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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7화 (117/180)

제117화. 망자의 군도 (2)

다양한 식량을 확보하고 나니, 첫날밤의 야영은 풍족했다.

생선구이는 속살이 부드러웠고, 게와 가재는 스튜로 만들어 끓이니 풍미가 일품이었다.

“이런 곳에서 호화로운 식단을 즐길 줄은 몰랐군요.”

그동안 힘들게 생존해왔던 퇴역군인이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의 생존법은 터득하고 있었지만, 혼자서 지내다 보니 요리를 만끽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맛있는 음식은 영양소를 제공하고 생존 욕구를 올려주죠.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식사 시간에 투자하는 걸 아까워해선 안 됩니다.”

전요한이 서바이벌 상황에서 음식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대미궁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경험은 그에게 온갖 레시피를 개발할 기회를 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눌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허브차를 홀짝이던 시르케가 대양 진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침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퇴역군인이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식용자원이 풍부하다고 해도, 여기는 무언가 불길한 게 많습니다. 오래 있어서 좋을 것이 못 되는 것 같아요.”

한밤중에도 스켈레톤 무리가 어디선가 나타와 공격해왔다.

물론, 대양을 항해하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시도는 해봐야 했다.

“해변가에서 좌초된 선박을 하나 발견했어. 그걸 고치는 편이 현재로선 가장 빠를 것 같은데.”

전요한은 모래시계를 꺼내서 만지작거렸다.

선박에서 얻은 유물인데, 이건 항해를 할 때에만 유용하다.

수리하는 작업은 직접 해야 하니, 날이 밝는 대로 목재와 철광을 준비했다.

“천연동굴에서 철광석까지 채굴하시다니.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퇴역군인이 감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전요한은 별것 아니란 듯이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다 보면 자연히 깨우치게 됩니다.”

가죽을 무두질하고 금속을 제련하는 등의 생산 관련 기술은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한다.

환경이 열악해서 조금 원시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선박을 개축하는 재료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작해냈다.

“그럼 시작해볼까?”

각종 재료를 운반해온 전요한이 좌초된 선박을 바라봤다.

우선은 파손된 선체를 보완하여 침수를 방지하고, 장시간의 항해에도 끄떡없도록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되겠군요.”

“돛대도 부러져서 다시 세워야 합니다. 갑판도 보강해야 하고요.”

전체적인 작업은 3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마침내 개축을 완료한 후, 일행은 시험 삼아 운용을 해보았다.

“이거, 생각보다 앞으로 잘 나아가네요.”

“본체의 성능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습니다. 이만한 건 다시 얻기 어렵겠죠.”

어떤 경우에도 배를 버려선 안 된다고 시르케가 당부했다.

아무튼, 이로써 무인도 탈출은 충분히 가능해진 상황이다.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실은 후, 일행은 본격적인 항해를 시작했다.

선장실에 있던 나침반을 보며 나아가다 보니, 새로운 섬이 발견되었다.

“해안가를 따라 이동하면 발각되기 쉬우니 밀림을 가로질러 갑시다.”

만에 하나 적이 있다면 경계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수풀이 밀집한 지역을 따라 이동했고 도중에 퇴역군인이 독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어우 깜짝이야, 잘못해서 물렸으면 앓아누울 뻔했습니다.”

그리고 야생의 온갖 벌레들이 달라붙는 통에 상당한 고생을 해야 했다.

얼마 후, 다른 피난촌을 찾아낸 일행은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다른 생존자들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일단은 제압하고 봐야 합니다. 저들이 우리를 그리 반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했으므로 전요한은 무력시위를 택했다.

질문을 던졌던 퇴역군인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쩌면 관리소장을 호위하는 녀석들일 수도 있겠죠.”

“그게 아니더라도, 생존자들은 적당히 길들일 필요성이 있습니다. 분란이 일어나서 도중에 우리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어요.”

잠자코 있던 시르케가 쐐기를 박았다.

그렇게 해서 일행은 기회를 엿보다 기습을 감행했다.

퍼억!

전요한이 경계를 보고 있던 사내의 뒤를 쳤고 나머지는 한가롭게 있던 이들을 모두 붙잡아 포박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목숨만은!”

이들은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했다.

어안이 벙벙한 걸 보니 방심하다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모양이다.

“…죽이지는 말죠. 어차피 선박도 없어서 우리를 뒤따라오지 못할 테니까요.”

마음이 약해진 퇴역군인이 관용을 베풀자고 설득해왔다.

조금은 호구 같은 생각이긴 했으나 전요한은 수락했다.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자들이기도 하고, 나중에 되돌아와서 생필품 등을 수급할 여지도 생긴다.

생존권을 보장해 주기만 하면 이들은 세금을 걷어갈 수 있는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피난촌을 적당히 약탈한 후 일행은 다시 선박에 올라탔다.

이들에게서 해적 지도를 새로 얻은 덕분에 정보량이 늘어났다.

“잘 살펴보니 무역로처럼 보이는 루트가 표시되어 있군요. 이건 누군가 주기적으로 항해를 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관찰력이 좋은 시르케가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상선 같이 보이는 배를 찾아봐야겠네. 아니면 해적선이라도.”

전요한은 이해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고는 무인도 사이를 돌아다니며 다른 선박을 찾는다.

“갤리선이다!”

“얘들아 약탈해!”

덕분에 다른 무법 세력의 공격을 수없이 받게 되었지만 말이다.

“요한 씨, 저놈들 지금 불화살로 공격하는데요?”

“일단 맞부딪칩시다. 그리고 백병전으로 승부하죠.”

치열한 선상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떤 적들은 냉기 마법으로 바닷물을 얼려서 갤리선을 좌초시키기도 했고, 누군가는 폭발물로 난파시키려고도 했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그들은 목표 대상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배는 상선으로 보이는군요.”

무인도에서 조금 떨어진 채 항해를 하고 있는 상선.

그 위엔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당신이 이곳을 주기적으로 항해하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네. 용케도 날 발견해냈군.”

사내는 전요한이 말을 걸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서북쪽 방향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저기로 가면 육지가 나온다네. 하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걸세. 저 구역은 저주받은 곳이거든.”

저주받은 곳이라.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버뮤다 삼각 지대처럼 선박이 자주 좌초되는 구역이라도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3일 만에 급조한 선박만으로 통과하긴 어려웠다.

“거긴 어떻게 지나가야 하나요?”

곤란한 표정을 짓던 시르케가 사내에게 물었다.

사내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해적 지도 한 장을 펼쳤다.

“이게 바로 그 방법이 있는 곳일세. 한번 가보겠는가?”

해적 지도에 표시된 지점은 주위의 무인도 중 하나였다.

고개를 끄덕인 후 되돌아가려 할 때, 전요한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사내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여기에서 혼자 항해를 하고 있어요? 무법자도 많은데 위험하지 않아요?”

사실 전요한의 질문은 일행 모두가 품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는 허허 하고 웃은 후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기는 오래전 멸망한 세계의 잔재라네. 내 이름은 보티우스, 예전에 불행히 이쪽에서 난파당한 배의 선장이었지.”

보티우스는 혼자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이곳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척의 해적선이 이쪽을 지나갔고 모든 비극이 그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해적선이 저주를 받았다고요?”

“해적선의 선장은 이곳에 잠들어 있던 것을 잘못 건드리고 말았네. 그래서 해적선과 함께 봉인되어 이곳에 묻혀버렸지.”

그리고 자신 또한 저주받아서 이렇게 NPC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딱하게 되었네요.”

“언젠가는 편히 쉬시길….”

하지만 일행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후 해적 지도에 표시된 지점으로 가자 인파가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미 경쟁이 벌어진 모양인데요?”

“무슨 일인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지요.”

일행은 조심스럽게 인파에 끼어들어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엿들었다.

“그러니까 해적왕은 나라고!”

“웃기지 마, 너는 항해하는 법도 제대로 모르잖아!”

이들은 누가 해적왕에 어울리는 자인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파악해온 전요한이 간단히 설명을 해줬다.

“아무래도 저주받은 구역을 벗어나려면 해적왕이라는 자격이 필요한 모양이야.”

“해, 해적왕이라니….”

“그런 칭호를 얻으려면 바다를 재패해야 하지 않나요?”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 무대엔 무인도들밖에 없으니, 결국 여길 제패하라는 이야기로 해석해야 했다.

그럴듯하다고 여겼는지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무인도이긴 하지만 빼곡하게 차 있으니까요.”

“제 생각도 같습니다. 아무튼 저들을 모두 복종시켜야 한다는 건데 쉽진 않을 듯합니다.”

여기에 있는 무인도는 못해도 100여 개는 된다.

그리고 이 자리에 모인 자들도 대략 30여 명.

해적왕이라는 칭호를 얻는 건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 결전을 한번 벌이는 것이 어떻겠어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전요한은 모두가 있는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옥신각신 다투던 이들의 시선이 일시에 이쪽으로 향했다.

“넌 뭐야?”

“늦게 온 놈은 빠져.”

완전히 찬밥 신세.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해적왕이란 칭호를 놓고 다투는 거라면, 해상전으로 결판을 냅시다.”

“뭐, 해상전?”

전요한의 제안에 경쟁자들이 솔깃한지 귀를 기울였다.

“네, 모두 함께 배를 이끌고 나와서 한 번에 맞붙는 겁니다. 그런 전장에서 승리해야 해적왕이 아니겠습니까?”

“음… 일리가 있긴 하군. 그럼 해상전으로 결판을 내자고.”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는 경쟁자들.

전요한은 일행에게 되돌아와서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한 번에 승부를 보죠. 분명 저희가 이길 겁니다.”

이윽고 시기가 닥치자, 각 선장들은 배를 끌고 나와 신경전을 벌였다.

“너희들은 해상전이 뭔지도 몰라!”

“한번 맞붙어 보자고! 누가 물귀신이 될지!”

사실상 선박의 크기는 대부분 비슷비슷했다.

한 무리가 무인도에서 건조할 수 있는 수준에 한계가 있는 탓이었다.

“저희는 정중앙으로 돌격할 겁니다. 그래도 살아남을 테니까요.”

해상전을 시작하면서 전요한은 선박을 최대한 과감하게 운용했다.

선박의 내구도를 믿는다기보단, 시르케의 마법을 믿었다.

콰아아앙!

이윽고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끼더니 거친 소용돌이가 용오름치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직!

급류에 휘말린 선박들이 차례로 갈기갈기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그제야 선장들은 뒤늦게 뱃머리를 돌리려고 했으나 이미 상처 입은 선박에선 바닷물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크으…!”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뒤쪽으로부터 분기에 찬 선장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을 가볍게 무시한 채 일행은 해상 전장의 중앙부로 유유히 이동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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