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상아탑의 시련 (1)
“예상대로 전요한은 함정에 걸려들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군.”
의장석에 앉아 있는 서창곤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를 비롯한 장로들은 스크린에 비치는 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상층부로 돌파해오는 속도가 매우 빠르군. 벌써 중층부까지 도달했어.”
고태석이 안경을 고쳐 쓰며 우려를 표했다.
그는 원하는 결과를 위해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걱정하지 말게. 잃어버렸던 유물을 되찾았으니 「요람」을 완성하는 건 어렵지 않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채강준이 침착하라며 손을 들어 보였다.
요람은 언젠가 닥칠 대재앙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장소.
이제부터 신의 권능을 빌려서 학원도시의 상아탑을 요람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관리국 국장은 결국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군요.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둘까 생각했는데요.”
안타까움을 표한 후 금발 여인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애덤 카다스키의 뒤를 이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연구소장이었다.
“애초에 생각이 달랐던 거지. 유명학은 예언서의 특정부분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어.”
서창곤은 냉정하게 동정론을 쳐냈다.
그러고는 채강준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네의 딸은 모든 준비가 되었나? 본격적인 실행이 코앞이네.”
채린은 현재 요람의 최심부에 구속된 채 저항하는 중이었다.
전요한이 자리를 비웠을 당시 에 벌어진 일.
그럼에도 채강준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대의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이 따르는 수밖에 없지.”
가문을 위한 일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식이었다.
모처럼의 정략결혼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니 이렇게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만 한다.
혈육 간의 인연마저 저버리는 걸 보며 금발 여인은 쿡쿡 하고 웃었다.
“과연 인류의 미래를 이끄는 선지자다운 결정이군요.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어떤 결과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금발 여인의 모습을 뒤집어쓴 메데이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 * *
“후우. 다 처리했군요.”
전투를 마친 시르케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녀의 눈앞엔 수많은 이능력자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제 곧 있으면 중층부입니다. 왜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는지 위원회장에게 따져야겠어요.”
줄곧 선두를 지켰던 멜리사는 상당히 지친 기색이었다.
그녀가 계단을 따라 중층부로 향하려던 때였다.
스스스슥!
푸른 마력이 단층을 형성하며 모든 출입을 봉쇄했다.
졸지에 튕겨져 나간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뭐죠? 상위 마법 따위로 방벽이라도 세운 건가요?”
상아탑의 절반가량을 뒤덮을 정도이니 그 규모가 엄청났다.
일개 마법사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
시르케도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이건 일반적으로는 관측하기 어려운 형태의 권능입니다. 아마도 성유물의 힘을 빌렸겠죠.”
목적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상아탑을 성역화하여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속셈.
일단 성역화되고 나면 더는 지금까지처럼 계단을 따라서는 상층부로 올라갈 수 없게 된다.
“여러모로 귀찮게 하네. 하지만 방법은 있는 거겠지?”
창밖의 풍경이 공허하게 변해버린 것을 보며 전요한이 해결책을 물었다.
“네, 저들이 활성화한 성유물은 상위 차원의 권능자와 관련 있을 겁니다. 우선은 그 소재부터 파악해야 하겠죠.”
성유물을 회수하여 동력원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골자였다.
시르케는 일단 눈앞의 시련에 도전해볼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먼저 해볼까.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까 자격은 있겠지?”
뒤쪽에 있던 박수호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그는 푸른 마력으로 된 방벽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들었다.
티잉!
하지만 야박하게도 장벽은 박수호를 가볍게 튕겨냈다.
처음에 멜리사를 거부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무언가 조건이 있나 보군. 시련에 도전하는 것에 대해서.”
전요한은 턱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 되면 일부는 남겨두고 진입해야만 한다.
“뭐, 문제 있겠어? 어차피 누군가는 입구 쪽에 대기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해.”
한나가 별상관 없다며 방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자격을 증명하겠단 것처럼 어깨에 힘을 줘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튕겨나가는 건 마찬가지.
한나까지 거부당하자, 시르케가 나서게 되었다.
“탐지 마법으로 파악해본 결과, 시련의 구조는 소형 미궁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상아탑을 기반으로 해서인지 층계별로 무대가 나뉘어 있군요.”
성역의 층계를 모두 돌파해야만 최상층부의 원로원이 있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르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가자. 어떻게든 되겠지.”
두 사람이 함께라면 이러한 시련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잠시 후, 다시 눈을 뜨니 숲속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서 오시죠. 잔혹한 동화 속의 세계에.”
눈앞에 서 있는 누군가가 새침하게 전요한과 시르케를 맞이했다.
어딘가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는 그녀는 단정한 옷차림의 메이드였다.
“동화 속의 세계?”
“아무튼, 저는 안내자니까 군말 말고 따라오세요. 말을 듣지 않아서 생기는 모든 문제는 당신들의 책임인 겁니다?”
만약 혼자서 길을 잃기라도 하면, 그대로 미아가 되어버린다.
잠깐 한눈을 파는 것도 매우 위험할 수 있었다.
비밀을 아는 듯한 메이드의 경고에 시르케는 수상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첫 무대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군요.”
하지만 현재로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엔 없었다.
일행이 한창 숲속을 헤쳐 나가고 있을 때였다.
돌연,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더니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호호, 나의 성역에 들어오다니. 건방진 놈들이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홍색 머리칼의 마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준비는 되어 있겠지? 그렇지 않다면 매우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야.”
이렇게 마주친 이상 가만둘 수 없단 듯이 마녀가 노려본다.
이에 전요한은 보란 듯이 녹티스를 꺼내 보였다.
“무력 충돌이 불가피하다 이건가? 마침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인데.”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마녀는 간단한 제안만 했다.
“너희를 여기서 죽인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그러니 한동안 괴롭힐 수 있는 문제를 내줄게. 해결하면 나의 성역을 가로질러 갈수 있도록 허락해주마.”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정면 대결보단 나을 거란 생각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뭔데요? 들어나 보죠.”
“수수께끼라도 내려는 건가요?”
마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은 후, 일행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우선 나를 따라와라. 문제를 풀려면 일단 성소로 가야 하니까.”
* * *
마녀의 거주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할로윈 파티를 열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의 집.
낡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식탁 주위로 수많은 거울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왜 이렇게 많은 거울을 배치해둔 겁니까? 무슨 수작이죠?”
“후후. 내가 방문객을 골려줄 때 주로 쓰던 소품이지. 때로는 진실을 보여주기도 하고, 반대로 거짓을 보여주기도 하니까.”
그들에게 문제를 내주기 전에 마녀는 식사부터 권했다.
식탁 위에는 귀족들이나 즐겼을 만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음식에 독을 타는 진부한 수작질은 아니겠죠? 허튼짓은 안 하길 바랍니다.”
“그런 장난질로 만족할 거였으면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다. 이곳의 규칙이니 잔말 말고 따르거라.”
음식이 안전하단 걸 보여주기 위해, 마녀는 먼저 식탁 앞에 앉아 우아하게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일행은 차례로 앉아 조금씩 음식의 맛을 보았다.
“생각보다 먹을 만한데요?”
“맛있어….”
“무슨 재료를 넣었는진 수상하지만 제법인걸?”
조금씩은 경계심을 풀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요한은 눈앞의 진수성찬보단 주위에 가득한 거울들을 신경 쓰고 있었다.
만약 음식이 방심시키기 위한 장치이고, 거울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이건 당신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 상황이니 잘해 봐요. 저는 허상의 존재라 도움이 안 되거든요.”
메이드가 자신은 빠져 있겠다고 미리 엄포를 놓았다.
전요한은 슬슬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문제는 뭐죠?”
자세히는 몰라도 분명 저 거울들과 관련된 것일 터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자 마녀는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중에서 세 개의 거울을 들여다 보거라. 그러고 나서 정답을 모두 맞히면 돼.”
“그게 끝입니까?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하나를 틀릴 때마다 둘을 추가적으로 맞혀야 한다. 예를 들어, 오답이 두 개라면, 네 개의 거울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거지.”
오답이 계속 늘어나면 영원히 이곳에서 살아야 할 수도 있었다.
순간 긴장감이 주위를 사로잡았고, 전요한이 자진하여 거울의 시련을 받아들였다.
“어서 시작하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거울을 들여다보자, 침대 위에서 두 남녀가 알몸으로 달라붙은 채 헐떡이는 모습이 보인다.
전요한과 시르케.
황홀한 표정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이 낯부끄러웠기에 전요한은 시선을 살짝 피했다.
“정답을 말하거라. 그건 진실일까, 거짓일까?”
마녀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분명, 현실에선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전요한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진실 혹은 거짓.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란 듯이 말하고 있지만, 실은 애매한 경우가 존재한다.
더욱이 이곳은 동화 세계라고 했으므로 조금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 봐도 되겠다 싶었다.
“진실인 동시에 거짓입니다. 동화 속의 세계에선 모두가 꿈을 꾸고 있으니까요.”
“…제법이구나. 처음부터 눈치채다니. 그렇다면 질문의 방식을 바꿔야겠어.”
마녀는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다음 거울을 보라고 말했다.
전요한이 한 걸음 더 앞으로 가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엔 새로운 광경이 거울에 비쳤다.
시르케와 멜리사는 잔혹하게 살해당한 채 쓰러져 있고, 채린이 뒤에서 자신을 단검으로 찌른 상황.
미래의 벌어질 거라고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이끄는 인과율에 대해 설명해봐라. 어째서 모두가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거지?”
이번 질문은 상당히 추상적이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이라는 전제하에 이야기하는 거라 숨겨진 요소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혹시라도 채린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걸까?’
지금까지 연락이 없었던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가 본의 아니게 이용당하고 있을 경우를 생각해봤다.
“이건 우리가 시련에 실패했을 경우의 미래일 겁니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동료를 구원하지 못한 결과 모두가 파멸하게 되는 결말이죠.”
딱히 미래시가 발동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치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듯이 보였기에 마녀는 놀라서 허둥지둥 말을 얼버무렸다.
“그, 그래. 정답을 맞혔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거울을 보거라.”
덕분에 진실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한걸음을 더 앞으로 걸어갔다.
다음 거울에 비친 형상은 다름 아닌, 불꽃으로 이루어진 한 마리의 새.
그것은 시커먼 재가 되어버리는 세계를 허무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네가 저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할 거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면?”
마지막 질문도 잠재적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결코 원하지 않는 결과였으나, 이번만큼은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최후의 불꽃이 사그라들 때까지 지구를 지키겠습니다.”
“…….”
전요한이 담담한 모습을 유지하자 마녀는 순간 침묵했다.
이후 주체할 수 없이 경박한 웃음을 터트리며 혼자 박수를 쳐댄다.
“호호호호! 재미있네! 정말로 재미있어! 이래서 그분도 방심하지 말라고 하셨구나!”
그러고는 돌연 마법을 시전하여 주위의 거울 중 하나에 강렬한 빛을 쏘았다.
그 결과, 빛이 이리저리 반사되면서 주위를 뒤덮었고 일행은 새로운 시련과 마주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