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밝혀지는 흑막 (3)
‘곤란하게 되었군.’
전요한은 식은땀을 흘렸다.
멜리사가 동의하지 않으면 전투를 계속하기 어려워진다.
문제가 되는 건 일반인이 사건에 휘말릴 수 있다는 위험성.
그 난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과제였다.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할 가능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수를 써두었으니까요.”
배후에서 지켜보던 시르케가 방안을 제시했다.
전요한과 대치 중인 멜리사는 그녀를 흘끗 쳐다봤다.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 변이종의 여왕이 말한 인질극을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이는데요.”
일전에 마족 라틴젤은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으로 주위의 대상을 먼 곳까지 공간 도약시켰다.
만약 쿠루엘라가 그런 방식으로 변이체들을 학원도시에 뿌린다면 대혼란이 벌어질 것이다.
이능력자 외에도 수많은 일반인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니까.
도저히 타개책이 없다고 여겨졌으나 시르케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제가 이공간에 저 문젯거리를 가둬두면 되니까요.”
고루한 지팡이가 지면의 마법진 위에 내리꽂혔다.
이윽고 푸른빛을 발하는 원형의 경계면이 주위를 감싸자 쿠루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짧은 시간에 영계 마법을 완성하다니… 뛰어난 솜씨를 지녔구나.”
이대로 차원의 틈새에 있는 이공간에 순순히 끌려갈 생각이 없던 쿠루엘라가 앙상한 날개를 펼쳐 빠져나가려 했으나, 이미 구속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카랑!
경계면의 외부로 가해지는 충격에도 균열은 발생하지 않았다.
난처해진 쿠루엘라가 이를 가는 동안, 시르케는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변이종의 여왕은 제가 책임지고 쓰러뜨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세요.”
시르케가 이공간으로 끌고 가려는 대상은 쿠루엘라뿐이었다.
그녀가 위험해지리란 걸 깨달은 전요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굳이 혼자서 상대할 필요는 없어. 우리와 함께….”
“그런 여유는 부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신이 찾는 상대가 무언가 수작을 부리려던 모습이었으니까요.”
시르케는 정찰 임무를 계속하던 캣시에게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내용을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한가롭게 이야기할 시간 따윈 없었다.
뒷일은 맡기기로 하고 구속력이 발휘되는 영역으로부터 우선 세 사람을 밀어냈다.
“잠깐 기다려, 시르케!”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한 방법이에요!”
졸지에 쫓겨난 전요한과 멜리사는 전적으로 반대했다.
시르케는 그들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누구에게나 마주해야 할 시련은 있는 법입니다. 이번에는 제 차례인 것 같군요.”
그동안 전요한 일행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한 가지의 결심을 했다.
다소의 어려움을 감수하더라도, 예전의 능력을 최단 기간에 되찾는 방법을 찾기로.
그렇기에 이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마법사! 존귀한 내가 너 따위나 상대하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것 같으냐!”
화난 쿠루엘라가 이를 갈며 손톱을 세웠다.
그녀가 시르케를 향해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때였다.
“아아?”
푸른빛의 경계면이 순간 번쩍이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공간도약을 한 건가요? 차원의 틈새에 있는 이공간으로.”
멜리사가 허망한 표정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한껏 가라앉은 기색으로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케가 선택한 일입니다. 계속 말렸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겠죠.”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엔, 시르케는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곤 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었으나 전요한의 두 손은 부르르 떨렸다.
‘또다시 시르케를 위험에 처하게 하다니.’
앞으로 동료를 잃는 일 따윈 없게 하겠다고 맹세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런데 이런 상황에 다시 봉착하고 나니 무력감이 몰려왔다.
“그녀는 분명 해낼 수 있을 거야. 내가 봐왔던 마법사들 중에 가장 뛰어났으니까.”
한나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평정심을 되찾은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케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는 없죠. 계속 앞으로 나아가요.”
애덤 카다스키의 복제인간이 도망친 비상구가 눈앞에 놓여 있었다.
심상치 않은 걸 느낀 세 사람은 걸음을 서둘렀다.
* * *
비상구는 생산기지의 최심부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 바로 앞의 구역까지이고, 최심부는 굳건한 게이트로 밀폐되어 있다.
“크윽.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복제인간은 난감해하며 뒷걸음질 쳤다.
변이종의 여왕, 쿠루엘라가 전부 해치워줄 거라 기대했는데 예상과 빗나간 상황이다.
퍼억!
멜리사가 날린 주먹이 애덤의 더미 안면에 무자비하게 꽂혔다.
“크윽….”
“어서, 말해. 비밀번호가 뭐야?”
굳건하게 닫힌 게이트에는 비밀번호를 적는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녀가 냉혹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쓰러진 복제인간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 나도 모른다.”
자신은 만일에 대비해 배치된 실패작일 뿐, 주어진 권한은 여기까지라고 한다.
“그럼 이 녀석이 애덤 카다스키가 아니라고요? 눈속임을 위한 더미라니, 믿기 어렵네요.”
멜리사는 복제인간이 실토하는 말을 듣고 나서 어이없단 반응을 보였다.
한편, 전요한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단 듯이 태연했다.
“진짜라고 하기에는 서투른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대역이라 거라 짐작했죠.”
이만한 중요인물에게서 아무런 미래시도 발생하지 않는단 건 말이 안 된다.
곧 버려질 가짜에 불과했으므로 전요한은 다짜고짜 복제인간의 멱살을 붙잡았다.
“말해. 너의 원본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지?”
아직까지 애덤의 진정한 계획은 베일에 싸여 있는 상태였다.
“모, 모른다. 나 같은 실패작에게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을 것 같아?”
녀석은 자신이 이번 계획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실패 가능성에 대비해 핵심적인 계획 내용은 알려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정말인가 보군요. 더 심문해봤자 얻을 만한 건 없어 보여요.”
멜리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르케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소득이 없다니.
두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위이이잉.
어디선가 기묘한 비행음이 나더니, 드론 형태의 기계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은 자신을 조수라고 소개했다.
“알베르티 님이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저를 이쪽 세계로 파견했습니다.”
기계여왕, 이졸데를 쓰러뜨리고 되돌아올 때 함께 차원의 틈을 넘어왔다고 한다.
“그동안 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거야?”
“본격적인 조력을 하기에 앞서 우선 이쪽 세계의 정보를 수집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 탓에 시일이 지연된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드론 형태의 기계종은 기본적인 학습을 모두 마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암호 분석 및 해독과 관련한 기술도 습득하여 당장 도움을 줄 수도 있었다.
“양자물리학을 응용한 배열이군요. 한번 해독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기계종은 게이트의 보안 장치에 접속하더니, 수분 내로 통로를 개방했다.
“대체 어느 나라에서 제작한 기체인가요? 기술력이 엄청나군요.”
“뭐, 일단은 넘어가죠. 지금 설명하기엔 너무 기니까.”
기계종의 존재를 모르는 멜리사에겐 당장 모든 것을 알려주기가 불가능했다.
그녀를 뒤로한 채, 전요한은 최심부로 발을 디뎠다.
“여긴, 마치 거대한 박물관 같네.”
내부 광경을 본 한나가 소감을 말했다.
이에 동조하듯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종말에 대비해 마련한 방주니까요. 온갖 동식물의 생체 표본과 인류의 유산이 보관되어 있죠.”
이 오만한 방주의 주인은 바로 애덤 카다스키였다.
녀석이 중앙부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걸 보며 전요한은 입을 열었다.
“당신의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됐습니다. 이제 어쩔 거죠?”
변이종의 여왕 이외에 더 숨겨놓은 카드가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얼마든지 상대해 주겠단 의지를 비치자, 애덤 카다스키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나의 원대한 꿈도 이렇게 끝나고 마는군! 너희가 이 정도로 나를 몰아붙일 줄은 정말 몰랐어.”
이후 그는 곁에 있던 자신의 여비서에게 프로젝터를 작동시킬 것을 명했다.
스르르르.
대형 화면에 미리 준비해뒀던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판국에 뭘 보여주려는 겁니까?”
“인류의 역사. 피와 광기에 사로잡혀 죄악을 저질러왔던 지난 세월을 한번 감상하게.”
애덤 카다스키가 준비한 영상은 야만적인 문명에서부터 시작했다.
돌도끼로 서로를 때려죽이던 원시인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나은 도구를 개발해냈고, 이에 따라 더 큰 집단을 이루어 나갔다.
“문명이 발전해도 이 야만성은 사라지지 않고 인간의 본성에 남아 있었지. 그 결과, 우리는 낙원으로부터 점차 멀어질 수밖에 없었어.”
애덤 카다스키는 현실 세계의 균형을 위해 인류가 일정 주기로 재난을 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홍수,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전쟁과 전염병이 다음 영상에서 다뤄지자 멜리사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신은 신을 자처하려는 것입니까? 같은 인간이 시련을 내리는 일 따윈 있어선 안 됩니다.”
“진정한 낙원에 신 따윈 필요하지 않아. 인류가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본성을 버리기만 한다면 말이지.”
멜리사의 지적에도 애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해댔다.
그의 주장은 결국 구원자를 자처하는 선지자가 필요하단 것이었다.
“유전자에 내재한 결함을 제거하기 위해, 인류는 무한에 가까운 생존 게임을 반복해야만 해. 그 주최자는 나처럼 미래의 비전을 지닌 설계자가 되어야 할 테고.”
오만하기 그지없는 망상가.
더 들어주기 역겨웠는지, 한나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에 맞서기 위해 애덤의 여비서가 권총을 꺼내 들었으나,
스걱!
배후를 노리고 있던 누군가가 재빠르게 그녀의 목을 그어버렸다.
붉은 피가 주위를 물들였고 여비서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졌다.
“결론은 현실 세계의 군림자가 되겠단 거군? 시대적인 혼란을 이용해서 말이야.”
채강윤.
그는 관리국의 비밀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여기로 함께 잠입한 상태였다.
들키지 않기 위해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는데, 최종 목적지에서 서로 만난 것이었다.
최측근인 여비서까지 죽자, 애덤은 리모컨 하나를 꺼냈다.
복제인간이 지니고 있던 것과는 달리 단순한 형태.
거기엔 붉은 버튼 하나만이 위치해 있었다.
“선택하게. 여기에서 의미 없이 공멸할지, 아니면 나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해볼지 말이야.”
전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협상.
어떻게 보면 최후의 발악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죠? 수많은 희생을 치러서라도 학원도시의 지배자가 되고 싶은 겁니까?”
전요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노려봤다.
그가 품에서 드래곤하트를 꺼내자, 애덤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호, 내가 연구소에 남겨두고 온 유물 중 하나로군. 어째서 그 힘을 취하지 않는 거지?”
드래곤하트엔 엄청난 마력과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도 왜 아직까지 지니고만 있냐는 물음에 전요한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궁금해? 실은 이거, 내 검에 먹이로 주려고 아껴둔 거야.”
종합 능력치상의 성장은 충분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부족함을 느끼고 있는 건 바로 아르티나의 위력.
이 정도의 마법검이라면 드래곤 하트를 포식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푸콰악―!
아르티나의 검 끝이 드래곤하트를 꿰뚫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르티나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주위를 뒤덮으며 미증유의 진화가 시작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