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밝혀지는 흑막 (1)
“오랜만이군요.”
전요한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한나 앨리슨을 응시했다.
프리메이든의 일원.
일찍이 관리국에 협조했던 그녀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학원도시의 위원회가 당신을 들여보내 준 이유가 궁금하군요. 그들에게 새로운 사업이라도 제안한 건가요?”
시르케 역시 이 같은 개입이 수상하다는 의문을 드러냈다.
한국에 큰 야심을 품고 온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는 덴 이유가 있다고 여긴 탓이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난 것에 의문을 가질 거라 예상은 했어. 우선 그 부분을 확실히 해둬야 할 것 같네.”
한나는 잠시 말을 멈춘 후 홍차를 홀짝였다.
그녀가 늘씬한 다리를 꼬자 검은색 가터벨트가 눈에 띄었다.
“무슨 거래를 한 거죠? 상아탑 최상부의 원로원 장로들과.”
전요한은 테이블에 합석하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전보다 거리가 가까워졌다.
“실은 우리도 애덤 카다스키하고 악연이 있거든. 녀석이 본사의 기밀정보를 빼가는 바람에 곤란한 처지였지.”
애덤은 영향력 있는 누군가를 배후에 두고 있어서 그간 추적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상급자마저도 배신하고 신화적인 유물을 훔쳐 달아났다.
비밀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요소였으므로 원로원 장로들도 애덤을 붙잡는 걸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었다.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학원도시에서 잘도 숨어 지냈나 보군요. 자기암시를 거는 알약을 악용해서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나 할까. 그걸 먹이고 나면 무슨 짓이든 시킬 수 있으니 대담한 계획을 세워 왔던 거지.”
한나는 마약처럼 유통되는 환단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번 복용하고 나면 깊은 최면에 걸리고,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악마의 수렁.
본사의 기밀 정보가 유출된 것도 연구원들이 그 알약에 당한 탓이었다.
“아무튼, 애덤의 은거지는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저희도 겨우 단서만 몇 개 정도 찾아낸 상태인데요.”
전요한은 계속해서 사건의 경위를 물었다.
한나는 대답 대신 오래된 유물 하나를 상자에서 꺼냈다.
“이건 뭐죠?”
“「망자의 구속」이라고 하는 거야. 사건의 피해자가 죽으면 그 원혼에 도움을 받아서 범인이 있는 위치까지 따라갈 수 있지.”
시간제한이 있단 점만 제외하면 사기적인 이능이었다.
구하느라 애를 먹었단 말에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신과 관련된 유적지에서만 얻을 수 있는 유물일 겁니다. 에테리아 대륙에서도 비싼 값어치를 했을 것 같군요.”
전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매물을 가져오는 프리메이든의 재력은 과연 대단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여러 곳에서 측정해본 결과, 애덤은 공업구역에 숨어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어.”
“공업구역?”
“그래, 이쯤 알려줬으면 어딘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한나는 한번 알아맞혀 보란 듯이 뜸을 들였다.
잠시 고민하던 전요한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군수품 생산 기지국에 잠입해 있는 것 아닐까요? 거기라면 내부 반란을 일으킬 물자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정답이었다.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르케는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궁지에 몰렸단 사실을 알면 그자는 분명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 들 거예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애덤을 내버려 두면 타천사가 강림했을 때보다도 엄청난 참사가 일어나게 될 것임을.
거대한 재앙을 막기 위해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 * *
작전 지역엔 이미 바리케이드 따위가 설치되어 유동 인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시민들도 그만큼 심각한 일인 것을 알고 있는지 웅성대며 떠들어댄다.
“최근 일어난 재해가 내부자와 관련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만약 그러면 전범에 준하는 형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그전에 총살당할 수도 있겠어. 순순히 항복하지 않는 모양이야.”
“여기 있다가 우리까지 휩쓸리는 거 아냐? 저번처럼 재해가 일어나기 전에 도망쳐야겠어.”
어디에서 소문이 퍼졌는지 하나같이 애덤 카다스키에 대한 이야기뿐이다.
작전 지역 내부로 진입할수록 인파는 줄어들고 기분 나쁜 기운만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건 변이체인가.’
일전에 좀비 사태를 일으킨 적도 있으므로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았다.
“이건 단순한 좀비의 흔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흔적을 조사하던 시르케가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지능을 보유한 상위 변이체라는 의미로군요.”
앞장서고 있던 멜리사가 표정을 굳혔다.
이쪽 지역에서 변이종의 인자를 지니고 있는 개체가 출현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애덤 카다스키의 마지막 카드.
그건 아마도 변이종의 생체병기일 가능성이 높다.
정찰의 필요성을 느낀 전요한은 시르케의 어깨 위에 있는 캣시를 쳐다봤다.
“군수품 생산 기지국으로 침입할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알아봐.”
마법 생명체인 캣시는 작은 몸체와 날렵한 움직임으로 주위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야옹.”
시르케가 쓰다듬으며 뭔가를 속삭이자 캣시는 비로소 뛰어내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양이가 좋은 정보를 알아 왔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개고생할 걸 줄여줄 수도 있으니까.”
“철통 방어 때문인가요, 한나 씨?”
“그럼. 여기는 난공불락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야.”
벌써부터 고난이 예상되는지 한나 앨리슨은 표정이 어두웠다.
고집을 부려서 따라오긴 했지만 그녀는 현장에서 뛰는 체질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는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변이체의 개체수가 꽤나 되거든요.”
내부에서 생체 실험하던 놈들을 풀어놓았는지, 벌써부터 몇몇 개체가 달려든다.
키아아아―!
키메라처럼 기괴한 모습을 한 것이, 썩 보기에 좋진 않다.
“으으, 징그러워! 저 녀석들 좀 차량에서 떼어내 봐!”
안색이 창백해진 한나가 주위의 보안직원들을 닦달한다.
이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프리메이든의 정예전력.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변이체들을 차례로 공격했다.
피익―!
피익―!
강화 파츠로 무장한 이들의 위력에 키메라처럼 생긴 변이체들이 녹아내린다.
고개를 돌리자, 군용 트럭을 타고 이동하던 특별 파견대 인원들도 제법 잘해내고 있다.
변이체들이 너무 많이 달려든다 싶으면 조금씩 거들고 있을 때였다.
“니야옹!”
아까 정밀 탐사를 보냈던 캣시가 돌아와서 최선의 침입 경로를 알려주기 시작한다.
“오호, 벌써 루트를 찾아냈군요? 영특한 고양이네요.”
한나는 감탄하며 캣시가 응시하는 방향을 시선으로 따라갔다.
그러고는 여태껏 생각해보지 못한 경로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어머나?”
해당 경로는 인근의 지하 수로에서 최단거리로 토굴을 파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사실, 이것도 침입에 대비하여 지하의 외벽을 강화해놓긴 했지만 불가능 따위는 없다.
“이따가 지하 수로로 내려가면 토굴을 할 전용 장비부터 만들죠.”
각종 재료를 연성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동료가 곁에 있었던 덕분이다.
21세기의 연금술사라고 불리우는 한나 앨리슨.
그녀의 수하들까지 동원하면 모든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 * *
프리메이든 본사로 침입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은밀히 지하 수로를 점거하는 덴 성공했으나, 토굴을 파자마자 변이체들이 들이닥쳤다.
“지하 외벽에 충격이 가해지면 경보가 울리는 시스템인가 본데요?”
“내가 알기로는 이 정도까진 아닌데, 그동안 보안을 강화해 놓았나 봐. 아무튼, 몰래 내부로 잠입하는 건 물 건너갔네.”
몰려오는 변이체들을 해치우며 전요한과 멜리사가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한편, 한나와 시르케는 토굴 작업을 하는 데 여념이 없다.
“처음 보는 신소재로 되어 있어서 제법 외벽이 단단하네.”
“그래도 뚫리긴 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속도가 느리지만요.”
한나가 연성해낸 합금 재료는 가히 오버 테크놀로지에 가까웠다.
영국의 왕립 학회가 비밀리에 연구하는 연금술.
그건 프리메이든 사가 추구하는 미지의 영역과도 상당 부분 겹치는 면이 있다.
거기에 마법 공학을 연구한 시르케까지 있으니, 프리메이든 본사의 외벽이 못 버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를 저지하려는 녀석들이 조만간 더 몰려올 겁니다. 미리 대비를 해두죠.”
상황을 주시하며 전요한은 최선의 공략법을 고민했다.
애덤 카다스키는 매우 용의주도한 인물이므로 이번 작전에 나름 대비해뒀을 터다.
자칫하면 그가 파놓은 함정에 걸릴 수도 있으니, 방심은 금물이었다.
예상대로 일행을 막으려 드는 변이체들은 점차 늘어났다.
개중엔 우두머리 등급의 정예 개체도 있어서, 지하수로는 난장판이 되었다.
스걱! 스걱!
임시로 구축한 거점을 두고 한동안 난전이 펼쳐졌다.
변이체들의 사체가 여러 더미로 쌓여가던 도중, 뜻하지 않게 원군이 나타났다.
“여기서 돌파구를 찾고 있었군!”
“지하 수로를 통해 파고들 생각을 하다니, 제법 머리를 썼어.”
“우리도 도와주마! 내부로 진입한 다음엔 다시 경쟁하자고!”
위원회의 소집령으로 공동 작전을 수행하러 온 헌터들이었다.
중간에 끼어들어서 숟가락을 얹으려는 심리가 조금 불편하긴 했으나, 그래도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원군 덕분에 작전 수행이 한결 편해졌네요.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내부로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전방에서 대검을 휘두르던 멜리사가 기대감을 비쳤다.
그녀의 짐작대로 두터운 외벽은 드릴에 의해 거의 관통되어 가고 있다.
“왠지 반대편에서 전투과 용병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을 기분인데요?”
반면, 시르케는 조금 불안한 표정이다.
그녀는 마력의 흐름에 민감한데 건너편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덧붙였다.
“그래봤자 이젠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야. 무슨 일을 꾸미는진 몰라도 말이지.”
토굴 작업에 열중이던 한나가 마침내 자신감을 드러냈다.
이윽고 반대편의 공간이 드러나자, 일제히 탄환을 재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찰칵! 찰칵!
재래식 총기류이긴 하지만 신기술을 이용하여 개조한 탓에 위력은 상당하다.
“인정사정없이 벌집으로 만들 기세네?”
일행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용병들을 보며 한나가 한마디 했다.
타타타타타탕!
곧, 무수한 총성이 울려 퍼진다.
허점을 노린 기습이었으나 이쪽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
티잉! 티잉!
시르케가 펼친 수호 결계에 의해 무력화된 총탄이 우수수 지면으로 떨어진다.
그것을 본 한나가 떨어진 총탄들을 융해하듯 응집시켜 날이 예리한 톱니바퀴로 탈바꿈시켰다.
「등가교환」.
숙련된 연금술사는 등가 교환의 법칙에 의거하여 이런 식의 잔재주를 부릴 수 있다.
“그걸로 뭘 하실 셈인가요?”
“보면 알아.”
전요한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도 한나는 그저 정면만을 바라봤다.
이후 톱니바퀴가 빠르게 회전하며 가까이 있던 용병들을 도륙한다.
촤아아아악!
용병들은 개조된 총기류로 무장한 상태여서 근접전엔 취약했다.
물론, 고작 톱니바퀴 하나로는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었기에 서둘러 내부로 진입을 시도했다.
타악!
토굴에서 뛰어내리자 사방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가느다란 철선이 보였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잘못 건드리면 고압의 전류가 흘러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신소재로 되어 있어서 간단히 끊어 버리기도 어렵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덫을 설계해 놓았군요. 어떻게 파훼하는 게 좋을까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멜리사가 전요한에게 의견을 묻는다.
대답 대신, 연금술사인 한나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부탁드려요.”
“자꾸 나서는 게 내키지 않지만 하는 수 없겠네.”
말을 마친 한나가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이후 철선들이 용광로에 들어간 것처럼 녹아내리더니, 구릿빛의 파이프로 속성이 바뀌었다.
“오호, 이러면 함정을 무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건가?”
“제법 흥미로운 현상이군.”
왜곡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철선들을 보며 헌터들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행과 대치 중이던 적병들은 뜻밖의 상황에 식은땀을 흘렸고 말이다.
“서두르죠. 시간을 더 지체하면 지원병들이 올 겁니다.”
아르티나를 들어 올리며 전요한이 모두를 재촉했다.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될 최심부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