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밝혀지는 흑막 (5)
“크윽!”
에테르 정령군주의 맹렬한 공격에 쿠루엘라는 몸을 움츠렸다.
선홍색의 마력 방벽으로 버텨내며 입술을 잘근 깨문다.
“까불지 마라! 열등한 잡종 주제에!”
변이종의 여왕으로 불리며 군림해온 그녀였다.
각 종족의 우수한 특질만을 개량하고 보완하여 마침내 궁극의 생명체로 거듭난 존재.
상급의 영계 소환 마법이라 해도 쓰러뜨리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진정한 전투는 지금부터라고 할 수 있죠.”
말을 마친 시르케가 눈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듯, 마치 해일처럼 일렁이는 영력이 주위를 휘감기 시작한다.
사라락.
새하얀 날개가 피어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포근한 느낌의 날개는 고고한 천사의 것과 같았다.
“재미있구나. 각성을 할 수 있었다니. 게다가 흔치 않은 종류로군.”
쿠루엘라가 시르케의 머리 위에 떠있는 황금빛의 원반을 응시했다.
화신의 일부로서 각성한 시르케는 머리색도 반투명하게 변해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없으면 말이죠.”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 중엔 한결같이 더 나은 미래를 열망하는 소년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특별한 자질을 지닌 그는 오늘도 내일이라는 희망을 위해 순수한 의지를 불태웠다.
전요한.
그와 함께 나아가다 보면, 진실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머니신이 안배해 놓은 시련의 진정한 의미를. 시르케 그녀가 추구하는 화합과 공존이 이루어낸 미래가 보여줄 세계의 형태를.
“이상? 그런 것 따윈 약자들의 망상에 불과하다. 내가 현실의 냉혹함을 몸소 느끼게 해주지.”
에테르 정령군주의 범위 공격을 피해내던 쿠루엘라가 눈을 번뜩였다.
그녀는 순식간에 마력 파동을 일으켜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난 후, 시르케에게 달려들었다.
“변이인자를 주입해서 타천사로 만들어주마!”
그녀에게 손이 닿기만 하면 신경물질이 가득 담긴 촉수를 체내에 박아 넣을 수 있었다.
지척까지 다가온 쿠루엘라는 환희에 찬 웃음을 지어보였다.
틀림없는 자신의 승리라며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스걱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사지가 보기 좋게 잘려나갔다.
“뭣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현상에 쿠루엘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괜히 각성을 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상위 권능을 우습게 생각했나 보군요.”
시르케는 피가 철철 흐르며 바닥에 나뒹구는 쿠루엘라의 몸뚱이를 흘끔 내려다봤다.
치명상이긴 하지만 재생능력으로 순식간에 재생해 금방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몇 번이고 베고 으스러뜨려 봐라. 나는 그때마다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날 테니.”
육체능력에 특화된 쿠루엘라는 장기전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확실히, 성가시긴 하겠군요. 당신은 웬만한 영력으로도 사멸시키기 어려울 테니까요.”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품에서 마녀의 심장을 꺼내 지팡이의 끝에 가져다 댔다.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제게 걸맞은 새로운 장비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본래의 위명을 되찾는 거죠.”
처음 깨어난 수정 속에 함께 보관되어 있던 유물이었다.
성능도 나쁘지 않아서 계속 사용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알려진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잠재워진 이능을 일깨우려면 이처럼 흔치 않은 매개체가 필요합니다. 가치 있는 보석에 혼재한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해준다고 해야 할까요.”
눈부신 빛에 휩싸인 지팡이는 점차 형상이 변화하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것을 느낀 쿠루엘라가 방해하려 했으나, 에테르 정령군주가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휘이이익!
서슬 퍼런 영체가 푸른 물결처럼 휘어지며 빈틈을 노렸다. 단 한 순간도 접근을 허용할 수 없다는 듯 구는 모습에 쿠루엘라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난 후 이를 갈았다.
“이런 곳에 갇히지만 않았다면 귀찮아지지 않았을 텐데.”
현재 결전을 벌이는 이공간은 영계와 가까운 차원에 속해 있었다.
변이종의 여왕으로서는 권속들을 소환하기도 어렵고, 탈출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
한편, 시르케는 각성을 한 직후라 그런지 한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불필요한 저항일 뿐입니다. 이곳이 아마도 당신의 무덤이 되겠죠.”
변모하던 지팡이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었다.
창공의 고취를 한껏 머금은 듯한 수정이 의지를 지닌 것처럼 푸른빛을 발한다.
[대천사의 지팡이]
성급 : ★★★★★
설명 : 보유 마력을 소진하여 천상의 권능을 발현한다. 성역 내에 있는 모든 악한 존재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킨다.
특히 마족과 전투를 벌일 때 유용한 성유물이었다.
변이종의 경우에도 타천사가 저주를 내리면서 발생한 재앙이므로 적지 않게 영향을 받았다.
시르케가 이공간을 성역으로 발동시키자, 쿠루엘라는 극한의 고통을 느꼈다.
“뭐, 뭐야! 도대체!”
머릿속에 거룩한 성가의 멜로디가 계속해서 울려 퍼진다.
영혼마저 교화되는 듯한 낭송에 기존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마저 어려워졌다.
“그럼 승부를 내볼까요. 당신을 제대로 쓰러뜨려야만 그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시르케가 날개를 펄럭였다.
최후의 주문술식이 시작되자, 쿠루엘라는 눈을 번뜩였다.
“이대로 순순히 산 제물이 되어줄 것 같으냐!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너 정도는!”
앙상한 모습의 가시 날개가 양쪽으로 펼쳐졌다.
이후 모든 것을 내건 돌격을 시도하는 쿠루엘라.
에테르 정령군주의 끈질긴 방해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녀는 끝내 시르케의 곁까지 다가왔다.
“죽어버려라, 잡종!”
쿠루엘라가 피눈물을 흘리며 손톱을 날카롭게 세웠다.
진홍빛 사선이 그어졌으나, 그 일격은 조금도 시르케에게 닿지 않았다.
“최후의 할 말은 그뿐인가요?”
정신을 집중하던 시르케가 눈을 번쩍 떴다.
이와 동시에 휘둘려지는 대천사의 지팡이.
정화의 황금색 불꽃이 치솟아 오르며 쿠루엘라를 집어삼킨다.
“이대로,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나는 변이종의 여왕이야!”
사지가 타들어가는 고통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극한의 재생능력을 이끌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한 줌의 재로 화해가는 쿠루엘라를 보며 시르케는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곤란한 문제는 이걸로 해결되었다.
남은 건 전요한 일행이 사건을 마무리 짓는 일뿐.
마력이 고갈된 여파로 인한 탈진감을 느끼며 시르케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 * *
“설마 일대일로 맞붙으려는 생각인가요?”
돌진하려는 전요한을 향해 멜리사가 물었다.
한나도 좋은 생각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함께 그를 만류했다.
“녀석의 전력은 만만치 않을 거야 각성자 수준의 이능을 여럿 보유하고 있을 테니까.”
마족인 메데이아가 연구에 필요한 생체자료를 제공해줬을 터였다.
덕분에 지금의 애덤 카다스키는 대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다가오는 겉모습으로부터 느껴지는 기세만 봐도 심상치 않은 능력을 숨겼으리란 걸 알 수 있다.
“강한 상대이긴 하겠지만, 여기에서 반드시 쓰러뜨려야 합니다. 안 그러면 학원도시가 위험에 처할 수 있어요.”
전요한은 애덤을 타도할 필요성에 대해서 확실히 했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학원도시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선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는 무고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동료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애덤을 전력으로 이겨내겠다고 결심했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채강윤과 함께 메데이아를 견제해 주세요. 그녀가 배후에서 수작을 벌이면 더 상황이 곤란해질 겁니다.”
메데이아는 일전에 상대했던 공작 라틴젤과 동급의 마족이었다.
자신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녀는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
“여럿이서 덤벼도 괜찮아요. 그래봤자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잖아요?”
주의해야 하는 대상은 불가사의한 잠재력을 지닌 전요한뿐이었다.
세계적인 전력에 속하는 멜리사도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꽤나 자신만만한 모습이네. 이봐, 괜찮겠어? 있어도 없는 것처럼 무시당해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나가 혼자서 팔짱을 꼈다.
멜리사도 양동작전의 필요성을 느끼고는 검끝을 메데이아에게로 돌렸다.
“얕잡아본 것을 후회하게 해드리죠. 이래봬도 저는 위계가 좀 있다는 마족들까지 사냥해 봤거든요.”
등 뒤로부터 발키리를 연상되게 하는 이형의 날개가 펼쳐졌다.
타오르는 불길처럼 붉은색.
그것을 본 한나도 물질 변환 능력을 이용하여 주위의 방어포탑들을 주황색으로 강화했다.
기계종 드론이 해킹을 통해 방주의 시스템을 장악해둔 덕분이었다.
“저는 후방에서 자발적인 판단으로 여러분을 서포트하겠습니다. 모두 힘내주세요.”
이로써 대결 구도는 확실히 잡힌 셈이었다.
전요한은 으스대며 대치 중인 애덤을 향해 먼저 달려들었다.
“어디 한번 실력을 자랑해 보시지! 오랫동안 비밀리에 진행해 왔다던 연구의 결실을 확인해보고 싶군!”
신화적인 유전자라느니, 신인류라느니 잘도 망언을 내뱉었다.
그래 봐야 어설픈 모방에 불과할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맞붙어보니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카랑!
씨익 웃고 있던 애덤이 가볍게 검격을 막아냈다.
동체시력을 극한으로 이끌어낸 덕분에 모든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예측할 수 있는 덕분이다.
“시덥지 않은 연구 주제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군. 분명, 아직까지는 내가 이룩해낸 업적의 진가가 드러나지 않겠지.”
하지만 점점 더 많은 각성자의 샘플을 활용할수록, 완성도는 올라가고 허점도 사라질 것이다.
아니, 굳이 다양한 샘플을 수집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눈앞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개체가 있으니까.
“내 복제품이라도 양산할 생각이야? 아니면 그 기술력으로 너의 전력을 한층 보강시키는 데 써먹으려고?”
“당연한 결론 아닌가? 네 녀석의 특질을 이어받으면 진정한 구원자로서 발돋움할 수 있게 된다.”
어떠한 형태의 불리한 간섭에도 결코 영향받지 않는 「절대면역」.
고속성장의 비결로 보이는, 「환골탈태」 수준의 개안.
이외의 사기적인 전투력까지 모두 관찰해둔 바 있었다.
혼란한 시대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겠다며 탐욕을 드러내는 애덤 카다스키.
그는 뒤틀린 표정을 짓더니, 신체 일부를 변형하여 전투에 특화된 형태를 갖췄다.
꿈틀거리던 몸체에서 양쪽으로 팔 두 쌍이 튀어나오자, 전요한은 순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거미도 아니고, 팔이 여섯 개야? 신기하네.”
“키메이라의 변이능력을 활용한 것이다. 어떤 환경에 놓여 있든 그에 걸맞는 육체를 재조직할 수 있지.”
주로 근접전을 펼쳐오는 전요한에 맞서려면 팔의 개수를 늘리는 편이 유리했다.
각각의 손에 다양한 무기를 쥐어보이자, 전요한은 일단 뒤로 물러섰다.
“어디 보자, 저런 녀석을 공략하는 방법이 뭐가 있었지?”
대미궁에 갇혀 있을 때 별의별 상대와 격전을 벌이곤 했다.
이윽고 비슷한 유형의 전략을 내세웠던 한 마족이 떠오르자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아, 그래. 각종 무기로 위협하며 매 순간, 유리한 상성을 관철하려는 놈이 있었지.”
파훼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전요한이 태연하게 아르티나를 들어 올리자, 애덤은 조금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어째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것이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제는 더 시간을 끌어선 곤란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애덤이 먼저 전요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디 한번 해봐라! 네놈이 그깟 오래된 검 한 자루로 나의 여섯 무기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