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4화 (114/180)

제114화. 도시의 그림자 (4)

“파비안이 패배했다고?”

“그것도 일격에?”

“저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뭐야?”

관중석에서 떠들썩한 잡음이 일었다.

그리 대단해보이지도 않던 애송이가 뜻밖의 전과를 올리다니.

분명, 종합 능력치도 30은 차이가 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내가 유명인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전요한은 조금 씁쓸한 감정을 느꼈다.

그동안 골치 아픈 사건들을 많이 해결하고 다녔는데,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덕분에 이런 곳에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긴 하지만.

“가뿐한 승리였군요. 첫 출전에서부터 이 정도라니, 장래가 기대되는 걸요?”

대기소로 돌아오자 자신을 사제라고 소개했던 여인이 웃으며 윙크를 했다.

전요한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펴보였다.

“어서 4강전까지 진출하고 싶네요. 그래야 흥미진진할 텐데.”

이번엔 용병왕이란 자가 유력한 우승 후보라고 들었다.

과연 놈이 승부 조작에 연루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생각보다 제법 하던걸요? 하지만 여기엔 숨은 강자들이 많으니까, 너무 자만하진 마세요. 당신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니까요.”

병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가리키며 남철우가 조언했다.

그는 전요한의 머리 위에 떠있는 종합 능력치를 다시금 확인해 보았다.

130.

용병왕은커녕, 4강전의 주력 인물들도 상대하기 버거울 것 같았다.

“그것이 자만일지, 아닐지는 지켜보면 알게 될 겁니다. 아무튼, 이제 제 차례인 모양이군요.”

잠자코 기다리던 시르케가 몸을 일으켰다.

전요한은 그녀를 향해 엄지를 척 올렸다.

“빨리 끝내고 와. 설마 고전하지는 않겠지?”

“저를 뭘로 보시는 건가요. 캣시가 거들어줄 필요도 없습니다.”

시르케는 당당하게 말한 후 결전장으로 향했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현장에 있는 심판이 결전 개시를 알렸다.

상대는 희귀한 직업군에 속하는 사령술사.

곧장 여러 마리의 망자를 소환해낸다.

“오오, 저건 뭐지?”

“제법 강력한 개체들만으로 소환했군. 상대가 수준급의 마법사인 만큼 시간 끌지 않을 셈이야!”

“제길, 저쪽에 베팅을 할 걸 그랬나? 왠지 물량 승부로 이길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아니야, 소환수가 많아 봤자 사령술사만 제압하면 끝이라고!”

관중석의 열기가 한층 달아오른다.

청명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어둡게 변했고,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상대가 암 속성의 마력역장을 펼친 탓이었다.

“귀찮은 일들을 벌이는군요. 주위에 어떤 피해가 생길지 모르니 빠르게 승부를 내겠습니다.”

시르케가 마음에 안 든다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에 상대는 흉악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과연 가능할까? 이 몸을 상대로 말이지.”

사령술사의 진정한 전력은 소환하는 망자의 수준에 달려 있었다.

위세를 부릴 셈인지 어디선가 얻은 유물을 꺼내 든다.

마검 스톰브링어.

그것을 매개로 하면 폭풍의 군주, 란델을 소환할 수 있었다.

콰광–!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이후 자욱한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란델.

비록 망령에 불과할지라도 그 전력은 상당했다.

“이세계의 영웅을 불러낸 건가요? 그렇다면 저도 소환수로 맞서드리죠.”

의기양양한 사령술사를 바라보던 시르케가 마법을 영창했다.

푸른 마법진이 펼쳐지며 에테르 정령군주까지 등장하자, 관중석은 혼란에 휩싸였다.

“잠깐, 이제 겨우 16강이었던 것 아니었어?”

“초반부터 강적끼리 맞붙은 모양이네.”

“역시 콜로세움엔 숨은 강자들이 많아. 4강에서 본 얼굴도 아닌데 둘다 엄청나잖아?”

승부 예측을 하는 베팅은 어느 쪽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광판의 숫자를 보며 시르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제가 이런 신세로 전락했는지 모르겠군요.”

한때는 왕도 이도니아의 대마법사라고 불렸던 그녀였다.

모두를 위협하는 마룡을 물리쳤고, 대륙 최초로 5성급의 영계 마법을 깨우쳤다.

비록 지금은 성장치가 줄어들긴 하지만 웬만한 상대는 가볍게 찍어 누를 자신이 있다.

스르르르!

에테르 정령군주와 함께 시르케의 영력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어렵다 느낀 마검 스톰브링어가 부르르 몸을 떤다.

덕분에 배후에서 여유롭게 지켜보던 사령술사까지 당황하게 되었다.

“뭐야, 스톰브링어! 고작 이런 상대에게 기세가 눌리면 곤란하다고!”

다급해졌는지 억지로라도 능력을 끌어내는데, 이로 인해 시커먼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친다.

이를 흡수하여 눈부시게 빛나며 마력을 개방하는 스톰브링어.

그 주인인 란델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방 승부다! 내가 자랑하는 필살의 결전기를 보여주지!”

지금 그가 펼치려는 건 그가 자랑하는 성명절기인「환영검무」였다.

이세계의 영웅인 만큼 쉽게 당해주진 않을 생각인 것 같았다.

사사사사사삭!

허공에 소환된 수많은 환영검들이 화살 비처럼 지면에 내리꽂힌다.

제법 그 위용이 보기에 살벌했으나 시르케에게 있어선 큰 위협은 되지 못한다.

스삭!

에테르 정령군주가 칼바람처럼 스쳐지나가자, 마력역장이 충돌하며 주위의 환영검이 형체를 잃어버렸다.

기세 면에서는 시르케가 압도적인 상황.

당황한 사령술사는 란델에게 자신의 마력을 한계치까지 불어넣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생명력이군. 그럼 기대에 부응해볼까.”

기회를 엿보던 란델이 풀 차징 된 스톰브링어를 휘둘렀다.

이후, 양쪽의 마력역장이 충돌하며 기괴한 공명음을 일으킨다.

키링!

지켜보는 관중들조차 숨죽일 만큼의 긴장감이었다.

“과연 마검은 우습게 볼 만한 물건이 아니군요.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수호 결계로 방어 중인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다시금 마법 영창을 시작하자 란델은 서둘러 결계를 파훼하려 했다.

“어디서 감히 내게 큰소리를 치는 것이야! 네년 따위는 100만 년을 수련해도 한낱 애송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잠시 물러나 있던 에테르 군주가 다시금 공격을 시도해온다.

사아아아악!

창백한 번뜩임이 발악하는 란델을 단번에 삼키듯 덮쳐들었다.

“크윽…!”

궁지에 몰린 란델은 방어에 전념해야 했다.

그동안 영창을 마친 시르케가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100만 년이라고요? 농담이 지나치시군요.”

검술이라면 모를까, 마법이 허용되는 전투에서 자신이 패배할 일은 없었다.

이윽고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들어 소용돌이치자, 란델은 눈을 크게 떴다.

“뭐, 뭣?!”

생전에도 이만한 수준의 영계 마법은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욕지기를 내뱉으며 격류에 휘말려야만 하는 처지.

뒤얽히며 휘감기는 영혼의 울부짖음은 주위의 모든 것을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얼마 후, 란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 비장의 카드가 이렇게 어이없이 당해 버리다니.”

더는 승산이 없다 판단한 사령술사가 제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사실상 패배를 인정한 상황.

관중석으로부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정말 대단해!”

“역시 저 여마법사에게 베팅하길 잘했어!”

“판돈은 잃었지만 그 손실조차 아깝지 않은 경기였어!”

“이 정도의 기세라면 준결승까진 간단히 진출하겠는걸?”

마법 연출이 괜찮았던 탓인지, 전요한이 승리했을 때보다도 더 뜨거운 반응이었다.

* * *

“애송이를 상대로 너무 고전하던걸?”

소파에 기댄 채로 기다리던 전요한이 장난조로 놀렸다.

유치한 도발이라 여겼기에 시르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상대가 마법사라서 마법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상성에 맞게 응전하다보니 조금 과했을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녀와 만나지 않았다면 4강전 정도는 진출했을 상대였다.

전요한도 그 점은 인정해 주기로 했다.

“사령술사치곤 오래 버티긴 했지. 실력이 전혀 없진 않았어.”

“그건 그렇고, 한동안은 여기에서 다시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대진표를 보니 우리는 4강전이 확정이더군요.”

시르케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후 허브티를 홀짝였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은 부전승이 많은 편이라 손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도 심심한데 베팅이나 해볼까? 여기에 있어도 그건 가능하잖아.”

“좋습니다. 음, 이번엔 마녀의 기사와 힘을 숨긴 연금술사의 단판 승부네요.”

각자의 전력에 대해서는 아직 세간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전요한은 고민하다가 마녀의 기사에게 판돈을 걸었다.

그러자 시르케는 힘을 숨긴 연금술사에게 동일한 판돈을 내건다.

“그럼 지켜보죠. 어느 쪽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지.”

결전장에선 두 사내가 마주하고 있었다.

곧이어 경기가 시작되자 흑색의 판금 갑옷을 걸친 기사가 전투마에 올라탔다.

이힝!

이후 고삐를 당기고는 연금술사를 향해 전력 질주하는데, 그 기세가 만만치 않다.

“그대로 들이받아 버려!”

“연금술사 주제에 힘을 숨겨봤자 뭘 어쩌겠다고!”

“전면전에서는 역시 기사가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지!”

“연금술사는 기껏해 봐야 비약이나 만들어 뒀겠지! 아니면 주위에 함정이라도 설치해 뒀든가!”

마녀의 기사를 응원하는 관중들이 완전한 승리를 예감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한편, 힘을 숨긴 연금술사를 응원하는 쪽에서는 정반대의 의견을 내놓는다.

“상대의 패도 확인 안 하고 무작정 달려들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군!”

“연금술사가 그렇게 돌격할 걸 예상 못 했을 리가 없지!”

“얕보여서 빈틈을 이끌어낸 다음에 역관광을 하려는 전략임이 분명해!”

“과연 누가 이길지 한번 지켜보자고!”

단순히 논리만 따져서는 전혀 승패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하지만 시르케는 누가 이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히히힝!

연금술사에게 머리를 들이받으려던 전투마가 순간 놀라서 옆으로 경로를 틀었다.

이에 기사를 응원하던 관중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고, 그 의아함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콰앙!

실신한 전투마가 모래 위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졌다.

덕분에 볼품없이 낙마한 기사가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무슨 짓을 벌인 거냐, 네놈!”

기사는 아직도 연금술사가 꺼내 든 패를 읽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대신 고생한다더니, 역시 기사란 작자들은 전부 단순무식하군.”

가만히 서 있던 연금술사는 기사를 향해 조롱을 해댔다.

그러고는 거대한 백사자로 형체를 변환하는데, 이를 본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힘을 숨겼다는 말은 설마 야수계의 형상변이자란 의미였나?”

“이,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저 모습으로 연금술사의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지?”

“글쎄, 미리 숨겨둔 비약이라도 먹지 않을까?”

연금술사의 정체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점차 수세에 몰리는 기사를 내려다보며 전요한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겠는걸?”

“여전히 감이 부족하군요. 허세만 가득한 자였는데 말이에요.”

시르케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마녀의 기사가 더는 버티지 못했는지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고는 일어서지 못하고 머리를 지면에 처박는다.

힘을 숨긴 연금술사의 완벽한 승리.

오기가 생긴 전요한은 옆에 있는 시르케를 쳐다봤다.

“한 번 더 해!”

이번엔 승부 예측을 위해 미래시를 활용할 생각이었다.

방금 전의 경기에서 그 능력이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정신을 집중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