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망자의 군도 (1)
쏴아아아.
파도가 밀려와 암벽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뜨자 새로운 무대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여긴 해변가로군요.”
시르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머나먼 대양의 외딴 섬.
푸른 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강렬한 햇빛만이 내리쬔다.
“우선 주위에 뭐가 있는지 살펴보자. 위험한 곳일 가능성이 높으니 급습에 조심하고.”
함께 해안가를 따라 걸으며 전요한은 탁 트인 수평선 너머를 응시했다. 그때 시르케가 무언가를 가리켰다.
“저기 뭔가 보입니다. 폭풍에 휩쓸려 떠내려온 표류선인 것 같은데···.”
시르케의 말대로 좌초된 선박 하나가 모래사장 위에 박혀 있었다.
돛대도 멀쩡한 편이고 하니 적당히 손보면 다시 항해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에게 주위경계를 맡긴 후 전요한은 내부를 수색했다.
‘이건 엄청 오래전에 만들어진 선박 같은데.’
어쩌면 도움이 될 만한 게 숨겨져 있을 지도 몰랐다.
얼마나 여기에서 체류할지 모르니 비상식량이 있다면 챙겨두는 것이 좋다.
‘썩은 감자 같은 게 나오면 낭패이긴 한데.’
갑판 아래로 내려와서 조심스럽게 선실을 뒤져보았다.
아직 누군가 털고 간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음침하다.
끼이익.
뭔가 좋지 않은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그 직감이 적중했는지 사각지대에 숨어있던 해골 병사 하나가 빈틈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휘이익!
다행히 해골 병사의 움직임은 상당히 우둔한 편이었다.
전요한은 단검으로 녀석의 공격을 받아낸 다음 곧바로 발길질을 가했다.
퍼억!
상대적으로 높은 민첩 스탯은 이럴 때 유용했다.
갑작스런 기습을 받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할 여지가 있다.
전요한은 선식 바닥에 쓰러져 아둥바둥하는 해골 병사를 향해 다가갔다.
콰드득.
인정사정없이 내리쳐진 단검에 새하얀 골격이 박살 났다.
“후우.”
별것 아닌 상대였지만, 공간이 협소하다 보니 집중력이 필요했다.
추가적인 위협 요소가 없는 걸 확인한 후 전요한은 마저 선실을 뒤졌다.
진열장의 한구석에 이질적인 뭔가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흠, 이건···?”
[위대한 항로의 모래시계]
저주받은 군도에서 생을 마감한 선장의 영혼을 소환한다. 모래시계가 작동하는 동안 선장은 자신의 선원들과 함께 항해를 돕는다. 다만 이들에게 빈틈을 보이면 선상반란이 일어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일종의 이세계식 자동항법 도구라고 보면 된다.
마력을 부여하면 원하는 대로 선박을 운용할 수 있는 유물.
물론 상세설명에 적혀 있듯 다소의 위험 감수는 해야 했다.
‘그래도 나름의 소득이 있어서 다행이군.’
다른 선실도 면밀하게 조사해 보았다.
복병처럼 해골 병사들이 간간이 숨어 있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녀석들은 전요한에게 있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소품 정도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지금까지 발견된 아이템은 총 4종이었다.
허름한 항해일지, 식수를 보관 가능한 나무통, 찢어진 보물지도, 탐험용 망원경.
어떻게 보면 별 보잘것없고 한편으론 나름의 쓸모가 있는 물건들이다.
그중 허름한 항해일지에 먼저 눈이 갔다.
촤르르르륵.
빛이 바랜 페이지를 넘겨 가장 최근의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항해일지는 이계어로 작성되어 있어서 마력을 주입해야 일정 분량을 해독 가능하다.
[…죽음의 선고를 받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어간다. 이 저주받은 군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아마도 이번 밤이 마지막 항해가 되겠지. 처음부터 그들의 조언대로 했다면 상황이 나아졌을까?]
여기 있던 선원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직 감은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죽음의 선고」라는 단어와 저주받았다는 표현을 통해 유추해 보건데 이곳엔 일종의 시간제한이 있는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항해일지를 읽어보려 했지만 역시나 이런 기록물엔 쿨 타임이 항상 제약조건으로 붙어있었다.
[망자의 항해일지는 한 시간마다 새로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정 정보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면 ‘키워드 검색’을 이용해보세요.]
키워드 검색은 말 그대로 방대한 분량의 기록물에서 필요한 내용만을 선별적으로 찾아내는 기능이다.
따라서 시간이 엄청나게 절약되므로 몇 배의 마력이 소모된다는 단점에도 많은 이들이 이 기능을 사용한다.
선박 밖으로 나오자 시르케가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내용이에요?”
“여긴 저주받은 지역이라 탈출하지 못하고 전부 죽었대.”
“음, 예상대로군요. 안 그래도 기분 나쁜 게 느껴져서 말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시르케는 탐색 마법을 시전하던 도중 떠도는 망자들의 기운을 느꼈다고 한다.
“저쪽 방향에서 특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한번 가보시겠습니까?”
시르케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곳은 울창한 밀림으로 이루어진 외딴 섬이었다.
전요한은 식수가 담긴 나무통을 맡긴 후 찢어진 보물지도를 살펴봤다.
‘여기가 이 지점인가.’
대략 9등분된 일부 피스로 추정되는데 확실한 건 없다.
어차피 앞으로 수색을 진행하면서 점차 밝혀지게 될 내용.
찢어진 보물지도엔 지형 정보와 여러 유형의 마크가 표시되어 있다.
“일단 가보자. 계속 여기 있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니까.”
울창한 밀림을 향해 전요한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 * *
사삭. 사삭.
밀림 내부는 생각보다 고요했다. 자연자원도 풍부했는데, 문제는 생존자들이 있단 점이었다.
“잠깐만 멈춰 보세요. 풀숲에 누군가가 숨어있습니다.”
이질적인 존재감을 느낀 시르케가 전방을 가리켰다.
정체가 뭐든 간에, 저들이 가로막고 있는 한 계속해서 나아갈 수는 없다.
“숨어 있지 말고 나오시죠.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
전요한의 말에 저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군복을 입고 있는 사내 한 명이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얼어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봤습니까? 그 저주받은 존재들을.”
저주받은 존재라면, 얼마 전에 상대했던 스켈레톤 따위를 말하는 걸지도 몰랐다.
단순한 생존자로 보였기에 전요한은 일단 사내를 안심시켰다.
“자, 진정하고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어요? 출입 권한이 콜로세움의 관리소장에게만 있던데.”
“관리소장? 아아, 그 녀석이 자신의 비밀을 알았다고 여기로 집어 던져버렸어.”
사내는 본래 콜로세움에서 부상자를 옮기던 퇴역군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승부 조작에 대해 눈치채게 되어 던전으로 유배 생활을 오게 된 것이다.
옷차림이 멀쩡한 편인 점으로 미루어 보면, 그 시기는 오래 되지 않은 듯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완전히 고립된 상태란 말이로군요.”
퇴역군인의 말을 듣던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망망대해에 여러 개의 섬이 있는 것 같은데, 여기는 그중 하나.
일단 선박 따위를 만들어서 탈출하는 걸 목표로 삼아야 했다.
“당장 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네. 그렇다면 임시 거처부터 마련해보자.”
고개를 끄덕인 전요한이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다.
그러고는 해안가에 버려져 있던 연장으로 나무를 베기 시작한다.
“저도 돕겠습니다. 이런 건 현역 군인이었던 시절에 많이 연습해 봤으니까요.”
퇴역군인은 능숙하게 필요한 자재들을 수급해왔다.
그동안 시르케는 조악한 낚싯대로 해변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어쩐지 휴양지에 놀러 온 기분이 들긴 합니다만.”
그녀는 푸른 바다를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망망대해의 군도.
이동상 제약이 심한 환경이다 보니 초기엔 자급자족의 필요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왠지 서바이벌 캠핑을 나온 착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여긴 무인도니까 해적 같은 건 없겠죠?”
“보물지도가 있는 걸 보면 가능성이 농후해. 조심하는 편이 좋을 거야.”
통나무를 운반하던 전요한이 은근히 겁을 줬다.
시르케는 별 감흥 없다는 표정으로 막 낚은 물고기를 활옆수 잎에 담았다.
“해적들의 보물 따위보단, 관리소장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우선순위를 혼동하지 마세요.”
여기로 도망쳐온 것을 보면 녀석에게 분명 유리한 점이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은 최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각자의 일에 매진했다.
“후우… 이 정도면 얼추 된 것 같네.”
어느덧 완성된 임시 거처를 보며 전요한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해가 지는 시간대였고, 일행은 현재 식량을 확인했다.
“오호, 생선이 많은데?”
“낚싯대가 발견돼서 조금 잡아 봤어요, 의외로 잘 낚이던데요?”
시르케는 물고기가 가득 담긴 망태를 들고 있었다.
개중엔 제법 몸집이 실한 녀석들도 있어서 구워 먹으면 맛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생선만으로는 부족해. 이왕 확보하는 김에 다른 것들도 찾아보자고.”
망망대해로 나가게 되면, 며칠을 표류할 수도 있었다.
퇴역군인도 식량의 중요성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혼자서 돌아다닐 때 나무에 매달린 열매들을 봤습니다. 가서 채집해 오겠습니다.”
마침 열대림을 탐험하기에 적합한 마체테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먼저 떠나자, 전요한은 턱에 손을 얹었다.
“그렇다면 나는 해변가를 더 돌아다녀 봐야겠군.”
시르케는 물고기만 잡느라 한 곳에 머물러 있었다.
해변가엔 좌초된 선박을 비롯하여 다른 것들도 발견되었으므로, 마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저는 생선을 조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에게 맡기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요.”
여분의 생선들은 장시간 보관에 유리하도록 훈연해 두기로 했다.
시르케를 뒤로한 채, 전요한은 유유히 해변가로 떠났다.
주위를 두리번거린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는 생명체들이 눈에 띄었다.
게와 가재.
성체의 경우엔 몸집이 꽤나 커서 훌륭한 식재료로 보였다.
“어디 보자, 뭘로 잡아야 편하게 사냥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전요한은 착용하고 있던 황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무려 5천만 원이나 주고 산 유물이라서 되도록 아껴두고 있었던 건데, 이 정도 활용으로는 내구도가 깎이지 않을 터다.
치지지지직!
정신을 집중한 후, 마력을 부여하자 황금 반지로부터 강렬한 뇌전이 발생했다.
「체인 라이트닝」.
전격계 범위 마법이라서 눈부신 빛줄기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간다.
‘위력을 최대한 약하게 했는데도 이 정도네.’
너무 강렬한 뇌전은 대상을 태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분쇄시켜 버린다.
다행히 이번엔 기절시키며 조금 익히는 정도에 그쳤다.
“후우. 조금 달아올랐긴 하지만, 요리하는 덴 문제없겠어.”
전요한은 안심한 후, 미리 준비해온 자루에 게와 가재를 쓸어 담았다.
더 챙겨 갈 것이 없나 탐색을 계속하고 있을 때였다.
“치르르릇!”
석양을 등지고 비행하던 새 한 마리가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환익조.
놈은 혼자 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습성이 있는데, 그 포악함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건방지게 어딜!”
전요한이 눈을 번뜩였다.
허공을 올려다본 후, 예리한 부리를 앞세운 채 돌격해오는 환익조의 목을 낚아챘다.
“치릇!”
뜻밖의 반격을 당한 환익조가 당황하며 발버둥쳤다.
녀석의 모습을 내려다보던 전요한은 씨익 웃었다.
“네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 봐야 내 식량이지.”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환익조의 목이 보기 좋게 꺾였다.
푸드덕하던 양쪽 날개가 처졌고, 전요한은 휘파람을 불며 되돌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