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5화 (115/180)

제115화. 도시의 그림자 (5)

“이번엔 몽환의 환술사와 힘을 숨긴 연금술사의 경기네요.”

다음 차례를 확인하던 시르케가 제법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는다.

토너먼트가 계속되면서 어중간한 도전자들은 죄다 나가떨어진 상태.

경기를 치르는 자들의 수준도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음, 어느 쪽에 판돈을 걸래? 일단 네 의견을 들어보겠어.”

“아무래도 연금술사 아닐까요? 약점이라고 할 만한 점을 찾기 어려운 상대였잖아요.”

시르케는 전력이 확실히 증명된 자를 택했다.

몽환의 환술사는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모호한 점이 있는 탓이다.

그동안 그녀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은 소환수만으로 경기에서 이겨왔다.

“어디 보자. 승산이 얼마나 있을까나.”

잠시 저울질을 하던 전요한은 경기장을 바라봤다.

조그마한 소녀와 위압감 있어 보이는 백사자.

과연 겉보기엔 백사자 쪽이 몇 배는 유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섣부르게 판단하는 건 좋지 않아.’

환술사 소녀에게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미래시가 발동하고 나니, 누구에게 투자해야 할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럼 나는 환술사를 선택할래.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기대해 보겠어.”

“회심의 역베팅인 건가요? 당신의 판단을 존중하겠습니다.”

이로써 시르케와의 내기는 다시 한번 진행되었다.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인 후 경기의 흐름을 지켜봤다.

“그럼 결전을 개시하겠습니다!”

엄숙한 표정의 심판이 황금 뿔피리를 불었다.

이와 동시에 힘을 숨긴 연금술사는 날카로운 앞발을 치켜들었고.

스르르르―

몽환의 환술사는 기존의 소환수를 소환했다.

자연계의 4원소에 해당하는 상위 정령들.

이들을 적당히 활용하여 각각의 전투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그동안 보여 왔던 전법이다.

“역시 정령들을 또 참전시키는군!”

“하지만 그 녀석들이 마법 공학 병기를 제대로 활용하는 백사자의 상대가 될까?”

“환술사로서의 능력은 제법이지만 계속 똑같은 전법만 사용하면 파훼법이 생겨나기 마련이야!”

“저 작은 꼬맹이의 연승 행진도 여기서 막을 내리겠는걸?”

대다수의 관중은 연금술사가 이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형상변이자로서 지닌 야성적인 능력과 연금술사로서의 물질 변환 능력이 결합되었을 때의 파괴력을 그간 지켜봐 왔던 탓이다.

특히, 백사자의 형상으로 착용한 강화 외장은 멸망한 세계의 기계종을 떠오르게 했다.

피피피피픽!

환술사 소녀를 향해 돌격하는 연금술사.

녀석의 강화 외장에서 여러 개의 파츠가 떨어져 나와 허공을 비행했다.

이후 소형 요격기처럼 일직선의 마공포를 쏘아대는데, 조그마한 소녀에겐 큰 위협처럼 느껴졌다.

콰쾅쾅쾅―!

4원소의 상위 정령들은 필사적으로 그 요격을 방어해냈다.

하지만 전력으로 접근해오는 연금술사만은 어쩌지 못하고, 곤란한 몸짓을 보인다.

그렇게 환술사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것처럼 보였을 때였다.

순간, 기묘한 신기루가 생겨나며 괴수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환상종, 이프리트.

일명 화마(火魔)라고도 불리는 신화적인 소환수가 등장하자 관중석은 다시 한번 소란에 휩싸였다.

“저, 저거 이프리트 아냐?!”

“이프리트는 사실상 환수계의 끝판왕 아니야?”

“최상위 개체를 제외하면 거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연금술사에게 적지 않은 금액을 베팅했는데, 이거 어쩔 거야!”

백사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환수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이프리트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

잠시 후, 화려한 불꽃 소용돌이가 경기장을 집어삼켰고, 연금술사의 연전연승은 그대로 막을 내렸다.

* * *

“정작 중요한 내기에서 져버렸군요. 얼마를 버셨나요?”

풀이 죽은 시르케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전요한은 휴대폰 액정에 떠오르는 수익금을 확인했다.

“2천만 원인데? 연금술사에게 판돈이 몰리는 바람에 수익률이 엄청 높았어.”

아직 4강전도 아닌데, 이 정도의 돈을 벌었다는 건 대단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철우도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오늘 집에 가서 소고기 파티를 해도 되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그동안 이런저런 혼란이 지속되는 바람에 식자재 값이 많이 오른 상태였다.

전요한은 저번에 상업지구의 고급 음식점에서 지불해야 했던 비용을 떠올렸다.

“음, 그건 좀 고민해 볼게요.”

안 그래도 아까 골동품 가게에서 5천만 원짜리 유물을 일시불로 지르고 오는 길이었다.

많이 벌었다고 해도 당분간은 과도한 지출을 삼가야 한다.

“식자재 가격이 폭등했다면, 야생 환경의 던전에서 수급해오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식은땀을 흘리는 전요한에게 시르케가 조언을 해왔다.

남철우는 좋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요새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희귀 광석이나 가죽 등을 챙겨오는 것이 유행입니다.”

이들은 공략조에게 분담 비용을 지불한 후 탐색과 채집에만 집중한다고 한다.

“천연자원만으로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도 있다니, 재미있네.”

숨겨진 유물을 채굴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조금은 간과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조만간 시도해 봐야겠다며 두 사람이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혹시 「고인물」과 「대마법사」이십니까?”

대기소로 찾아온 검은 정장의 사내가 신원을 물었다.

“그런데요?”

“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 잠시 시간을 내어주시지요.”

조금은 이상한 접선이었다.

4강전 출전을 기다리고 있는 전사들에게 개입해 오다니.

수상쩍은 낌새를 챈 시르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관중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니 슬슬 구린 짓을 할 속셈이로군.’

위원회로부터 의뢰받은 임무는 바로 그 승부 조작에 관한 것이었다.

내부 비리를 파헤치기 위해, 두 사람은 순순히 검은 정장의 사내를 뒤따랐다.

보안이 삼엄한 통로를 거쳐서 상층부까지 도달하자, 화려한 장식의 출입문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소장님께서 머무르는 집무실입니다. 어서 알현하시지요.”

검은 정장의 사내는 밖에서 기다릴 셈이었다.

전요한은 당당한 걸음으로 앞서 들어갔다.

최고 관리자의 영역답게 내부에는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갖춰져 있다.

“당신들이 이번 경기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한다고 들었소.”

관리소장은 자기소개도 없이 대뜸 용건부터 말했다.

시르케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건성으로 물었다.

“무슨 용건이죠?”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건데 한 가지만 약속해 주셨으면 하오.”

앞으로 주고받게 될 대화에 대한 비밀 유지.

어떤 일이 있어도 외부로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요? 저희는 상금을 받으러 온 것일 뿐인데요.”

굳이 협상에 응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승부 조작을 한다는 증거를 확보해야 했으므로, 멋모르는 척 연기하기로 했다.

“물론 그렇겠소만. 실은 더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오. 관객들도 더 좋아할 테고.”

관리소장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뒷장난질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4강전에 오를 만한 실력자들끼리 적당한 연기를 하며 긴장감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최종 우승자를 미리 내정해둔다는 말씀인가요?”

시르케가 놀란 척 입을 가리며 물었다.

그러자 관리소장은 진정하라며 손을 들어 보인다.

“너무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건 단지 관중들에게 최고의 쇼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니까.”

단순히 최고의 실력자를 가려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런 무대는 점차 매니악해지고, 압도적인 실력 차에 의해 볼거리가 점차 사라진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콜로세움의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관리소장은 적절한 긴장감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즉, 저희보고 「용병왕」에게 아까운 차이로 패배하는 역할을 연기해달라는 건가요?”

“그렇소. 이제 막 콜로세움에 모습을 보인 자네들보단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니까.”

“상품으로서의 가치?”

“인기도를 말하는 것이오. 요새 용병왕을 컨셉으로 하는 웹툰도 제작되고 있단 사실을 아시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일반인에게 있어, 영웅적인 이능력자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콜로세움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절대자.

무패전승으로 유례없는 기록을 달성해가는 용병왕의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회자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용병왕을 계속 키워서 만화책도 만들고 피규어, 게임 콜라보 같은 걸로 사업을 확장 하겠다?”

잠자코 듣기만 하던 전요한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지금껏 큰 대가 없이 곤란한 재해를 도맡아서 처리해왔던 그였기에, 이런 식의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영웅상은 특히나 역겹게 느껴진다.

“어디까지나, 용병왕이 계속 인기를 구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말한 것일 뿐이오. 그대들도 기다리면 기회가 올 터이니 미리 줄을 대는 편이 현명할 거요.”

일단은 자신에게 협조하면서 콜로세움에서의 인지도를 높여가라는 제의였다.

그러다가 스타성이 확보된다면, 언제든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겠다는 것이 관리소장의 입장이다.

“그럼 지금까지 용병왕의 활약 스토리는 당신이 전부 구상해낸 건가요? 몇몇 이들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극적으로 역전을 한 경우도 있던데.”

시르케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의 질문을 덧붙였다.

그러자 관리소장은 허허 웃더니, 검토 중이던 자료들을 모니터에 띄웠다.

“관중들의 심금을 울릴 만한 스토리는 그렇게 쉬이 짤 수 있는 게 아니오. 그래서 매번 유명 작가에게 외주를 줘서 각본을 만들고 있소.”

모든 것이 치밀하게 짜여진 조작극이었다.

이미 충분히 내부 비리를 밝혀냈다고 생각한 전요한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멜리사 씨. 잠입 임무는 끝났어요. 이제 실력 행사에 들어가야 하니까 협조 좀 해줘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이들을 상아탑으로 끌고 가서 들으면 될 일이었다.

두 사람의 태도가 일변하자 관리소장은 잠시 당황했다.

“흥미 있다는 듯이 듣더니, 왜 갑자기 이러는 것이오? 이건 나의 재량권으로 행해지는 일이니 외부의 간섭은 사절이오!”

창문 쪽으로 뒷걸음질 치면서 벽면에 숨겨진 버튼을 누른다.

그러자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무더기로 몰려와서 주위를 둘러쌌다.

“한판 붙자는 거야? 마침 심심했는데 사양하지 않겠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전요한이 주먹을 들어올렸다.

그러고는 덤벼드는 사내들을 하나둘씩 가볍게 쓰러뜨리기 시작한다.

시르케도 마법을 이용하여 돕자, 전황은 압도적으로 흘러갔다.

“비, 빌어먹을.”

패색이 짙어지는 것을 보며 관리소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서랍을 뒤적이더니, 권총과 자수정 형태의 유물을 꺼냈다.

“이걸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자수정을 창가의 벽면에 부딪혀 박살 냈다.

그러자 뜻밖의 이변이 발생했다.

“응?”

갑자기 생겨난 던전 게이트에 전요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연금술에도 능통한 시르케가 간략하게 설명을 해준다.

“저건 일종의 통행권 같은 것입니다. 차원 도약을 위한 매개체인데, 마법 술식을 사용하지 못해서 무식하게 박살 내는 식으로 발동시킨 거죠.”

정황상 관리소장도 죄악의 사도로 보였다.

대부분 이런 던전의 주인은 마족이니까 말이다.

사내들을 전부 쓰러뜨린 후, 전요한은 게이트 너머를 응시했다.

“그럼 놈을 찾으러 가자! 이대로는 되돌아가봤자 돈을 받아내지 못해!”

위원회로부터 받은 임무를 완수하려면 관리소장이 필요했다.

이윽고 전요한은 시르케의 손을 잡고 게이트로 몸을 날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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