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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9화 (119/180)

제119화. 폐연구소 (1)

전요한은 전리품을 두둑이 챙긴 채로 해양 던전에서 나왔다.

바깥의 경계지점은 이미 위원회에서 파견한 이능력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예상대로 무사히 돌아왔네요. 굳이 나서지 않고 여기서 기다리길 잘했어요.”

의자에 앉아 있던 멜리사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로써 두 번째 의뢰도 완료했군요. 보상금은 두둑하게 주겠죠?”

전요한은 너스레를 떨며 관리소장을 이능력자들에게 넘겨줬다.

그들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후 바쁜 움직임으로 먼저 사라졌다.

“물론, 값은 제대로 치러주겠죠. 그런데 콜로세움에서의 경기는 마저 끝내지 않을 건가요?”

멜리사는 내심 누가 우승하게 될지 궁금한 모습이었다.

“아쉽지만 경기는 다음으로 미뤄질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콜로세움의 경기를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분위기가 좋지 않다며 시르케가 손가락을 저어 보였다.

전요한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 일정이야 조금 미뤄도 되겠지. 어차피 한동안은 콜로세움 운영이 중단될 거야.”

내부적인 비리가 너무 터져 나와서 관리소장이 끌려간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성싶었다.

아마도 승부 조작에 관계된 참가자들 또한 조사를 받겠지.

공식적으로 결과가 어떻게 발표될지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면 될 터였다.

“당분간은 쉬겠다는 것처럼 들리는군요. 하지만 유감이게도 위원회에서 당신들을 또 호출했어요.”

멜리사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쪽지를 건넸다.

그녀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기에 전요한은 표정에서 웃음기를 없앴다.

“무슨 일인데요?”

“직접 가서 듣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렇게 해서 일행은 상아탑으로 향했다.

이번엔 중층부의 접객실이 아니라 하층부의 격리실로 안내받았다.

만나야 할 상대는 위원회장이 아니라 어떤 환자라고 한다.

“아아, 오셨군요. 급한 대로 응급 처치는 해놓았는데 전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대책 없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치료사가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설아.

이전에 좀비 사태가 발발했던 당시에 구출했던 포로다.

그때의 고마움이 남아 있었는지 이설아는 먼저 인사를 건네 왔다.

“오랜만이에요. 저, 헌터로 각성해서 이젠 여기서 일하고 있어요.”

각성 초기부터 이곳에서 업무를 수행할 정도면 상당한 인재다.

“그럼 저 여성 연구원의 응급 처치는 설아 씨가 하신 겁니까?”

“네, 제 주된 능력이 상태 호전 쪽이거든요.”

상태 호전이라면 일종의 버퍼에 해당한다.

그건 그렇고, 이설아의 능력 사용에도 여성 연구원은 여전히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크흑…!”

광란 증세를 막기 위해 사지가 결속된 채 간이 침상에 누워 있는 그녀.

발작을 하듯 몸부림치는 모습이 딱했는지 간호하던 이설아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제 능력으로는 무리 같아요.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도 미지수고….”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는 상황이었다.

이 여성 연구원이 학원도시의 중범죄자를 찾는 데 도움이 되는 목격자인 탓이다.

뭔가 방법을 강구해야 했기에 전요한은 얼마 전 얻은 전리품을 꺼냈다.

청아한 색채의 투명한 액체.

「인어의 눈물」은 일회성 회복제로서 주로 역병이나 저주를 치료하는 용도이다.

이윽고 여성 연구원의 상태가 호전되자 이설아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하신 거예요?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별것 아닙니다. 아무튼, 슬슬 본래의 주제로 되돌아오죠. 당사자가 의식이 돌아오는 것 같으니까요.”

전요한은 여성 연구원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지 눈을 깜빡였다.

“여, 여기는 어디죠?”

상아탑의 격리실까지 오는 도중에도 의식이 계속해서 끊기곤 했으니 무리는 아니다.

이설아는 상황을 설명한 후, 위원회로부터 건네받은 서류까지 보여주었다.

그녀가 이것저것 묻자 여성 연구원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 남자… 위험한 인물이에요. 신분을 조작해서 국가 기밀 연구소에 잠입하고 범죄나 다름없는 실험을 해요.”

애덤 카다스키.

그는 관리국의 수석 연구원 중 한 명이었다.

평소 관심 있었던 분야는 신약 개발인데, 특히 이능력자들의 전력을 높이는 방법에 매달렸다.

하지만 정상적인 연구로는 성과가 보이지 않자, 이단적인 시도도 하려는 바람에 쫓겨난 인물이라고 한다.

“위원회가 우리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이야기를 듣던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원회장의 세 번째 의뢰는 바로 애덤 카다스키를 찾는 것.

전후 정황으로 보건대, 녀석은 좀비 바이러스의 제조자로 의심할 여지도 다분했다.

“애덤이 학원도시에 숨어 있단 게 확실한가요?”

“제 눈으로 목격했어요. 불과 얼마 전에 야근을 하다가…”

애덤은 폐기된 연구소에서 은밀하게 비밀 실험을 진행해 왔다고 한다.

그러다가 추격이 끈질기게 붙자, 신분을 위장하고 다른 연구소에 잠입하는 식으로 수법을 바꿨다.

“정체불명의 알약을 동료들에게 먹여서 최면 같은 걸 유도했어요. 전부 자신의 말대로 하도록 만들었죠.”

만약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전부 자살을 시켰다고 한다.

여성 연구원은 이러한 의식조종으로부터 운 좋게 살아남은 케이스였다.

“어쩌면 악마숭배 집단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네. 제법 구미가 당기는 사건이야.”

호기심이 동한 전요한이 눈을 빛냈다.

원로회가 타락했단 증거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그와 연관된 게 나온 탓이었다.

“천천히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죠. 무언가 우리가 놓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잠자코 듣던 시르케가 위원회로부터 제공받은 서류를 훑어봤다.

그러고는 다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 * *

여성 연구원의 진술엔 딱히 거짓으로 보이는 점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일했던 연구소로 곧장 현장 조사를 나갔다.

증거 인멸은 이미 끝났을 테지만, 의외의 소득이 있을지도 모른다.

“혼란한 시국에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최고 책임자인 연구소장이 마중을 나와서 먼저 비위를 맞춰주었다.

“이쪽으로 먼저 들어오시지요. 불편함이 없도록 저희가 곁에서 수행하겠습니다.”

연구소장은 가급적 그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길 원했다.

하지만 그러면 잠입한 의미가 없었기에 적당히 구슬렸다.

“연구 실적을 가지고 꼬투리 잡으려는 게 아닙니다. 내부적인 사정은 적당히 눈감아줄 테니 수사에 협력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만 부디 부탁드립니다.”

연구소장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우선적으로 향한 장소는 한 실험실이었다.

애덤 카다스키가 참여했던 프로젝트인데, 최근 새롭게 떠오르는 핵심 신소재와 관련 있다고 한다.

“이게 바로 해당 프로젝트에 대한 문서입니다. 조금 어려운 내용이지만 참고는 해보십시오.”

먼저 찾아간 연구실의 서류를 뒤적이던 연구소장이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애덤 카다스키로 인해 프로젝트는 잠정 중지된 상태라고 한다.

“연구 중인 핵심 신소재가 이세계로부터 비롯한 유물의 일부 비밀을 밝혀낼 수 있다는군요.”

대충 훑어본 시르케가 간단히 요약을 해주었다.

전요한이 함께 연구실 내부의 시설물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비상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 연구소 내부에 생물학적 위험 감지!

- 전 인원 신속히 대피해 주십시오. 반복합니다!

애덤 카다스키의 짓이란 직감이 드는 순간이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찾아올 것을 대비해둔 모양이야.”

만약 비상경보에서 알린 생물학적 위험이 좀비 바이러스처럼 파급력이 큰 것이라면, 덫에 걸린 꼴이었다.

말없이 뒤따르던 멜리사도 그렇게 판단했는지 자신의 무구를 소환했다.

“아마 미리 손을 써둬서 탈출하기도 어려울 거예요. 번거롭겠지만 천천히 길을 여는 수밖에요.”

연구소장을 제외하고라도, 세 사람이면 전력은 충분했다.

실험실의 출입문을 열고 나오자 통로를 따라 달려오는 괴인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저, 저건…?”

“흡혈귀입니다. 잘은 몰라도 여기서 자행되던 연구의 일환 같군요.”

사색에 질린 연구소장을 진정시킨 후 그에게 아까 확보했던 보고서를 넘겼다.

‘이럴 때 피의 권능을 지닌 한유림이 곁에 있었다면 일이 더 수월했을 텐데.’

하지만 그녀를 당장 여기로 데려올 방법은 없었다.

스걱!

먼저 달려들던 흡혈귀가 상체를 절단당한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어서 시르케와 멜리사도 한 마리씩을 처치했고 주위는 곧 난장판으로 변했다.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아무리 이능력자라도 면역력이 있진 않을 테니까요.”

뒤에서 벌벌 떠는 연구소장을 향해 전요한이 주의를 주었다.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걸 보면 아직도 내부에 협력자가 있는 모양이에요. 우선 그자를 찾아보죠.”

멜리사가 냉철하게 우선 순위를 세웠다.

그녀는 말을 마친 후 다시금 한 무리의 흡혈귀를 신속하게 처리했다. 차근차근 길을 열면서 나아간 지도 어느덧 수십여 분.

벽면의 스피커로부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이거, 죄송스럽게 되었군요. 그분의 지시로 연구소는 잠정 폐기되었습니다. 조만간 정화 작업을 실시할 예정이니 알아서 처신하기 바랍니다.

제법 음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악당다운 목소리였다.

그건 그렇고, 녀석이 말하는 정화 작업이란 단어가 전요한은 심히 거슬렸다.

“일단 흡혈귀로 우리의 발을 묶고 대량 살상 수단 따위로 한 방에 정리하겠단 심산 같아요.”

멜리사도 불순한 수작질이라 여겼는지 함께 걸음을 서둘렀다.

“대량 살상 수단이라… 확실히 그런 걸 동원하면 사건을 은폐하긴 편하겠군요.”

천장에서 기습 공격을 해오는 흡혈귀를 두 동강 내며 전요한이 표정을 굳혔다.

애덤 카다스키에게 당하는 기분이라 심기가 안 좋아진 기색이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함정에 걸려줘야 저들도 모습을 드러낼 테니 말이죠.”

시르케가 이것은 예정된 수순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빙결 마법으로 흡혈귀들의 발목을 최대한 붙잡았다.

전요한과 멜리사가 신속하게 길을 열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일행이 더 늦지 않게 걸음을 서두르고 있을 때였다.

- 정화 작업이 곧 실시될 예정입니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모두의 안전을 위해 희생되어 주십시오.

사내의 음험한 목소리가 재차 벽면의 스피커로부터 새어 나왔다.

제법 자신만만한 것이 승리를 확신하는 눈치지만, 전요한에겐 어림없었다.

잠시 제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자 통로의 저편에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형상을 올려다본 멜리사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저것은…?”

마치 누더기처럼 육체를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듯한 마룡(魔龍).

아니, 정확히는 그 열화판이었다.

“이것도 학원도시의 기술력인가요? 잘은 몰라도 상당히 독보적인 수준이군요.”

붉은빛으로 번뜩이는 마룡의 두 눈을 바라보며 시르케가 말했다.

하지만 멜리사는 아직 확실하지 않은지 대답하는 걸 꺼렸다.

“…솔직히 모르겠어요. 이게 애덤 카다스키의 단독적인 연구 결과인지, 아니면 내부적인 공동 프로젝트에서 빼돌린 것인지.”

“어느 쪽이든, 레이드는 불가피합니다. 우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죠.”

아무리 열화판이라지만 저 녀석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원은 드래곤 하트일 터다.

신화종의 동력원을 재료로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존의 레이드 몬스터와는 격이 다른 존재.

전력으로 맞서 싸우지 않으면 적잖이 곤란했다.

곧, 일행은 전투태세에 돌입했고 현장의 분위기엔 쥐죽은 듯한 침묵과 살 떨리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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