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폐연구소 (3)
어둑한 지면에 피의 마법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밤의 일족이 아닌 자들에게 디버프를 거는 일종의 저주.
하지만 전요한 일행에겐 쉽사리 통하지 않았다.
“제가 저주의 확산을 막겠습니다. 그동안 흡혈귀들을 제압해 주세요.”
말을 마친 시르케가 마법 영창을 시작했다.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인 후 곧바로 혼자 돌격해 나갔다.
절대면역이 있는 그에겐 흡혈귀의 잔재주 따윈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콰광‒!
안 그래도 뛰어난 스탯과 실력이 있는데 무기의 성능까지 탁월하니 그는 양 떼 사이의 늑대처럼 날뛰었다.
광포한 궤적을 따라 갈가리 찢기는 흡혈귀들의 모습에 카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강화된 신소재로 제조되어 굳건하던 출입문마저 단번에 파훼한 파괴력이다.
그로 인해 생겨난 찰나의 틈을 이용해 이번엔 멜리사가 지면에 대검을 내리꽂았다.
“하아아아!”
검 끝으로부터 원점 발화한 불길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주위를 휘감는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흡혈귀들은 물론이고 지면의 마법진마저 소각될 정도의 위압감.
4성 각성자들이 실력을 뽐내자 카르밀라는 뒷걸음질을 쳤다.
“꽤, 꽤나 하는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자신도 나름 밤의 일족으로서 서열이 높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터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물러서는 대신, 비장의 수단을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이윽고 사방에 흩뿌려진 피가 한데로 모여들더니 섬뜩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고오오오―!
마법사가 주위를 장악해가는 마력역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한, 어떤 방식의 전투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흡혈귀가 진심으로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마. 어리석은 인간 놈들아.”
허공으로 떠오른 카르밀라가 전요한 일행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일으킨 불길마저 점차 사그라들자, 멜리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하죠? 각성 상태로 돌입하는 것말곤 대안이 안 떠오르네요.”
하지만 각성한 상태에서의 전투는 시간제한이 있었다.
만약 그 안에 승부를 내지 못하면, 탈진하게 되어서 역으로 궁지에 몰릴 위험성이 있다.
“다른 방법을 써보죠. 우리가 잊고 있었던 존재가 하나 있으니까요.”
무언가 떠올랐는지 전요한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작열하는 불꽃이 피의 소용돌이 외부로부터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읏! 하필이면 이때에!”
결전을 준비하던 카르밀라가 눈을 치떴다.
연구소에 잠들어 있었던 마룡.
갑자기 깨어나서 미친 듯이 난리를 피우더니, 자신의 일까지 방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룡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었나 보군요.”
상황을 눈치챈 시르케가 잘됐다는 식으로 말했다.
발끈한 카르밀라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피의 소용돌이를 거두어들였다.
화르륵!
장벽이 사라지자, 곧바로 마룡의 브레스가 전장을 휩쓸었다.
나뒹굴던 흡혈귀들의 사체가 브레스의 궤적을 따라 따라 불탔고, 시르케는 모두를 결계 내부로 불러들였다.
“어서 돌아오세요!”
마룡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버텨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멜리사와 함께 후퇴하며 전요한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슬슬 그걸 사용해야 할 때가 된 건가.’
블러드스톤.
흡혈귀 군주, 드라카를 소환할 수 있는 혈석이었다.
물론 아무 때나 불러들일 수 있는 건 아니고, 그가 흥미를 느끼는 상황이어야만 한다.
‘저번엔 운 좋게 가능했는데, 지금은 좀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드라카의 관심을 끌려면 아무래도 메이가 있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혈마법을 사용하는 이능력자니까, 적합한 소양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다.
전요한이 내심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콰광‒!
한 차례의 폭음과 함께 봉쇄되어 있던 게이트 하나가 보기 좋게 박살 났다.
이후 등장한 생도복 차림의 여고생.
그녀는 날이 서슬 퍼런 사이드를 들고 있는 메이였다.
“네가 여긴 무슨 일로?”
“흡혈귀의 흔적이 느껴져서 그동안 뒤를 캐다가 운 좋게 잠입할 수 있었어.”
보아하니 메이도 카르밀라에게 볼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마침 잘되었다 생각했으므로, 전요한은 곧바로 피의 의식을 진행했다.
“뭐 하는 거야?”
“지켜보면 알게 돼.”
드라카와 계약한 상태였으므로, 의식은 이전과 달리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얼마 후, 다시 한번 피의 소용돌이가 몰아쳤고, 메이는 얼떨결에 허공 위로 떠올랐다.
“이, 이건?”
본능적으로 뭔가를 느낀 메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더니 의식을 잃었는지 고개를 떨궜다.
“너, 설마 그분을 강림시키려고 하는 것이냐?”
계획을 눈치챈 카르밀라가 따지듯이 전요한을 노려봤다.
전요한은 답변 대신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글쎄?”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카르밀라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다시 허공을 응시했다.
메이를 화신으로 삼아 강림한 일족의 시조, 드라카.
그는 또렷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내 지시대로 성역을 지키지 않았지, 카르밀라?”
“드, 드라카 님….”
본능적인 위압감에 카르밀라는 끝내 주저앉고 말았다.
영겁의 세월을 존재해온 일족의 시조에 비하면 그녀는 단지 어린아이일 뿐.
그래서인지 드라카도 타이르듯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는 이쪽 세계의 일에 개입하지 마라. 「새로운 징조」를 확인하는 것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
“…….”
여전히 빳빳하게 굳어 있던 카르밀라가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드라카를 올려다봤다.
이후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드라카의 손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성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종족의 번식을 위한 생식 행위가 불가능한 흡혈귀에게 있어 드라카는 부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카르밀라가 해온 그간의 행동 또한 그에게 인정받고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
조금 성향이 비틀렸다 해도 정면에서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이윽고 카르밀라가 피의 소용돌이를 일으켜 자취를 감추자 드라카는 주위를 천천히 훑었다.
무감각하게 관찰하던 시선은 어느덧 전요한에게서 멈췄다.
“그대는 나를 두 번 불러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블러드스톤을 사용하는 건 밤의 일족과 형제가 되겠단 맹약을 전제로 했다.
처음엔 긴밀한 연대를.
다음엔 피의 제공을.
마지막엔 동족이 되는 헌신을.
그렇기에 전요한이 직접 드라카를 불러낼 수 있는 건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얼마나 필요할진 모르지만, 기꺼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전요한은 검 끝으로 상처를 낸 후, 손가락을 내밀었다.
드라카는 그것을 할짝이더니, 맛을 한동안 음미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이로군. 역시 그대는 흥미로운 존재다.”
무엇 때문에 개인적인 관심을 보이는지에 대해선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분위기도 없었고 말이다.
화르륵-!
갑작스런 드라카의 강림에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그르렁대던 마룡이 다시 한번 브레스를 내뿜었다.
드라카는 그 일격을 간단히 막아낸 후, 한 손에 들고 있던 사이드를 가볍게 휘둘렀다.
스걱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마룡의 목이 단번에 달아났다.
“대단하네요.”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멜리사가 놀라움을 표출했다.
그녀를 뒤로한 채, 드라카는 유유히 자취를 감췄다.
“다음에 또 만나지.”
언젠가 만나게 될 거라는 말과 함께.
“이제 전부 끝난 건가요?”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자 시르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응, 하지만 아직 몇 가지가 남아 있어.”
학원도시의 신기술을 통해 만들어낸 마룡의 열화판.
그리고 눈앞에서 여전히 기능하고 있는 마녀의 심장.
재미있게도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저걸 가동 중지시키면 마룡은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요?”
“네, 아직 기술력이 부족해서 드래곤 하트를 함께 동기화시켜 놓은 모양입니다.”
설명을 마친 후 전요한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후 심장부에 연결되어 있는 생체 장치를 전부 절단한다.
서걱!
재생능력이 소실되자, 죽음을 부정하듯 꿈틀거리던 마룡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 * *
이로써 폐연구소를 탐색하는 임무는 마무리되었다.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긴 했지만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손쉽게 유물을 얻은 느낌이에요. 애덤 카다스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서류를 검토해보던 멜리사가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무언가 이상하다 느꼈는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고민한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전요한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애덤을 붙잡기 전엔 끝나지 않을 일이니, 지금 복잡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여겼다.
“오늘은 이만하고 호텔에서 피로나 좀 풀어야겠네요. 그동안 이것저것 정말 일이 많았어요.”
시르케가 잘됐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그녀가 먼저 밖으로 나가자 멜리사는 전요한의 어깨를 떠밀었다.
“숙녀의 옆을 지켜줘야죠. 저는 여기서 더 일을 할 테니 가서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해요.”
전요한은 얼떨결에 문밖으로 쫓겨났다.
머리를 긁적인 후 시르케의 뒤를 따른다.
“그나저나 저번에 산 드레스, 잘 어울리네.”
뒤늦은 칭찬이었다.
시르케는 흘끗 돌아보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이번 임무를 처리하고 위원회에 2억을 요구할 겁니다. 여기서 지내려면 이래저래 비용이 많이 드니까요.”
아무래도 예복 하나로는 마음 놓고 돌아가기가 부담스럽다고 한다.
이후 도착한 장소는 중세 귀족들의 연회장을 떠올릴 법한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화려한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다채로운 빛.
천장에 걸려 있는 고색창연한 샹들리에.
일반적인 연회장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대리석 바닥에 수호 마법진이 펼쳐져 있단 정도였다.
그리고 거점 위치마다 깔끔하게 차려진 식탁과 의자가 배치되어 있다.
메이드의 안내를 받아서 제자리에 앉자 테이블 위에 있던 메뉴판이 보였다.
전요한은 고민하다가 가장 마음이 이끌리는 특제 스테이크를 2인분 주문했다.
“이걸로 주세요. 미디엄하고 웰던으로.”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주인님.”
호출된 전속 메이드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그녀가 자주색 머리칼을 살랑이며 사라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도착했다.
“여기 있습니다.”
어떻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상류층이 머무르는 호텔답게 외관이 훌륭했다.
“흐음….”
애피타이저로 닭고기 수프를 먼저 맛봤는데, 평소 먹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동안 이런 곳에 데리고 오지 않았던 이유가 뭔가요? 음식의 품격이 다르군요.”
식당의 분위기를 즐기던 시르케가 힐난했다.
전요한은 그녀가 내미는 투명한 잔에 와인을 따라줬다.
“미안, 이런저런 사건 사고가 많이 터져서 여유가 없었어.”
그는 이세계에서 온 시르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잠시 여유가 생긴 틈을 타서 이렇게 호텔에 투숙하게 된 것이다.
이것저것 알려주던 전요한은 식사를 시작했다.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자 연분홍색의 속살이 드러났다.
조심스레 입 안에 넣었더니 말 못 할 풍미와 함께 육즙이 나오며 사르르 녹는다.
“과연, 육질부터가 남다르군요.”
“이런 건 왕궁에서도 못 먹어봤지? 나름 장인의 방식으로 만든 요리야.”
시르케와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메이드가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기, 죄송한데 저쪽에 계신 손님께서 볼일이 있으시다고 하세요.”
조그마한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한나 앨리슨.
일전에 만난 적이 있는, 프리메이든의 일원이었다.
“여기까진 무슨 일로 오셨죠?”
“애덤 카다스키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려주러 왔어.”
잠시 전요한의 얼굴을 쳐다보던 한나가 돌직구를 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