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도시의 그림자 (2)
“이번엔 조금 특이한 의뢰군요.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한 기분입니다.”
함께 상아탑을 빠져나오며 시르케가 말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굳이 우리가 나서야 하나 싶기는 해. 하지만 심심풀이로는 나쁘지 않겠지.”
위원회로부터 받는 보수도 꽤나 짭짤한 편이었다.
저번 사건을 무사히 해결했다면서 일시불로 각자 1억 원씩을 입금받고 오는 길이다.
언젠가 깨부숴야 할 놈들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악마 숭배자들의 배후를 끝내 밝혀내지 못했단 점은 좀 아쉽긴 합니다. 분명 원로원의 누군가가 연루되어 있다고 했을 텐데요.”
시르케는 여전히 찝찝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전요한이 검은색 VIP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건 그렇고,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쇼핑이라도 하는 게 어때? 돈을 벌었으면 적당히 써야지 않겠어?”
학원도시에서만 통용되는, 최상위 계층의 상징이다.
금융을 제외한 모든 상거래에서 30% 할인 혜택을 받고, 매번 5%의 포인트가 누적된다.
이외에도 다양한 특전이 있는데, 귀족 예우를 해주기 위한 편의라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노예라도 될 셈인가요? 우리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학원도시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특혜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며 시르케가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전요한은 생각이 조금 다른지 그녀를 계속 설득하려고 했다.
“어느 정도는 사치스러운 귀족적인 삶을 즐겨야 그 녀석들도 안심할 거야. 어차피 충분한 조사를 하기 전엔 함부로 나서기 어렵잖아?”
연이어지는 재해의 흑막인 원로원을 상아탑에서 끌어내려면 죄목이 필요했다.
막무가내로 최상층까지 쳐들어가는 선택지도 나름 고려해볼 만하지만.
‘그러면 학원도시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무고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전요한은 원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혐의를 밝혀낸 후 행동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라 판단한 것은 그 탓이었다.
“후우,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는 수 없겠군요. 마침 상업구역을 지나치는 경로이기도 하고요.”
한숨을 내쉰 시르케가 휴대폰으로 위치정보를 들여다봤다.
현재 자신들은 학원도시의 중심부를 막 벗어나는 중이다.
이대로 상업구역을 거쳐서 군사구역으로 가는 것이 목적지까지의 최단거리였다.
“그럼 사치 좀 부려 볼까? 고생은 충분히 했으니 막간을 이용해서 주어진 혜택을 누려야겠어.”
상업구역에서 들러야 할 장소는 머릿속에 곧장 떠올랐다.
최상위 계층과 귀빈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는 일류 백화점.
거기엔 온갖 진귀한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들었다.
‘다른 애들하고도 함께 가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았다.
각자의 사정으로 잠시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 부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곁에 있는 시르케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여기가 바로 그곳인가요?”
시르케가 눈앞의 화려한 건축물을 올려다봤다.
상아탑만큼 높진 않지만, 제법 층계가 많고 입구에서부터 보안이 철저했다.
“주눅 들 필요 없어. 저들에게 있어 우리는 VIP 고객이니까.”
전요한은 무심코 내부로 들어가려 시도했다.
이를 본 보안 직원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
“죄송하지만, 함께 오신 숙녀분과 함께 신분을 증명하여 주십시오.”
최상위 계층의 일부는 보디가드를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무런 호위도 받지 않는 두 사람을 의심한 것이다.
“자, 이거면 됐습니까?”
“아, 네네. 결례를 범해서 죄송했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전요한이 검은 카드를 꺼내 들자, 보안직원은 태도가 황급히 바뀌었다.
녀석을 지나치면서 시르케는 재미있단 표정을 지었다.
“마치, 왕실 연회장의 입구를 지키는 호위기사 같군요.”
신체강화 계열의 이능력자였기에 적절한 비유였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좌우로 도열해 있는 프런트 직원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정숙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채,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최상위 계층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보니, 서비스 면에선 과하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런 식의 단체 인사는 이도니아 왕궁에서 지내던 이후로 처음이군요.”
시르케는 적잖이 어색하단 표정을 지었다.
처음 궁정 마법사가 되었을 때, 한 자리에 모인 기사들이 예를 표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벌써부터 놀라면 곤란한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전요한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사전 조사를 해둔 덕분에 그는 이곳에 대해 이해도가 있는 편이었다.
“대체 뭘 사려는 건가요? 당신의 의도를 알기 어렵군요.”
시르케는 신기한지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그녀를 데리고 전요한이 처음 향한 곳은 여성 의류점이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화사한 외모의 종업원이 두 사람을 맞이했다.
“이 녀석에게 어울리는 옷을 추천해 주세요. 평상복이든, 예복이든 가리지 않고요.”
“어디 보자, 정말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시군요. 이번 신상인데 한번 봐 보실래요?”
종업원은 시르케를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분홍색 드레스 하나를 가져왔다.
연회장에서 입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가격이 무려 3천만 원이나 했다.
“자, 장난인 거죠? 비싼 건 둘째 치고 저보고 이런 옷을 입으라니.”
예상대로 시르케는 안절부절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 침착함을 유지해왔던 그녀였기에 전요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왜? 너도 이런 거 제법 어울린다고.”
“시선이 너무 집중되어서 부끄러울 것만 같습니다. 좀 더 이지적으로 보이는 복장은 없는 건지요?”
“여기선 과감하게 매력을 돋보이는 패션이 인기가 많아. 그리고 드레스 하나 정도는 마련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어?”
언젠가 이쪽 세계로 데려오면, 꼭 공주님 드레스를 입혀 보겠다 결심했던 전요한이었다.
곁에 있는 종업원도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호감 어린 반응을 보인다.
“남자친구분의 말씀이 옳으세요. 고객님은 희귀하면서도 신비한 미안을 지니셨어요. 이 정도의 드레스는 걸쳐줘야 그 가치가 인정받는다고 할 수 있죠.”
“…으으.”
낯이 달아오를 정도의 립서비스에 시르케는 미간을 짚었다.
계속해서 전요한을 남자친구라 말하는 것도 신경 쓰인다.
결국 그녀는 소심하게 자신의 카드를 내민다.
“포인트는 확실히 적립 부탁드립니다.”
“물론이에요. 다른 옷들도 더 불러보세요, 고객님.”
종업원은 해맑은 표정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렇게 해서 쇼핑백 여러 개를 들고 만 시르케.
잔뜩 주눅 든 그녀의 어깨를 전요한이 두드려줬다.
“너무 걱정하지 마. 돈은 또 벌면 되잖아?”
“…다음엔 이런 식의 소비는 지양하겠습니다.”
이쪽 세계에서 입고 다닐 옷이 부족했단 것으로, 시르케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이후 전요한도 적당히 걸칠 옷을 구입했고, 자연스레 다음 층계로 향하게 되었다.
“어머,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
한쪽 매장에서 익숙한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알리사.
예전에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던 여주인이었다.
“이곳에 입점하다니, 나름 출세하셨네요?”
“뜻밖의 제의를 받아서요. 아무튼, 단골 손님이셨으니 디스카운트는 충분히 해드릴게요.”
입가에 검지를 댄 알리사는 한쪽 눈을 윙크해 보였다.
전요한은 그녀를 따라서 전시된 물품을 한 차례 훑어봤다.
‘확실히 저번보다는 쓸 만한 것들이 많이 들어왔네.’
최상위 계층의 기호와 수집욕을 맞추기 위해 들여온 품목이었다.
전부 이세계의 유물들이고, 개중엔 진정한 가치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오호라, 이 반지는?’
침착하게 전시대를 살피던 전요한은 눈을 빛냈다.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유물이 황금빛 기운을 발하고 있다.
“저건 얼마죠?”
“5천만 원이에요. 다른 매물에 비해 가격이 저렴한 편이긴 한데, 뭔가 특별한 면이 있죠?”
말을 마친 알리사가 미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녀는 전요한이 매번 가치 절하된 품목만 골라서 사간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다.
“글쎄요. 실질적인 가치는 별로 안 따지고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구매하는 편이라서.”
전요한은 멋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알리사는 타고난 장사꾼.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그 무엇도 헐값에 팔려고 하지 않을 터였다.
“저번에 구매하셨던 붉은 보석, 관리국 요원이 찾아와서 소재를 물은 적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엔 알리사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전요한이 「블러드 스톤」의 가치를 알아봤다는 점을 지적했다.
“붉은 보석이요?”
“네, 당시로선 세공이 불가능한 매물이었지만 고객님은 3천만 원이라는 거금에 일시불로 가져가셨었죠.”
“영롱해 보이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거든요. 아참, 활용법을 찾게 되면 공유해 달라고 하셨죠?”
전요한은 뒤늦게 알리사와의 약속을 기억해냈다.
알리사는 답변을 기대하는지 해맑게 웃어 보였다.
“관리국 요원의 말에 의하면, 상당한 가치를 지녔다고 하더군요. 구체적인 설명은 끝내 해주지 않았지만요.”
블러드 스톤은 알리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매물이었다.
그 가치가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상인으로서의 이해관계를 넘어선, 단순한 호기심.
이 순간, 알리사는 오래전부터 간직해왔던 물음에 대한 정답을 원했다.
“흠, 그 보석은 말이죠. 우연히 알게 된 건데….”
전요한은 진실을 갈망하는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떼기에는 상황이 조금 좋지 않다.
괜찮은 골동품을 매입해오는 알리사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성도 있었다.
블러드 스톤의 탄생 배경과 그 활용법을 설명해주자, 알리사는 눈을 빛냈다.
“방금 알려주신 정보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요?”
“딱히 측정해본 적은 없지만, 현 시점으로도 최소 1~2억은 할 것 같네요.”
블러드 스톤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까진 없어 보였다.
물론, 시르케는 예외지만 그녀가 그런 정보를 함부로 발설할 리는 없다.
전요한이 손가락 2개를 펴보이자 알리사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그렇다면 저번에 그 매물을 헐값에 넘긴 손해분은 충분히 메꾼 셈이로군요.”
“아마도요?”
“고객님께 한 가지 부탁을 하겠어요. 여기서 구매하신 물품으로 뜻밖의 횡재를 하신다면, 앞으로도 계속 정보 제공을 해주세요.”
그것이 알리사가 이런 식의 거래를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서로가 이득이었기에 전요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 반지는 5천만 원에 파시는 거죠?”
“네, 예전과 달리 사치품 상점이 되어서 가격은 좀 나간다는 점 감안해 주세요.”
괜찮은 품목으로 채워진 만큼, 평균가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당시엔 최고가가 3천만 원에 불과했는데 이제는 3억 정도는 우습게 넘기는 것들도 있다.
“일단 구매하겠습니다. 여기도 포인트 적립은 되죠?”
“물론이에요. 30%의 디스카운트와 5%의 포인트는 기본이죠.”
VIP 카드 덕분에 실질적인 구매가는 3,250만 원이었다.
이것이 바로 학원도시에서 대우받는 최상위 계층의 특권.
영수증을 보며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른 것들도 더 둘러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에요. 원하시는 게 여기에 없으면 개인적으로 알아볼 테니 말씀해 주세요.”
알리사와는 한결 돈독한 관계가 된 것 같았다.
그녀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두 사람은 골동품 매장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