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밝혀지는 흑막 (4)
오랜 세월에 걸쳐서 전승되는 유물엔 고유한 이능이 있다.
그런데 전승의 맥이 끊겨 신화와 전설이 잊힌 경우 그 진가가 곧바로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빙결의 마법검, 아르티나 또한 마찬가지.
혹한을 일으키는 것이 주된 이능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놀랄 만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각성을 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눈치챘어.’
그만큼 유구한 시간 동안 전승마저 끊긴 채 잊힌 비운의 명검이었다.
이제는 모두에게 진명을 드러낼 때.
드래곤하트의 마력을 완전히 흡수하고 나면 본연의 모습으로 소생하게 될 터였다.
“엄청나군요. 무언가 형언하지 못할 위압감이 느껴집니다.”
옆에 있던 멜리사가 감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드래곤하트를 집어삼킨 아르티나는 더욱 맹렬한 한기를 내뿜으며 새롭게 거듭나는 중이다.
“재미있구나. 다른 이능을 자양분으로 삼아 스스로 진화하는 유물이라니.”
처음 접하는 기현상에 애덤 카다스키가 눈빛을 빛냈다.
그는 연기를 그만두고 손에 들고 있던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장난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군. 역시 너는 최상급의 잠재력을 지닌 각성자야.”
좀비 사태를 해결했을 때부터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전대미문의 대미궁으로부터 혼자 생환한, 수수께끼의 사내.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강대한 대적자를 차례로 물리치면 이곳까지 왔다.
단지, 자신의 세계를 지켜내겠다는 일념만으로.
예언서에 의하면, 분명 혼란한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신들의 세상에서 내려온다는 신의 사자일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할 터였다.
왜냐하면, 자신은 다름 아닌 그 「약속된 구원자」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자폭할 마음은 사라진 거야? 물론 그러려고 했어도 우리가 막았을 테지만.”
본래의 형체를 완성해가는 아르티나를 쥔 채, 전요한이 물었다.
애덤은 당치도 않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애초에 터무니없는 연기였다. 잠시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에 불과했지.”
내용물을 전부 소진한 주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한나가 당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설마… 비밀 프로젝트를 혼자서 완성한 거야?”
학원도시의 원로원 장로들이 몰두하고 있었던 원대한 계획.
초인이 된 각성자들을 연구하여 그 인자를 유전적으로 양산하는 연구가 마침내 결실을 거둔 것이었다.
프리메이든 또한 이 금단의 연구에 협력 중이었으므로, 한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4성급의 각성자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미치광이 과학자가 독점하는 건 그야말로 재앙이다.
“크크. 아직 결함이 남아 있긴 하지만, 거의 결실을 맺었다고 할 수 있지. 나는 신화적인 유전자를 완성해낼 것이다.”
어떠한 야만성도 없고,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에 대한 갈망.
나약하게 태어난 이들의 오래된 비원을 이루고 신인류의 시대를 여는 것이 애덤의 원대한 야망이었다.
“너의 광기 어린 망상에 누구도 희생되지 않게 하겠어. 지금 이 자리에서 끝을 맺어주마.”
변이종의 여왕을 끌고 이공간으로 향한 시르케를 떠올리며 전요한이 이를 악물었다.
이후 완연한 형체를 드러내는 미지의 무기.
그것은 더 이상 혹한을 만들어내던 냉기를 내뿜고 있지 않았다.
[전사자들의 검, 녹티스]
성급 : ★★★★★
설명 : 수많은 영웅들의 열망이 서린 유물. 특정한 상황이 재현될 때마다 그에 얽힌 설화와 비기가 전승된다.
5성급의 무기는 현세에선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기이한 영기를 머금고 있는 녹티스를 보며 멜리사는 입을 벌렸다.
“대체… 그건?”
최초로 발견되었을 때도 주인을 까다롭게 골랐다고 했었다.
당시에 3성이었고, 우연찮게 성급이 한 단계 올랐다 들었는데.
빙결의 마법검이었던 시절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잊혀진 유물의 진정한 위력입니다.”
전요한은 보란 듯이 모두를 향해 녹티스를 들어 올렸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전승하지 않았기에 맥이 끊긴 과거의 의지.
그것은 단절된 채, 혹한 속에 남겨졌고 후일 빙결의 마법검으로 재발견되었다.
하지만 새롭게 쓰여지는 이야기는 지난 영광을 빛낼 수 없었기에, 녹티스는 오랫동안 주인을 선택하지 않았다.
언젠가 자신의 진가를 증명하게 될 날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높은 등급의 성유물도 방치되면 본래의 이능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하는 건가?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을 배웠네.”
기존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지식에 한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의 상식에 의하면 성급은 잠재력을 반영하는 기준이다.
그런데 실은 현재 상태를 반영하는 수치에 불과했다니, 놀랄 만한 발견이었다.
“설명을 들으니 제법 탐이 나는군. 너희들의 목과 함께 전리품으로 챙겨 가겠다.”
말을 마친 애덤이 서서히 이쪽으로 다가왔다.
녀석의 모습은 이제 평범한 과학자의 것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욕망이 비틀린, 불길한 마기가 느껴지자 멜리사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배후에 마족이 있었어요! 난항에 빠져 있던 비밀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군요!”
생각해보면, 지난번에 망신을 당한 마계 진영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전면으로 나서는 대신, 이렇게 교묘한 계략을 펼치며 현세를 어지럽히고 있다.
“후후. 맞아요. 마침 재미있는 실험을 하고 있길래 조금 거들어줬죠. 당신들의 전력도 한번 확인해 볼 겸.”
뒤쪽에서 수의복을 걸친 은발 여인이 나타났다.
질투의 죄악, 스반힐트와 흡사한 외모에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집착녀의 여동생이라도 나타난 건가?”
“저는 질투의 대리자, 메데이아라고 합니다. 스반힐트 님은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하므로 직속비서인 제가 나서게 되었죠.”
메데이아는 일전에 상대했던 공작 라틴젤에 비견될 만한 마족이었다.
그녀가 웃으며 자신을 소개하자, 멜리사는 곧장 대검을 겨눴다.
“무슨 짓을 꾸미는 거죠? 이능력자들의 중심지인 학원도시를 마족의 영향권하에 두고 싶은 건가요?”
죄악의 사도와는 지긋지긋하게 싸워 온 멜리사였다.
그녀가 진절머리를 내는 모습에 메데이아는 짓궂게 웃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지구를 우리의 영지로 편입하는 건 힘들게 되었답니다. 죄악의 군주들께서는 지금도 여러 차원의 권능자들과 맞붙고 계시기 때문이죠.”
게다가 지구는 마족의 입장에서도 그리 메리트가 없는 차원에 속해 있었다.
다만, 스반힐트의 패배로 마계진영의 위세가 떨어졌으므로 그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것일뿐.
신중한 성격의 마녀답게, 여전히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지 않는 메데이아였다.
‘설마 다른 차원과 분쟁을 일으킬 생각인가?’
전요한은 단번에 그녀의 속셈을 눈치챘다.
대미궁에 갇혀 있었던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마족은 직접 나서지 않으면 타종족을 이간질하는 습성이 있다.
어쩌면 저번처럼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생성하여 혼란을 일으킬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신 인류를 지배하는 건 나의 몫이다. 바로 이 신화적인 유전자의 힘을 빌어서 말이지.”
새롭게 거듭났음을 어필하며 애덤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후 그는 검붉은 마창을 소환하여 곧장 멜리사에게 달려들었다.
“자, 전력으로 덤벼라. 내가 오랫동안 연구한 결과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지.”
그가 자기 자신에게 주입한 유전인자는 포식의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어떤 이능이든 집어삼켜서 체화할 수 있는 사기적인 잠재력.
그중엔 라트리비스의 「무한재생」과 키메이라의 「육체강화」도 포함된 상태였다.
“크읏!”
마창의 일격을 아슬아슬하게 받아낸 멜리사가 허공을 날았다.
그녀가 방주의 구석으로 처박히자, 전요한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약물 주입 좀 했다고 제법 강해졌는걸?”
하지만 그래 봤자 자신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기고만장하는 애덤을 향해 걸어가며 전요한이 각성모드에 돌입했다.
그와 동시에 다채로운 빛에 휘감긴 날개가 꽃이 피어나듯 등 뒤에 펼쳐졌다.
* * *
“잘도 나를 이런 곳에 가두고 말았구나.”
변이종의 여왕, 쿠루엘라는 눈앞의 상대를 칭찬했다.
자신마저도 함부로 탈출하지 못하는 이공간으로 도약할 수 있는 마법사는 많지 않다.
“후우. 위기를 잘 넘겼을는지 모르겠군요.”
술식이 제대로 발동된 것을 확인한 시르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전요한 일행을 걱정하다가 쿠루엘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대미궁에서도 변이종은 줄곧 상대해 왔으니까요.”
변이종의 역사는 신화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그 유래가 깊었다.
천계에서 쫓겨난 타천사의 저주로 시작된 재앙.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켰고, 일곱 죄악에게 굴복하기까지 오랫동안 악명을 날렸다.
“나에 대해 조금 들었나 보네. 지금은 개 목걸이가 채워져서 마족 따위에게 부려지는 신세지만, 두고 보라고. 곧 자유를 얻어서 예전만큼의 군세를 거느리게 될 테니까.”
쿠루엘라는 권능자들과 비등한 존재가 되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잃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상급 권속들을 소환하자, 시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어리석군요. 당신은 결코 신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만을 기반으로 하는 진화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당장 현세의 이능력자들만 하더라도 4성 수준부터는 화신으로서의 잠재력을 발현시켰다.
상위 차원의 초월적인 존재와 얽혀있는 관계가 깊을수록, 그 잠재력은 뜻밖의 기적을 발휘한다.
반면, 변이종은 다른 개체에 기생하여 살아갈 뿐.
하나의 재앙에 불과하며 실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는 넌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인간과 엘프의 피가 섞인 잡종으로서의 한계를 말이야.”
한 차례 눈을 번뜩인 쿠루엘라는 비꼬듯이 힐난했다.
변이종의 여왕으로서, 그녀는 시르케가 어떤 혈통을 이어받았는지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잡종이 아닙니다. 저는 화합의 의지를 계승하는 마법사. 이 세상엔 차별과 반목이 불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에테리아 대륙을 모험하면서 수많은 전쟁과 비극을 목격했다.
냉혹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절망과 후회를 단절시키기 위해 시르케는 고고한 지식욕을 불태워 왔다.
그렇기에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지구에서의 혼란 또한 용납할 생각이 없다.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는구나. 나약한 인간들을 지켜낸다고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자고로 무능한 개체는 경쟁으로부터 도태되어 없어져야 하는 것이거늘.”
쿠루엘라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설교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짓밟고 멸절시켜 왔던 수많은 종족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오롯한 진리임을 강조하자 시르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어째서 신화세계가 종말을 맞이했고, 그로부터 수많은 차원이 쪼개져 나왔는지. 화신으로서의 잠재력을 지닌 이능력자들이 무슨 이유로 현세에 등장하는 건지.”
출처마저 불분명한 고문서의 기록을 좇아 진실만을 추적해온 시르케였다.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지난 깨달음의 일부를 완전히 체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찰나의 꿈, 하지만 함부로 깨워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입니다. 만물의 질서와 업을 관장하는 어머니 신의 이름으로 당신을 처단하겠습니다.”
그녀를 지칭하는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소 불명확한 전승이지만 몇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어머니 신은 최하위 차원의 지구에 모든 기대를 걸고 계신다.
모든 존재가 제각각의 빛을 발하며 공존하는 세상을 위해.
스르르르!
지팡이를 들어 올린 시르케에게서 흡사 파도치는 듯한 영력이 솟아올랐다.
이윽고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에테르 정령군주가 매서운 기세로 쿠루엘라를 엄습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