. 다릴 경.”
레드 드래곤은 시르케가 붙잡아두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전요한이 자신을 지나치고 나서야 다릴은 무릎을 꿇었다.
상대의 앞에서 주저앉는 건 기사로서의 수치였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그는 호흡을 바로잡았다.
“아직 시련이 다 끝나지 않은 건가요? 화룡군주는 그냥 단순한 들러리에 불과한가 보군요.”
레드 드래곤이 더는 공격해오지 않자 시르케가 전황을 살폈다.
멀리서 보이는 마물들의 군단이 심상치 않다.
“이야, 정말 엄청나게 많네. 저놈들을 다 때려눕혀야 하는 거야?”
“아무래도 빨리 돌아갈 생각은 포기해야겠군요.”
세 명의 지휘관이 배후에서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강해 보였다.
잡담을 나누던 두 사람은 다시 전투 준비를 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살아남는 수밖엔 없다.
괴이한 나팔 소리와 함께 마물들이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최전방에 서있던 기사들이 마물들을 향해 다채로운 오러를 날렸다.
몰려오는 마물들을 에워싸면서 참격과 백병전으로 막아낸다.
그리고 후방에 있는 소서러 부대와 아처 부대가 그들을 지원한다.
“…….”
마왕 벨제뷔트는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거대한 몸은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존재 그자체가 심연의 어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주변의 공간이 왜곡되면서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옥을 지키는 악마의 개, 케르베로스.
개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검은 불꽃.
닿기만 해도 지옥의 형벌을 상대에게 가할 수 있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케르베로스가 마물들과 함께 기사들을 향해 돌격하자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려워하지 마라! 공격을 재개한다, 각자 위치를 지켜!”
누군가가 소리치자 케르베로스를 향해 수많은 참격과 공격 마법들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마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마물에게 정령계의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케르베로스가 기사들이 있는 진영을 휩쓸며 달리자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뒤따라 몰려온 마물들이 괴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진 임페리얼 나이트들을 물어뜯었다.
묵시록에서나 나올 법한 세기말의 전투. 전장은 걷잡을 수 없는 피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이리로 오고 있는걸? 저 마왕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맞서 싸우는 수밖엔 없습니다.”
전요한의 말에 시르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곧이어 그림자가 일렁이며 검은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왕 아스타로트.
그의 형체는 거인같이 보였지만 온 몸이 칠흑의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심연 속에서 그의 두 눈이 핏빛으로 빛났다.
전요한은 예전에 대미궁에서 마물과 마왕에 대해 이야기하다, 수인족 노인네가 자신에게 해줬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 마왕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안 된다고들 하지. 마왕은 심연의 어둠 그 자체거든. 그의 검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느새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어둠과 마주하게 된단다.
수인족 노인네가 주의를 줬던 마왕의 눈은 지금 전요한을 향해 있었다.
마왕 아스타로트과 그의 직속 부대. 마왕을 제외한 나머지 존재들도 천 년 이상 존재해온 정예전사들이었다.
“오랜만이군, 라스. 이번에도 날 방해할 생각인 것 같지만 어림없다. 인간은 진정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스타로트의 눈이 붉게 번쩍이자 정예부대가 돌격해오기 시작했다.
시르케는 수호 결계로 주위를 보호한 후 각성모드에 돌입했다.
“하는 수 없이 전력으로 맞서야겠군요. 전요한, 당신도 더는 시간을 끌면 곤란합니다.”
수적 열세에 처한 상황이라 속전속결이 답이었다.
“방해할 생각은 하지 마라, 엘프 마법사. 저번처럼 운 좋게 막아내진 못할 테니까.”
아스타로트의 말과 함께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라 시르케를 덮쳤다.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자 허공에서 한 줄기 섬광이 내려와 그림자들을 소멸시켰다.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승부를 내주마!”
전요한이 그렇게 말하며 녹티스를 들어올렸다. 마력을 주입받은 녹티스가 거친 오러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전요한은 기합을 지르며 달려가 아스타로트를 향해 검격을 휘둘렀다.
아스타로트는 이리저리 피하다가 허를 찔려서 하는 수 없이 일격을 막아냈다.
"시르케!"
"네, 알겠어요!"
천사의 날개를 펼친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황금빛의 기둥이 주변을 휩싸면서 아스타로트를 덮쳤다.
기사들이 눈을 뜨자 아스타로트가 황금빛 불꽃에 휩싸여 소멸하는 모습이 보였다.
“와아, 마왕을 쓰러뜨렸다!”
“라스와 율리케 님이 기적을 일으켰다! 지금 밀고 나가야 해!”
불리했던 전세가 단번에 기울었다. 구국의 영웅으로 떠오른 두 사람은 머쓱한 표정을 지은 후 후퇴하는 마물들을 바라봤다.
* * *
순백의 빛에 휩싸인 성소.
주위에 배치된 거울들이 하나씩 깨져나가는 걸 보며 마녀는 절망했다.
분명 만만치 않은 시련이었을 텐데, 두 사람은 일심동체라도 된 듯이 문제 상황을 이겨내고 있다.
“이러다간 무사하지 못하겠어. 어서 도망을 쳐야겠다.”
메데이아가 자신에게 내린 임무는 딱 여기까지였다.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기에 서둘러 성소를 빠져나왔다.
마녀가 어두운 숲속으로 모습을 감추려 할 때였다.
타앙!
어디선가 날아온 마탄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간다.
“쿨럭!”
예상치 못한 급습에 마녀는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이후 쓰러진 채 피를 토하고 있는 그녀의 곁으로, 메데이아가 다가왔다.
“이런,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군요. 죗값을 치러 주셔야겠습니다.”
소미궁의 주인은 다름 아닌 메데이아였다.
마녀를 불태워버린 후 그녀는 다시 자취를 감췄다.
이제 겨우 첫 번째 층계가 돌파당했을 뿐.
아직 더 많은 시련이 전요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