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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3화 (113/180)

제113화. 도시의 그림자 (3)

백화점에서의 쇼핑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통장 잔고가 위험하긴 했지만, 앞으로도 충분히 벌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학원도시는 이능력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고수익을 제공하므로.

“여기인가.”

전요한은 높이 솟아 있는 콜로세움을 올려다봤다.

군사구역의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 경기장인데, 이런 건 또 언제 지었나 싶다.

“이번 의뢰를 진행할 목적지군요. 예상대로 규모가 크네요.”

시르케가 감상을 말했다.

그녀는 위원회장으로부터 받은 쪽지를 꺼내서 다시 읽어 봤다.

“이곳의 실력자들이 얼마나 강한진 모르겠지만, 의심받고 있는 혐의가 별로 좋진 않네요.”

지금부터 두 사람이 조사하려는 것은 콜로세움의 부정 경기였다.

여기선 이능력자들이 상금을 두고 서로 맞붙는데, 그에 걸린 판돈의 액수가 상당하다.

“일부러 승부 조작을 해서 부당 이익을 챙긴다 했었지? 확실한 증거를 잡아서 혼쭐내 주자고.”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는지 전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잠입 수사를 하려면 실제 경기에도 출전해야 하는 탓이다.

만약 우승을 차지할 경우엔, 판돈이 모이는 정도에 따라 10억이 넘는 상금까지 받을 수 있다.

“아무래도 일대일하고 이 대 이가 가장 인기 많다고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하실 건가요?”

출전방식을 놓고 시르케가 의향을 물었다.

“당연히 일대일이지. 배경무대도 콜로세움이니, 그게 더 전통적이지 않겠어?”

전요한은 혼자서도 충분하다며 단일 출전을 고집했다.

시르케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뭐, 대회 상금 같은 건 나눠 가지기엔 조금 아깝죠. 그럼 사양 않고 제가 독차지하겠습니다.”

고가의 의류품들을 여럿 사들이는 바람에 통장 잔고가 바닥난 시르케였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어디선가 검은 차량이 다가와서 두 사람의 옆에 멈춰 섰다.

“이런, 잠입 임무에 제가 빠져서는 곤란하죠.”

관리국의 특수요원, 멜리사였다.

그녀는 잠시 뭔가를 알아본다고 한동안 자리를 비웠었다.

“용무는 마치신 건가요?”

“네. 일단은요.”

구체적인 내용은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평소보다 말을 아끼는 멜리사를 향해 전요한이 쇼핑백들을 내밀었다.

“우선 받아주시죠. 이걸 계속 들고 다니기는 힘드니까요.”

안 그래도 전용 기사를 부르려던 참이었다.

쇼핑백에 담겨있는 물품들을 본 멜리사가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이제 좀 돈을 쓸 여유가 생기셨나 봐요?”

그동안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을 뿐, 일상생활에선 별다른 지출이 없었던 전요한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구로 돌아오고 나서 너무 팍팍하게 살아온 것 같아요. 귀찮은 일들이 자꾸 발생해서.”

앞으로는 자신의 인생에도 투자하면서 지내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후, 전요한은 콜로세움의 입구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경기 관람하러 오셨나요?”

매표소의 여종업원이 밝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접했다.

“아니요. 대회에 참가하려는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음… 우선 계약서의 내용을 자세히 읽으신 후 자필로 작성해 주세요.”

여종업원은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계약서는 신중하게 작성해야 했으므로 두 사람은 위에서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별 내용은 아니군요. 경기 도중에 다치거나 할 경우의 보험 처리가 핵심이에요.”

시르케는 출전 당사자에게 중요한 요점을 짚어냈다.

무리한 시합 진행으로 사망하더라도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건데, 과연 실력지상주의 학원도시다웠다.

“나는 보험 따윈 들지 않겠어. 어차피 크게 다칠 일도 없을 테니까.”

“저도 잔금이 많지 않아서 이건 넘어가겠습니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싸우면 문제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잡한 보험 문제는 간단하게 생략했다.

그러자 여종업원은 의외라 여겼는지 다시 한번 질문을 해왔다.

“오늘은 「용병왕」도 출전하는 날입니다. 치열한 경합이 예상됩니다만, 그래도 괜찮으세요?”

용병왕은 몇 주 전부터 콜로세움의 챔피언으로 군림하고 있는 자의 별명이었다.

여기서는 굳이 본명을 쓰지 않아도 되므로, 이런 식의 호칭이 통용되는 것에 다들 큰 거부감이 없다고 한다.

“아아, 누구든 상관없어요. 어서 출전하게만 해주세요.”

전요한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시르케도 별말 없이 가만히 있자 여종업원은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전용 기사를 부르신 모양인데, 계속 머무르게 할 생각이라면 주차장으로 보내주세요. 지금은 한가하지만 곧 관중이 밀려올 거니까요.”

콜로세움의 경기는 초저녁 즈음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멜리사를 여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으로 보냈다.

“주차시켜 놓고 관중석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요. 판돈은 누구에게 걸어야 할지 알고 계시죠?”

“물론이에요. 덕분에 용돈벌이 좀 하겠군요.”

멜리사 또한 마침 은밀하게 사용할 자금이 필요했던 차였다.

그녀가 차량을 이끌고 사라지자, 두 사람은 콜로세움의 내부로 향했다.

“대회 참가자는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그곳에서 안전교육을 받고 스트레칭하시면 돼요.”

여종업원은 매표소의 자리를 지켜야 해서 뒤따라오진 않았다.

전요한은 기다란 통로를 따라 앞서 걸었다.

벽면에 설치된 횃불들이 고대 콜로세움의 느낌을 살리며 제법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생각보다 투자를 많이 했군요. 위원회에서도 원형 경기장에 많은 기대를 하나 봅니다.”

시르케는 이곳에 쏟아부은 자금이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콜로세움은 학원도시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이능력자들의 경쟁을 부추겨서 학원도시의 실력지상주의를 부각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차별받는 일반인들에겐 매일 특별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를 제공해 줌으로써 불만을 가라앉히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콜로세움은 상아탑과 아카데미에 다음가는 상징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겠네요. 곧 있으면 초저녁이니까요.”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느라 시간이 제법 흘러 있었다.

이윽고 탁 트인 공간이 나오자 시르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합에 참가할 예정인 자들이 머무르는 대기소.

늦게 도착한 편이라서 인파가 몰려있었다.

“이봐요, 처음 오셨죠?”

훈련교관처럼 보이는 사내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아카데미의 인물은 아니고, 초면이었다.

“네, 그런데요?”

“기본적인 안전교육을 실시하겠습니다. 전부 듣고 난 후엔 자유시간이니 귀찮아도 잘 새겨둬요.”

사내의 이름은 남철우였다.

나름 괜찮은 중형 길드에서 일하다 왔는데, 이곳 생활도 나쁘지 않은 편이라고 했다.

“아무튼, 경기가 시작되면 저기 있는 사제가 특수 보호막을 걸어줄 겁니다. 그게 깨지는 순간 시합에서 지는 거예요.”

보호막이 사라졌음에도 고의적으로 경기를 계속하면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러한 피해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보험 처리도 되지 않으니, 무리한 승부욕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알겠습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전부인가요?”

“네, 이제부터는 스트레칭을 하거나 워밍업을 하셔도 됩니다. 저기에서 잠시 휴식을 취해도 되고요.”

남철우는 구석의 소파와 침대를 가리켰다.

한쪽엔 응급 환자를 위한 의료시설도 갖춰두고 있다.

전요한은 출전 전까지 시르케와 함께 조용히 앉아 있기로 했다.

“불필요하게 힘을 뺄 필요는 없겠지.”

“저도 마나를 아껴둬야 합니다. 예전처럼 보유량이 충분하진 않으니까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르케는 허브차를 마셨다.

그러고는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리더니 흑묘 캣시를 소환했다.

“니야아옹.”

캣시는 마법 생명체라서 이런 식으로 모습을 감춰두는 것도 가능하다.

“저기요, 애완동물은 출입 금지입니다. 고양이 털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도 있거든요.”

뜻밖의 울음소리에 당황한 남철우가 다가오며 말했다.

“이 아이는 저와 함께 싸울 겁니다. 제 전투를 보조할 펫이라서요.”

시르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 위의 캣시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남철우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출전에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그럼 주위에 양해를 구해 두겠습니다.”

전투형 펫을 대동하고 나온 출전자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남철우가 다시 찾아와서 전요한을 불렀다.

“무대로 나올 차례이십니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앞서의 시합이 너무 시시하게 끝난 탓에, 차례는 예상보다 빠르게 돌아왔다.

“물론이죠.”

착용 중인 황금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전요한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콜로세움의 결전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 * *

“이번에는 어디서 기어 나온 애송이지? 시시한 싸움이 될 것 같군.”

서슬 퍼런 대검을 소환하며 금발 사내가 으스댔다.

겉보기에도 상위 등급의 무구여서 관중석의 기대감이 수직 상승했다.

“오오, 저 녀석 3연승으로 올라온 녀석이잖아?”

“이름이 파비안이라고 했지? 본국인 프랑스에서도 나름 네임드였다던데.”

“나는 녀석에게 걸었어! 기대치만큼은 아니지만, 상대가 너무 약해 보이잖아.”

들려오는 말들에 의하면, 전체적인 베팅은 파비안에게 더 무게감이 실린 듯했다.

전요한은 관중석에 앉아 있는 멜리사를 향해 엄지를 척 올렸다.

오늘 돈 좀 많이 벌겠다는 의미다.

“어딜 쳐다봐? 여기가 지금 할리우드 액션이나 하면서 B급 영화 찍는 곳인 줄 알아?”

자신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자, 파비안이 발끈했다.

그는 기세 싸움을 벌이기 위해 곧장 대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스르르르!

멋모르는 관중들이 보기엔 나름 위압감이 느껴지는 검기였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네가 그렇게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야.”

전요한은 코웃음을 친 후 상대에게 도발하는 몸짓을 했다.

그러자 파비안은 피식하고 웃으며 또 훈계를 늘어놓았다.

“애송이, 기개는 좋다만 닉네임이 「고인물」이 뭐냐? 종합 능력치도 그것밖에 안 되는 게.”

파비안의 시선은 전요한의 머리 위에 표시된 130을 향해 있었다.

대회 참가자는 특수한 소형 장비를 착용하는데, 그로 인해 종합 능력치가 모두에게 공개되었다.

관중들이 시시하게 여길 만한, 부적절한 매칭 업을 최대한 방지하겠다는 이유에서다.

‘내 스탯?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

멋모르고 까부는 파비안을 향해 전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상태창을 들여다봤다.

[전요한]

기본 성급 : ☆☆☆☆

보유 특성 : 환생자 (3회 차)

종합 능력치 : 130 (+175)

특화 소질 : 성장가속, 마력재생, 절대면역, 미래시

환생으로 인한 보너스 스탯까지 합치면 종합 능력치는 현재 305에 달한다.

국내 서열 1위인 채강윤이 200이었으니, 그 수치는 누가 봐도 경악할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전투력 측정 장비는 이것을 반영하지 못해서 전요한이 그럭저럭 만만한 상대인 것처럼 위장해주고 있다.

“아무튼, 한 방에 보내줄 테니 어서 집에 돌아가서 발 닦고 자라. 우승 상금은 내가 차지할 테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파비안은 기세 좋게 돌격해왔다.

관중석의 일반인들이 숨죽여 지켜볼 정도로 위압적이었으나.

티잉!

지금의 전요한에게 있어선 눈 감고도 상대할 만한 수준에 불과했다.

간단한 기본 동작만으로 매서운 일격을 튕겨내자, 파비안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크윽!”

“미안하지만 너의 제물이 되어줄 순 없어. 아직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할 생각도 없고.”

촤아아악!

사선으로 휘두른 궤적을 따라 한차례 푸른 검격이 몰아쳤다.

이윽고 흉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한쪽 무릎을 꿇는 파비안.

단 일격에 그의 주황색 보호막이 사라지자, 관중석에서는 경악에 가까운 소동이 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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