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망자의 군도 (3)
해상 전장의 최종 승자는 전요한으로 결정되었다.
압도적인 기세에 선장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은 상황. 이제 와서 해상전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의제기를 받기엔 너무도 완벽하게 승리해 버렸군요.”
퇴역군인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르케는 이 상황이 당연하다는 듯이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애초에 저들은 당신처럼 붙잡혀 온 생존자일 뿐입니다. 해상전에 능숙할 리 없죠.”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려면 해양 던전의 비밀을 풀어야 했다.
전요한은 저주받은 해역을 해방하기 위해 봉인석이 박힌 절벽으로 다가갔다.
“제가 이곳의 해적왕이니 봉인을 풀어주시죠, 바다신 플루톤 님.”
바다신에 대한 단서는 여기저기에서 수집해놓은 상태였다.
덕분에 해방 의식을 치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드드드드.
곧이어 지면이 울리면서 봉인석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후 봉인석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빛이 주위를 집어삼켰다.
“뭐, 뭐죠?”
당황한 퇴역군인이 물었다.
전요한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해적선 한 척이 해안에 놓여 있었다.
“어서 타죠. 이제 기존의 선박은 필요가 없습니다.”
시르케의 말대로 일행은 해적선의 갑판 위로 올라섰다.
그러자 어디선가 나타난 검푸른 유령이 전요한의 목에 날카로운 커틀러스를 겨눴다.
“내 배에 멋대로 올라타다니, 간이 제대로 부은 녀석이구나.”
저주받아서 봉인되어 있었던 주제에 허세는, 하고 말할 수 있었으나 전요한은 최대한 체면을 살려줬다.
“송구하지만 해적왕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무슨 도움?”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저주받은 해역 때문에 일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상대는 해적왕, 드레이크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배로 저 해역을 건너왔던 적이 있다.
생전의 무용담을 칭찬하자 녀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세계에서 온 자가 나에 대해 어떻게 그리 잘 아는 거지?”
“그간 이곳을 탐험하면서 이런저런 기록을 발견했습니다. 해적왕님의 발자취가 물씬 남아 있더군요.”
초반부에 얻었던 「망자의 항해일지」는 제법 도움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간략하게 들려주는 전요한.
드레이크는 진지한 표정으로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모래시계」를 손에 넣은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나 보군. 좋다, 너에겐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 도와주겠다.”
드레이크를 불러낸 것은 다름 아닌 모래시계였다.
여기까지 오던 도중에 얻은 불가사의한 유물.
활성화된 이후엔 시간 제한이 있으므로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항해를 준비하라.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 여정이 될 것이다.”
드레이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선원들이 나타나 돛을 펴고 항해를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바다신의 저주를 받아 죽은 영혼이었다.
안식을 되찾기 위해서는 해양 던전의 최심부에 있는 신전으로 가야 한다.
그러려면 도사리고 있는 거대 괴수를 해치워야 했다.
“거대 괴수라니, 크라켄이라도 되는 걸까요?”
이야기를 듣던 시르케가 조금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상에서면 모를까, 해상의 갑판에서는 신화 속에나 나오는 몬스터와 맞서기 어려워 보였다.
“해적왕의 선원들과 함께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전요한은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째 날의 항해는 그나마 평온한 편이었다.
괴조들의 습격을 몇 차례 받긴 했으나, 이외엔 별일이 없었고 바다도 잠잠했다.
문제는 둘째 날부터 갖은 고난이 시작되었단 것이다.
“저 회오리는 대체 뭐죠?”
“이상 기후로 인한 기현상 같은데, 항로를 수정해야겠어요!”
눈앞에서 용오름 치는 물기둥을 보며 퇴역군인과 시르케가 기겁한 반응을 보인다.
한편 드레이크는 오히려 위기를 즐기듯이 호탕하게 웃으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하하하! 이 정도는 되어야 히어로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지!”
해적왕의 범선은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었다.
오히려 거친 물살을 헤치며 더욱 기세등등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혹시라도 괴수가 나타나면 나서야겠어. 한동안 가만히 있었더니 몸이 근질근질하네.”
그동안 이렇다 할 만한 활약을 하지 못해서인지 전요한은 여전히 지루한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드레이크는 씨익 하고 웃어 보인다.
“검술 실력은 자신이 있다 이거군. 항해 도중에 활약할 기회가 생기길 진심으로 바라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듯한데.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어서 퇴역군인은 내심 불안해지던 차였다.
고오오오오―!
인근의 파랑이 격해지며 어디선가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와 동시에 드레이크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오호, 과연 바다신은 이 몸의 항해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모양이군.”
해양 괴수의 등장.
그것도 보통내기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젠장, 어떻게 하죠? 바다에서 레이드를 하긴 어렵잖아요.”
뱃멀미를 할 것 같은지 퇴역군인이 창백한 표정을 지었다.
시르케도 이 같은 상황이 달갑지 않은지 입술을 깨문다.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싸우는 수밖엔 없습니다. 각자 포지션을 잡아주세요.”
근접 딜러는 아무래도 해상 전투 시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그렇기에 시르케가 마법사로서 전투에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섰다.
함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자, 대왕문어처럼 생긴 거대한 해양 괴수가 파도가 일렁이는 해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크라켄처럼 생기긴 했지만 신화적인 해양 괴수에 비할 만큼의 위용은 못 된다.
그래도 당장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존재였는지,
“흐업!”
전위에 있던 퇴역군인이 까무러칠 것처럼 숨을 집어삼켰다.
“진정하세요, 이능력자가 아니더라도 잘만 대응하면 됩니다.”
순탄한 항해에 질려 있던 전요한으로선 무료함을 달랠 절호의 기회였다.
타앙!
기다란 문어 다리들이 사방에서 갑판을 덮쳐온다.
그런데 크기가 상당해서, 내려치며 발생하는 충격음이 흡사 총성과도 같았다.
“저것들은 우리가 맡아줘야 합니다! 어서 처리하세요!”
전요한은 먼저 나서면서 다급히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퇴역군인도 정신을 차렸는지 마체테를 휘두르며 문어 다리에 달려든다.
“죽어라, 이 괴물!”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최대한 몸부림쳐 보겠다는 움직임이었다.
스걱!
맹렬한 기세로 휘둘러진 마체테가 문어 다리를 깔끔하게 절단했다. 언뜻 평범한 무기처럼 보이지만 나름의 이능이 깃든 유물이었다.
이를 본 전요한이 만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을 물리치지 않으면 범선이 전복될 수도 있어요! 서두르죠!”
삽시간에 휘두른 눈부신 참격이 갑판에 달라붙은 문어 다리들을 베어냈다.
이에 타격을 입은 해양 괴수가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고오오오오―!
제법 화가 난 듯했으나 별로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몸집이 크긴 해도, 현재로선 충분히 시도해볼 만한 상대다.
“어림도 없다!”
공략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전요한은 각성 모드로 전환했다.
스르르르!
전투력이 강한 건 아니지만 녀석에겐 자가재생 능력이 있었던 탓이다.
즉, 문어 다리를 아무리 잘라내도 승부를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최대한의 화력을 동원하여 단번에 사멸시키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윽고 전요한이 아르티나를 사선으로 내리긋자 해양 괴수의 몸체가 얼어붙었다.
콰드드득!
곧이어 마법 영창을 하던 시르케가 지팡이를 갑판 위에 내리꽂았다. 시르케를 중심으로 신비한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눈앞에 뜨거운 열기를 품은 화염의 소용돌이가 일어나 해양 괴수를 집어삼켰다.
“어, 엄청나군요.”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질 만큼 가공할 만한 위력에 퇴역군인이 식은땀을 흘렸다.
이로써 해양 괴수는 해치웠지만, 문제는 그 여파다.
화염의 소용돌이로 인해 해류가 더 난폭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다가 다 죽겠어요! 어서 손을 써보세요!”
정신없이 흔들리는 갑판 위에서 퇴역군인이 다그쳤다.
굳이 대답하는 대신, 전요한은 드레이크를 바라봤다.
“빠져나갈 수 있겠죠? 명색이 해적왕이신데.”
“물론이다. 이번에도 나의 능력을 증명해주지.”
드레이크는 노련한 감각으로 타륜을 돌렸다.
그러자 푸른 기운이 해적선을 휘감으며 추진력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효과는 가히 놀라웠다.
해류에 빨려 들어가던 범선이 튀어 오르듯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덕분에 위험 지대를 손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장님.”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줄 테니 걱정 마라, 애송이.”
평온해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드레이크가 씨익 하고 웃어 보인다.
이후 범선은 다시 호쾌한 기세로 대양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저주받은 해역 너머에 있는 것은 외딴 섬이었다.
전요한은 그곳이 최종적인 목적지란 걸 눈치챘다.
“도망자가 숨기엔 최적의 장소로군. 모든 비밀은 저기에 숨겨져 있어.”
콜로세움의 관리소장을 붙잡기 위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바다 냄새가 지긋지긋한지 시르케도 머리카락을 꼬았다.
“어서 끝을 내러 가죠. 발자취를 추적하기도 귀찮습니다.”
용무를 마칠 때까지 해적선은 뭍에서 정박하기로 했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우리는 이만 물러가겠다. 건투를 빈다.”
모래시계가 가득 차자, 드레이크와 선원들은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남은 내구도로 볼 때 앞으로 한 번 정도는 더 불러낼 수 있을 것 같다.
“좋아, 그럼 내부 탐험을 시작해볼까?”
전요한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앞장섰다.
붉은 안개가 깔린 숲속.
방향 감각을 잃기 쉬웠으나, 시르케가 탐지마법으로 최단 루트를 알려줬다.
“중앙부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의 유적지가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 같네요.”
지금까지의 정보로 미루어 보면 아마도 바다신의 신전일 터였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촉수들을 베어냈다.
“확실히, 다른 섬과 달리 노골적인 적의가 느껴지네.”
하지만 하급 권속의 방해 따위로는 일행을 막을 순 없었다.
얼마 후 목적지에 도착하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관리소장의 모습이 보였다.
“네, 네놈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관리소장의 손엔 기묘한 유물이 쥐어져 있었다.
마치 바다의 정수를 모아놓은 듯한, 비취색의 구체.
마법사인 시르케는 그것의 본질을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저건 바다신의 보주입니다. 내부에 깃든 권능을 이용해서 그동안 우리를 방해해온 거죠.”
수면처럼 내부에 물결이 일렁이는 보주엔 일행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비난의 눈초리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관리소장은 혐의를 부정했다.
“무, 무슨 소리야! 나는 그저 여기에 갇혀 있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의 말을 믿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숨을 내쉬던 시르케가 손가락질을 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우연히 그 유물을 이용해서 이곳을 해상 감옥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관리소장은 현재 던전의 주인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들을 가둬놓기도 하고, 위기에 몰리면 숨기도 할 수 있는 이공간.
녀석에게는 한없이 매력적인 장소였을 터다.
“크읏! 나를 그렇게 몰아세운다면 하는 수 없지!”
뒷걸음질 치던 관리소장이 뭔가 결심했는지 보주를 높이 들어 올렸다.
그것을 파괴해서 바다신을 불러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제물들을 바쳐 왔으므로, 바다신은 관리소장의 부탁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퍼억!
난데없이 뒤에서 날아온 일격에 그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진 관리소장 뒤엔 퇴역군인이 서 있었다.
“그래도 마지막엔 1인분을 해서 다행입니다.”
전요한과 시르케가 시선을 끌 동안 퇴역군인은 은신한 채 관리소장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그에게 엄지를 치켜올린 후, 전요한은 입을 열었다.
“이제 바다신의 신전을 털어보죠. 값이 나가는 게 제법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던전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므로 조금 여유를 부려도 늦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바다신의 신봉자들이 본다면 경악할 정도로 인정사정없는 도굴이 시작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