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20화 (120/180)

제120화. 폐연구소 (2)

학원도시 상아탑 최상층부.

원로원 장로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크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상대할지 궁금하군. 저건 우리의 비밀병기 중 하나였는데 말이야.”

의장직에 앉아 있는 서창곤은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을 보며 흥분 섞인 기대감을 드러냈다.

학원도시의 모든 기술을 집약해 인공적으로 재현해낸 마룡. 현대 과학과 마법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몬스터였다.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쉽진 않을 것이네. 녀석의 마력은 상상을 뛰어넘으니까.”

서창곤의 말에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인 채강준이 눈을 빛냈다.

그의 관심사는 특별한 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4성급 이능력자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이었다.

“저들을 너무 몰아붙이는 건 아닌가요? 이러다 우리가 배후에서 개입해 왔다는 걸 간파당한다면 곤란해질 텐데요.”

줄곧 가만히 있던 여자가 우려감을 드러냈다.

그러자 맞은편의 고태훈이 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본 계획을 들키더라도 배신자에게 전부 떠넘기면 되잖아?”

애덤 카다스키.

감히 원로원의 금기를 어기고 멋대로 그 유물을 훔쳐간 내부자였다.

아마도 애덤의 속셈은 지난 연구의 성과를 독차지하고, 학원도시에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일 터다.

“배신자는 확실히 처단할 것이네. 그러기 위해 저 아이들에게 단서를 주고 있지 않은가?”

차도살인지계. 서창곤은 마룡의 몸체에 탑재되어 있는 보안칩을 스크린에 띄웠다. 비밀 프로젝트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 장치. 그것이 길잡이처럼 전요한 일행을 아담의 은거지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럼 인내심 있게 기다리도록 하지. 저들이 우리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해줄 때까지.”

서창곤은 한껏 여유로운 표정으로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그가 바라는 대로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헉… 헉….”

“하아… 하아….”

레이드가 시작된 지 대략 40여 분이 지난 시점.

불에 탄 냄새가 진동하고 주위에서 거친 숨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간의 치열한 교전으로 마룡은 제법 상처를 입긴 했으나 여전히 결정적인 타격이 부족한 상황.

드래곤 하트를 동력원으로 하는 녀석이 그렇게 쉽사리 쓰러질 리가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겠어요? 아무래도 우리만으론 끝장을 보기 어려울 것 같은데.”

점차 전투의 피로가 쌓여가는 상황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여겼는지 멜리사가 해결책을 물었다.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각성 상태로 싸워도 완전히 제압하긴 어려울 겁니다. 대신, 우리 발목을 잡지 못하도록 적당히 봉인해둘 순 있겠죠.”

“봉인? 어떻게요?”

“바다신의 신전에서 발견한 스크롤이 마침 있긴 합니다.”

지금처럼 마룡에게 적지 않은 데미지를 누적시킨 상황에서 상급의 구속 마법을 건다면 제아무리 마룡이라 한들 당분간 멋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전요한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시르케를 바라봤다.

“후우. 하는 수 없군요. 만일에 대비해 아껴두려고 했는데, 지금 사용하는 수밖에요.”

한숨을 쉬던 시르케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그녀의 마력이 양피지를 휘감자, 양피지에 적힌 마법 문자가 형형색색의 빛을 발하며 허공으로 떠올랐고….

콰지지직―!

사방으로 펼쳐진 검붉은 결계가 마룡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멜리사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박수를 쳐 보였다.

“잘했어요! 진작에 이리했으면 고생도 안 하는 건데요!”

그녀가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마룡의 존재가 멜리사에게 어지간히도 골치 아픈 놈이었다는 셈이다.

전요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옆으로 지나갔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곧바로 한적해진 통로를 달려 중앙통제실까지 도착했다.

“역시 애덤 님의 말대로 다들 제법이군요. 확실히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쉽습니다.”

중앙통제실엔 연구소장만이 남아서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의 화면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녀석이 또 수작을 부리기 전에 전요한은 기세를 꺾어놓기로 했다.

“끄나풀인 주제에 잘도 여유로운 척하는군.”

“끄나풀? 무슨 말이지?”

“애덤 카다스키가 무슨 짓을 꾸미는진 모르겠지만, 너를 희생시켜서 시간을 좀 벌어 보려는 모양인데?”

“우, 웃기지 마! 애덤 님이 엘리트인 날 버리실 리 없어! 신소재 개발과 관련하여 국내에서 나보다 권위 있는 자는 없다고!”

연구소장은 현실을 인정하기 싫은지 고함과 함께 삿대질을 해댔다.

그 모습에 멜리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덤 카다스키에 대해 잘 모르네. 이곳의 모든 연구 자료는 이미 그가 확보해뒀을 거야. 그러니 더는 이용 가치도 없을 거고.”

학원도시를 세운 원로원을 상대로 선전포고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니 가능성은 충분하다.

멜리사의 말에 내심 적지 않게 공감하는 바가 있었는지 연구소장의 안면이 보기 좋게 뒤틀렸다.

“크, 크윽…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애덤 카다스키 쪽으로 적당히 줄을 서면 누리는 게 있으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안일하다면 안일한 판단.

이런 무법천지에선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꼬리 자르기와 뒤통수는 비일비재했다.

“지금이라도 우리와 협상을 하는 게 어때? 정보만 넘겨주면 적어도 여기서 토사구팽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조, 조건은 그게 다인가? 신변 보장까지는 해줬으면 좋겠는데.”

“글쎄. 지금의 네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할 수 있다고 봐?”

주도권은 이미 오래전에 전요한 일행 쪽으로 넘어왔다.

차근차근 설명하며 압박하자 연구소장은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하, 하는 수 없지. 일단은 살아남아야 하니까….”

일전에 분석한 바 있듯, 이 자는 속물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안락한 현실을 추구하고 위험을 극도로 기피하는 성향.

연구소장이 뭔가 유용한 정보를 내뱉길 기다리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으, 으윽….”

실토하려던 연구소장이 돌연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환단(幻丹).

그는 몰랐던 모양이지만, 환단의 효과가 남아 있는 동안엔 자기 암시 등의 방법으로 복용자를 조종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금단 현상을 일으켜 간단히 입을 막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한 전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한발 늦은 거 같군요.”

“위기에 몰리면 자백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멜리사가 포기한 투로 답했다.

곧이어 발작을 멈춘 연구소장이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들어 올렸고,

“슬슬 우리의 계획을 눈치채고 있는 모양이군.”

무미건조한 어조의 낯선 목소리가 그로부터 새어 나왔다.

애덤 카다스키.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였다.

“무언가 이상한 짓을 꾸밀 생각이라면 이미 들통났습니다, 망상에 빠진 과학자 씨.”

자세히는 몰라도 녀석을 막는 편이 평화 유지에 도움이 되는 건 확실했다.

“무엇 때문에 원로원을 배신한 거지? 그 신기술로 여기 체제를 전복시킬 생각이라도 했어?”

잠시 접선한 틈을 타서 멜리사가 본의를 물었다.

애덤 카다스키는 대답하지 않고 비웃음 섞인 말로 일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주제에 끼어들긴. 진실을 알고 싶다면 상아탑의 최상층부로 가는 편이 더 빠를 거다.”

“…뭐?”

“슬슬 마음속에 의문이 생겨나고 있을 텐데? 원로원이 진정으로 꾸미는 계획이 뭔지 궁금하지 않아?”

애덤 카다스키는 비밀 프로젝트의 관련자로서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요한은 그가 더 이상 비밀 누설을 하지 않으리란 걸 눈치챘다.

“최고 책임자는 바로 너였겠지. 그러니까 굳이 상아탑으로 되돌아갈 필요 없이 널 붙잡으면 될 일이야.”

“글쎄, 어느 쪽이 빠를지 한번 내기를 해볼까? 결과는 다음 만남에 확인해 보자고. 그럼 건투를.”

애덤 카다스키의 말을 모두 전한 연구소장이 품에서 돌연 권총을 꺼내 들었다.

이후 관자놀이에 갖다 댄 권총으로부터 단말마처럼 총성이 울려 퍼졌고 주위는 흥건한 피바다가 되었다.

“…대체 이번 사건엔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가요.”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시르케가 입술을 깨물었다.

전요한은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사건의 내막은 언젠가 밝혀질 거야. 그러니 지금은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중앙통제실은 누군가가 지키고 있어야 해요. 사실상 연구소 내부의 모든 시설물을 제어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멜리사가 한 가지를 지적했다.

이대로 그냥 빠져나가면 흡혈귀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저번의 좀비 사태 같은 재해를 일으킬 터다.

그렇기에 일행은 당분간 여기에서 위원회의 도움을 기다려야 했다.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흡혈귀들에 대한 것이나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만히 있기는 지루했던 시르케가 심층 탐색을 제의했다.

흡혈귀들 갑자기 나타난 원인은 아마도 이세계의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

“좋아. 그럼 날 따라오라고.”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이 자신 있게 앞장섰다.

* * *

내부 수색을 벌인 결과 일행은 어떤 출입문에 도달했다.

다른 데보다 강도 높은 보안 장치가 갖춰질 걸로 보아 여기에 뭔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생체 보안 시스템이군요. 연구소장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출입 가능하도록 설계된 비밀 장소입니다.”

“연구소장은 죽어버렸지 않나요? 다른 권한자에 대한 파악이나 신변 확보도 어렵구요.”

보안 장치를 확인한 멜리사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이걸 해제할 생각인 모양이지만 전요한은 생각이 달랐다.

“시설물이 제법 견고하긴 해도 파훼하지 못할 수준은 아닙니다.”

“…그냥 부수자고요?”

“저희는 시간이 촉박합니다. 이런 데서 발목이 잡혀 있을 여유가 없어요.”

마룡에게 걸린 구속은 앞으로 30여 분이면 풀린다.

검격을 날리자 곧이어 현란한 궤적과 함께 굉음이 뒤따랐다.

콰앙―!

저번보다도 한층 파괴력이 상승한 느낌이다.

짧은 상념을 마친 후 파훼된 출입문을 제치고 내부로 들어섰다.

스르르르―

진입과 동시에 온몸에 달라붙는 불쾌한 기운.

그리고 사방으로부터 집중되는 적의 어린 시선이 본능적인 경고를 보내온다.

완전히 어둠에 휩싸인 공간이었으나 저 너머에 있는 유물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마녀의 심장」.

저것을 대체 어디에서 구했는지 미지수다.

“살아 있는 건가요? 불온한 마력이 느껴지는데….”

“물론입니다.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긴 하지만요.”

마녀의 심장은 손상을 입은 채 생체 시설에 의지하여 기능하고 있었다.

만약 그것을 가동 중지시키면 더는 유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터다.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붉은 불꽃이 일어나며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지하도록 해.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지고 싶지 않다면.”

연구소 내부를 점거한 흡혈귀들의 우두머리.

그녀의 진심 어린 경고에 전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드라카도 아니면서.”

“네, 네놈이 어찌 감히 그분의 이름을….”

뜻밖의 이름이 거론된 것에 당황했는지 흡혈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지금이라도 손을 떼고 물러나시죠. 저는 드라카 님과 직접 계약을 맺은 관계니까요.”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얻은 블러드스톤 덕분에 피의 권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물러설 수 없다. 나, 카르밀라의 이름에 맹세코.”

잠시 흔들리던 카르밀라가 붉은 눈빛에서 냉기 어린 독기를 내뿜었다.

이후 그녀는 전투 자세를 고쳐 잡으면서 대화를 일축했다.

화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불꽃 송이가 날아왔다.

휘익.

불꽃 송이를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서 흡혈귀들의 난입이 시작되었고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스걱! 스걱!

하급 흡혈귀들이라도 우두머리의 지휘를 받는 동안엔 모종의 강력한 버프를 받는다.

그래서 일행의 발목을 잠시 잡아놓을 수 있었고 저만치 있던 카르밀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건방 떤 것에 대한 응징을 해주마. 아주 고통스럽게 죽여주지.”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