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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1화 (111/180)

제111화. 도시의 그림자 (1)

“이번에도 요한 군이 재해를 무사히 막아낸 모양이군.”

유명학이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벽면의 영상을 통해 학원도시의 건재한 모습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째서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 계신 건가요? 이런 식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있던 정서희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녀는 관리국으로 복귀한 후 줄곧 대기발령 상태라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세계구급 전력의 이능력자인 멜리사를 붙여주었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하지만 지금 메르키오르 재단의 임원들이 사상 초유의 음모를….”

“학원도시 건설 계획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네. 실은 내게도 협조 요청을 보냈었지.”

“네?”

순간적으로 정서희는 당황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내부 반란을 알면서 내버려 두고 있었다니.

관리국 국장도 그들과 한패였던 것인지 의심이 갔다.

“허허. 너무 넘겨짚지는 말게. 나는 그저 「시험」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니까.”

“시험이라니요?”

“혼란한 시대엔 어떤 형태의 사회체제가 더 적합한지를 검증하려는 것일세.”

기존의 관리국은 중앙정부 산하기관으로서 모든 형태의 위협 요소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한편, 주요도시들을 근간으로 한 분산형 방어체계도 무질서한 상황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이렇듯 우열을 논하기 어려우므로, 유명학은 예전부터 가상의 시나리오를 여럿 세워뒀다.

미래에 닥쳐올 재해들을 기록한, 「시련의 서」를 토대로 말이다.

하지만 그가 예언서를 지니고 있단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니.”

정서희는 고개를 떨궜다.

아카데미에서 재미있게 지냈던 나날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전요한을 비롯한 생도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다.

“자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요한 군의 수행요원으로서 많은 것을 지켜보았겠지.”

짧다면 짧을 수도.

길다면 길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분명, 전요한의 일상을 관찰하기엔 적임자이긴 했으나 상황이 달라졌다.

“하지만 자네도 성장할 필요성이 있다네. 현재로서는 그의 발목밖에 잡지 못할 테니까.”

“그, 그런….”

유명학의 지적에 정서희는 쉽사리 반박하지 못했다.

그간 전요한이 헤쳐 왔던 역경의 무게를 알고 있었던 탓이다.

“적당한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현장요원으로서 역량을 키우도록 하게. 마침, 자네의 선배가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 말이네.”

“선배?”

정서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이후 똑똑 하는 노크 소리와 함께 이수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임무를 수행하는 건 오랜만인가, 정서희?”

이수연은 상위 부서인 3과의 정예요원이었다.

본래대로라면 다른 임무를 수행했겠지만 유명학의 지시로 당분간 정서희의 특훈을 맡게 되었다.

“어째서 선배가….”

“잔소리하지 말고 따라와.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놀고먹느라 살 좀 쪘지?”

말을 마친 이수연이 다짜고짜 정서희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녀들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유명학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직은 그대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련이라네.’

관리국의 최고위직으로서, 가능성 있는 인재들이 다치는 건 원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부 혼란도 대재해가 찾아오기 전까진 끝을 맺어야 할 터다.

유명학은 다시 벽면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분간은 자네에게 거는 수밖에 없겠군.’

어느 정도의 자질을 지닌 용사인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무질서를 바로잡기에 전요한보다 나은 자가 없단 사실이다.

어쩌면 여신이 속삭였던 말세의 구원자가 맞는 걸지도.

조만간 그가 보여줄 새로운 활약상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유명학이었다.

* * *

“정말로 별일 없었던 건가요? 알지 못하는 질병에 고통받거나 하진 않았어요?”

실비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저쪽을 살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척박한 환경의 행성이긴 했지만, 지구와 거의 유사했어요. 치명적인 바이러스 따위는 없었던 모양이에요.”

기계종에 의해 멸망한 문명으로부터 복귀한 탓인지, 후유증을 두고 관심이 뜨겁다.

“그래도 당분간은 휴식을 취하도록 해요. 학원도시의 문제라면 위원회에서 앞장서서 처리하고 있으니까요.”

실비아는 최소한 일주일간의 입실을 권유했다.

그러자 양호실에 함께 있던 멜리사가 반대 의견을 내놓는다.

“그건 너무 지나친 조치야. 수제자라곤 해도 사심이 가득 담긴 제안이라고.”

멜리사는 전요한과 함께 학원도시의 구석구석을 살펴보길 원했다.

위원회의 견제 때문에 그녀 혼자서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사제지간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말아요. 당신은 여전히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군요?”

발끈한 실비아가 싱글생글 웃으며 쏘아붙였다.

이에 맞서는 멜리사도 상당히 입 꼬리를 올리는 표정이다.

“뭐가 사제지간이라는 거야? 실전 지식 같은 건 내가 더 많이 전수해줄 수 있다만?”

같은 북유럽계라고 해도 사이가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호전적인 문화가 주류를 이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건강 진단도 받았으니 이만 되돌아갈게요. 당분간은 조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으르렁대는 양쪽을 바라보던 전요한이 몸을 일으켰다.

복도로 나오자 시르케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별문제는 없었나 보군요.”

시르케도 같은 방식으로 이상 유무를 확인받고 오는 길이다.

학원도시의 위생 수칙은 철저한 편이어서, 외부 출입 시엔 다단계의 검사가 뒤따랐다.

“너도 이상은 없어?”

“네, 나이에 비해 외모가 지나치게 어린 것치곤 괜찮다더군요.”

간호사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 실제 나이를 댔다고 한다.

그녀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는 말에 전요한은 키득 웃었다.

“앞으로는 주민등록증상의 나이를 말하도록 해. 안 그러면 할머니 취급을 받을 수도 있어.”

“놀림받는 것엔 익숙합니다. 당신이 대미궁에 있었을 때부터 그걸로 트집을 잡았으니까요.”

시르케는 혼자서 팔짱을 끼며 삐친 표정을 지었다.

아카데미 생도복을 입고 있어서인지, 정말로 사춘기의 10대 여자애 같다.

“그건 그렇고, 다들 어디로 흩어진 거지? 1~2학년은 정상 수업 중인데 3학년만 없네.”

잠시 생각하던 전요한이 문득 이상하게 여겼다.

시르케는 복도의 창밖을 가리켜보였다.

“혼란이 줄어들 때까지, 3학년은 현장 실습으로만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습니다. 저번처럼 던전 공략이나 필드 레이드 같은 활동을 하는 거겠죠.”

“운영위원회 밑에서 일하고 있는 건가. 녀석들도 상당히 고생이 많겠네.”

학원도시라고 불리는 만큼, 이능력자들과 아카데미 생도들을 주축으로 하여 중대한 업무가 처리되고 있었다.

상아탑을 포함한 중추구역은 애초에 일반인에겐 출입 금지되는 실정이다.

귀족이라 불리는 최상위 계층도 대부분은 이능력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도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지는 꼴이군요. 적당히 유화책을 펼치지 않으면, 일부 계층의 반발을 살 수도 있겠습니다.”

시르케는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 도시민의 폭동을 염려했다.

실제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 상업 구역에서 집단으로 무력시위 발생. 학원도시의 상류층께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상업 구역을 주로 담당하는 계층은 중하위 생활수준의 도시민이었다.

공산품을 유통‧판매하거나,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이란 의미다.

생활수준이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기존의 자유가 구속당한 것에 저항하고 있었다.

“시위하는 사람들을 제압하는 것도 운영위원회의 업무 중 하나겠지?”

“아마도 그렇겠죠. 군사구역의 수용소에 가두거나 공개 처형할 겁니다.”

체제에 저항하는 일반인 따윈 배려해주지 않는단 것이 위원회의 공식입장이었다.

고압적인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전요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절대자라도 된 것처럼 구네. 실제로 여기를 수호하는 건 이능력자들이잖아?”

“바로 그것입니다. 이능력자를 누구보다 대우하고, 그들을 직접 양성해내기에 학원도시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거죠.”

시르케는 핵심을 찔렀다.

분명, 이능력자는 기존의 사회체제에서도 소득 수준이 높고 열망의 대상이 되었었다.

하지만 그뿐.

실질적인 지배 계층이라기엔 권력적인 면에서 소외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반면, 여기서는 그들을 「신인류」라고 치켜세우며 최대한의 기회와 편의를 제공한다. 방금 전 그들이 받은 안전문자 또한 그러한 까닭이었다.

철저히 실력지상주의적인 분위기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낌없는 성장지원도 해주는 것이다.

불미스러운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이능력자가 여길 떠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조만간 메르키오르 재단의 임원들을 만나봐야겠어. 아니, 이제는 상아탑의 원로원이라고 불러야 하나?”

전요한은 창밖으로 보이는 하얀 거탑을 올려다봤다.

기분 나쁠 정도로 혼자서만 높이 솟아있는 건축물.

놈들은 최상층부에서 지금도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을 터였다.

“우선은 그들이 맡긴 일부터 처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학원도시의 실태를 파악해보는 거죠.”

시르케는 너무 급하게 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당장 저들을 끌어내린다고 마땅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학원도시에 대한 구상 자체는 나름 획기적인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갑자기 상아탑의 주인이라도 되고 싶어진 거야? 생각해보니 너, 에테리아 대륙으로 되돌아가면 마탑에 들어갈 거라 했었지?”

뭔가 떠오른 전요한이 추궁하듯 물었다.

시르케는 딱히 부정할 마음이 없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저곳을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쁜 건, 최상층부에서 군림하려는 자들이니까요.”

“그렇다면 소원대로 되게 도와줄게. 원로원의 장로들을 끌어낸 다음 너를 새로운 탑주로 추대하겠어.”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전요한이 씨익 웃어 보였다.

시르케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지더니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제가 상아탑의 주인이 되면 당신은 뭘 하실 생각인 건가요? 운영위원회장 자리라도 드릴까요?”

“조금 바빠질 것 같지만, 사양은 안 할게. 그 정도의 무게는 짊어져야 모두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잖아?”

멋모르는 누군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잡담이었다.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두 사람은 함께 복도를 걸었다.

* * *

상아탑의 최상층부.

원로원의 장로들은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곳의 체제는 일단 안정된 것 같군. 공업지역의 생산 수량도 충분하고, 외부로부터의 물품 조달도 상황이 나쁘지 않아.”

의장직에 있는 서창곤이 학원도시의 현재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러자 한 여인이 최근에 터져 나온 문젯거리를 하나 언급했다.

“일반인의 시위가 잦아지고 있는 건 불안 요소예요. 이건 어떻게 해결하실 건가요?”

“언제나 그랬듯, 당근과 채찍이면 되네. 말을 듣지 않으면 수용소에 가두고, 반대로 모범적인 자에겐 주는 거지.”

고태석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이에 동의하는지 채강준도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에게 시급한 목적은 각성자들의 수를 늘리는 것이네. 별 가치도 없는 가축들은 적당히 길들이면 될 일이야.”

채린, 전요한 같은 각성자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학원도시의 철통 방비를 꿈꾸는 원로원으로선 애가 타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하네. 하지만 그걸 실행하려면 우선 자네의 동의가 필요해.”

말을 마친 서창곤이 채강준에게로 은밀히 시선을 돌렸다.

채강준은 의미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슬슬 그 아이를 불러야 할 시기인 것 같군.”

채린.

친딸인 그녀가 대의를 위해 희생해줘야 할 일이 조금 있었다.

여전히 본심을 숨긴 채, 채강준은 자신의 야욕을 불태웠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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