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10화 (110/180)

제110화. 기계 여왕 (4)

[‘배반당한 대마도사, 이안네스’의 사념이 그리젤다를 바라봅니다.]

시르케와 함께 전투태세를 취하자 조금은 의외의 반응이 엿보였다.

이쯤 되면 다짜고짜 선공을 해올 줄 알았는데, 원념답지 않게 뭔가 신중해하는 기색이다.

“이상하네요. 저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어요.”

시르케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 접촉을 시도해봐. 위험할 것 같으면 바로 도와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시르케가 한 차례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는 저만치 떨어져 있는 원념체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린다.

스르르르!

주위에 검은 기류가 생겨나며 공간을 미세하게 변화시킨다.

이윽고, 사념 구축이 끝나자 뇌리에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찬란했던 마도 문명도 이로써 끝이구나. 제대로 손도 써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하다니….

대마도사, 이안네스.

그의 온전한 사념이 시르케의 마력을 통해 복원되어 있었다.

- 제자들의 승계권 다툼만 없었다면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았을 텐데. 애석하구나.

죽기 직전, 이안네스는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해 유폐된 상태였다.

멸망해가는 세계관을 위해 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는 한마디의 바람을 남겼다.

- 아아… 나의 진정한 후계자, 란티스여. 혹은 기계종과 맞서 싸우려는 이름 모를 이여. 죽어가는 백발노인에게서 한 조각의 기억을 지금 전해 받게나.

소울 스톤은 확실히 이안네스의 의지를 각인시켰다.

하지만 그것이 기계종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마도병기의 원동력으로 기능하면서 문제가 생겨났다.

본래의 바람과 다르게 원한으로 잠식된 사념 세계.

만약 시르케가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이안네스의 의지는 영원히 이곳에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이도니아의 대마법사, 시르케’가 이안네스의 의지를 계승합니다!]

[‘이도니아의 대마법사, 시르케’가 마장병기 운용법을 전승 비기로 체득했습니다!]

예상대로 마장병기는 이안네스가 고안해낸 기체였다.

내부 분열로 자멸했던 마도 문명의 궁극적인 대항책.

제법 탐이 나긴 하지만, 마도문명에 박식한 시르케가 얻는 편이 더 고효율이다.

“생각보다 시시하게 끝났네.”

아무튼, 소울 스톤에 각인되어 있던 사념을 원래대로 복구했으니 임무는 모두 마쳤다.

“슬슬 나갈까?”

“그러죠.”

이안네스의 불행한 삶에 공감해서인지, 시르케는 조금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손을 붙잡은 채, 전요한은 허공에 생겨난 차원문을 향해 높이 도약했다.

* * *

여왕의 방으로 되돌아오자 영문을 모르던 일행이 눈을 깜박거렸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던 거야? 내심 걱정하고 있었잖아.”

혼자서 마법 화살을 쏘아대던 리안이 특히 구박을 해온다.

“대마도사 이안네스가 남긴 것을 확보하고 왔어.”

“그게 뭔데? 보여줘 봐!”

리안이 눈빛을 반짝이며 궁금하단 듯이 재촉해왔다.

굳이 대답하는 대신, 옆에 있던 시르케를 쳐다봤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실제로 운용해보죠.”

지팡이를 들어 올린 시르케가 제자리에서 마법진을 펼쳤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장병기가 주위의 정예 기체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콰앙! 쾅!

여러 갈래의 가느다란 마공포가 다각도로 휘어지며 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분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자신의 히든카드까지 빼앗기자 이졸데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다급히 중앙부에 배치해왔던 대형 포탑의 화력을 끌어올리려 해보았으나….

타아아앙!

녀석은 이미 파훼법이 있다.

검 끝에서 응집된 한기가 적중하면서 광역적인 냉각 현상을 발생시킨다.

콰드드드득!

다시 한번, 위용 있게 포격을 퍼붓던 대형 포탑은 무력하게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했다.

그동안 전요한은 발 빠르게 움직여 내부에 보관되어 있는 그랑벨의 표본을 꺼냈다.

“뭐야, 생전의 모습으로 박제된 상태잖아?”

그랑벨의 표본이 모습을 드러내자 리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대로, 생체 표본은 마치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흔히 우리가 상상할 법한 외계 생명체의 모습.

흉측하게 생긴 괴물은 아니지만 외관상 인간과는 차이점이 분명했다.

참고로 네메시스 은하계의 라크자르 종족은 훨씬 지능이 높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그것만큼은 빼앗길 수 없다고 외칩니다.]

상황이 절박해지자 기계 여왕은 정예 기체를 앞세워 어떻게든 나를 제압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르케가 마장병기와 함께 이를 막아섰고, 모든 것이 뜻대로 흘러갔다.

[‘라크자르의 생체 표본’에 초혼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기계종의 창조주, 그랑벨’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예상대로 그랑벨은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긴 기계종과 관련된 무대이고 자신을 박제한 표본까지 있다.

“그랑벨, 이건 당신이 원했던 미래가 아닐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그 과오를 청산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라크자르 종족은 이미 기계종에 의해 멸망당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위대한 선지자였던 만큼 그 오점을 계속 남겨두고 싶진 않겠지.

[‘기계종의 창조주, 그랑벨’이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기계종의 창조주, 그랑벨’이 알베르티의 권한을 최상위 관리자로 격상시킵니다.]

그랑벨은 별다른 흥정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었다.

그러자 참관 중이던 수호성들이 만족감을 느꼈는지 환호를 내지른다.

[‘몽환의 요부, 루시아’가 지금 이순간만을 기다려 왔노라고 찰지게 말합니다.]

[‘불패의 용병대장, 라인하르트’가 기계종의 내부 반란을 위해 축배를 듭니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가 갖은 수모를 당할 이졸데에게 미리 축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이 권선징악의 클리셰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

예측하지 못했던 전개가 흥미 요소를 유발하면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경우였다.

이번 공략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졸데, 당신과 동등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니 다시 묻겠다. 정말 기계종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려 했나?”

주위의 정예 기체들을 단번에 작동 정지시킨 알베르티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아까 마장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던 비밀 공간.

거기엔 아마도 기계종의 중앙 정보 처리 장치가 있을 것이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굳이 그걸 대답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잡아뗍니다.]

끝까지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이졸데의 모습.

결국, 알베르티는 비밀 공간으로 진입하여 그간 이졸데가 진행했던 비밀 프로젝트를 확인했다.

“역시, 혼자서만 초월적 존재가 되려 했군. 우리들은 그저 도구에 지나지 않았어.”

이로써 최상위 관리자 간의 대립 구도는 날카롭게 형성되었다.

문제는 권한상으로 동등하나 이졸데가 먼저 여길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행이 탑승하고 있는 우주 전함은 사실상 이졸데의 본체나 다름없다.

“한 번 더 도와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랑벨? 방주가 완성되면 이졸데를 제압하기도 어려워질 텐데요.”

시간상으로 여유가 없다고 판단한 전요한.

뒤늦게 참관 중이던 그랑벨을 꼬드겼다.

이번에도 그는 별다른 요구 조건 없이 우리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어준다.

[‘기계종의 창조주, 그랑벨’이 비상 코드를 발동시킵니다!]

[시스템 설계자의 개입으로 이졸데의 권한이 일시 정지됩니다!]

이건 기존의 주종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셈이다.

충격을 받은 이졸데가 멍 때리고 있는 동안 알베르티는 내부 반란을 차례로 진행해 나갔다.

“전반적인 주요 기능은 동결시켰다. 게다가 지휘권까지 빼앗았으니 더는 저항하지 못하겠지.”

현재 이졸데는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무방비 상태로 상황을 관망하는 그녀를 향해 전요한은 씨익 웃어 보였다.

“각오해라, 기계 여왕. 오만한 너를 당장 철왕좌에서 끌어내려 주겠어.”

승리가 확실시되던 상황이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천사, 예카자엘’이 당신의 결정에 의문을 표합니다.]

예카자엘은 전요한을 여기로 소환한 권능자였다.

그가 기대했던 것은, 기계 여왕을 완전히 복속시킨 후 이쪽 세계를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바꾸는 스토리였다.

이른바 변혁이라고 하는, 끊임없는 진보의 과정.

기계종도, 인류도 멸망하길 원했으므로 예카자엘은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직접 강림하여 모든 것을 무로 되돌리려는 타천사.

하지만 허황된 계획이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원하는 대로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겁니다. 이제 저도 나름의 지지를 받고 있거든요.”

전요한은 한번 해보란 듯이 허공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참관 중이던 권능자들이 일제히 내 편을 들어준다.

[‘몽환의 요부, 루시아’가 예카자엘의 과도한 개입을 매우 못마땅해 합니다.]

[‘불패의 용병대장, 라인하르트’가 한창 물이 오른 전개에 집중하고 싶어 합니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가 반역자는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항의합니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이 예카자엘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합니다.]

…….

순간, 예카자엘은 침묵하고 말았다.

변혁자의 자질을 지녔다고 해도, 아직은 많이 모자란 상태일 터인데.

전요한은 상위 차원의 권능자들 조차도 매료시킬 정도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신이 저를 여기로 부른 이유는 알겠습니다. 어떤 선택지도 남겨지지 않은 세계에서 새로운 시작을, 멸망을 넘어선 진보를 일으켜 보라는 의도였겠죠.”

유한한 인간의 삶으로는 죽음을 뛰어넘을 수 없다.

심장이 뛰지 않는 기계의 연산능력만으로는 변혁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렇기에 기존의 선택지를 넘어서는 재창조를 통해, 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예카자엘의 숨겨놓은 모범 답안일 터다.

하지만 전요한은 그러한 개입을 용납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지구의 여신은 단지 모든 존재의 의사를 존중하는 방법만으로도 인류를 번영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세계를 완전히 부정하는 변혁 따윈 없다.’

지켜내야 할 것이 있으므로 인간은 오늘을, 내일을 더 간절하게 바라며 살아간다.

그렇기에 미래의 가능성을 없애버리는 짓은 어떤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었다.

몇 번의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한 어제의 바람은 내일로 회자되고 누군가에 의해 전승될 것이다.

“인간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나약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한, 이곳의 진정한 종말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백 년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는 존재였다.

그 대가로 영원불멸한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닿지 않는 이상을 위해 손을 뻗는다.

전요한에겐 그것이 바로 변혁의 과정이었고, 반드시 지켜내야 할 과거의 열망이었다.

[‘이상을 안고 추락한 자, 이카루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잊혀졌던 과거의 열망들 중 하나가 주위에서 빛을 발했다.

이를 따라서, 수많은 인간 영웅들이 승천한 권능자로서 의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불씨와도 같았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모든 형태의 종말과 절멸에 저항하는 대의(大義).

지금 이 순간, 전요한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업화의 화신이 되었다.

“신비한 광경이군요. 전요한, 저들이 당신에게 최상급의 영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시르케가 감탄한 표정으로 말했다.

[‘타천사, 예카자엘’이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예카자엘은 당황했다.

위계로 치자면, 자신보다 낮은 서열의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이만큼이나 모여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더는 개입하기가 어렵다.

결국,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타천사의 모습에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기존의 세계로 되돌아가야 할 차례인 것 같군.”

모든 문제는 해결된 상태였다.

로건은 상당한 보수가 걸린 의뢰를 완수했고, 기계종은 인류와의 평화적인 공존을 꾀할 것이다.

엘프족도 여기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는 [이그드라실의 잔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테지.

나머지의 잡다한 일들은 남겨진 자들에게 맡겨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힘을 빌려줘서 감사했습니다, 수많은 선배님들!”

정중하게 감사를 표한 전요한이 허공을 향해 검격을 날렸다.

곧이어 기다란 틈이 벌어지며 지구로 연결되는 차원 통로가 생겨난다.

“그럼 저희는 이만!”

시르케와 손을 잡은 채, 전요한은 소용돌이치는 틈 너머로 몸을 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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