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09화 (109/180)

제109화. 기계 여왕 (3)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이건 이졸데의 공격 수단 중 하나일 뿐, 위기를 완전히 넘긴 건 아니다.”

기계 문명의 침략사를 잘 아는 알베르티가 일행에게 일갈했다.

녀석의 말대로, 이졸데가 그동안 수집해온 세계관 정보는 실로 다양하다.

자유 도시를 세우며 찬란하게 꽃피웠던 마도 문명.

강호 무림에서 무공과 절기를 펼쳤던 각양각색의 문파.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어 공존하면서 서서히 진화하던 원시적인 자연.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고 일부는 이제 기계종의 전력으로 완전히 편입되었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마장병기를 전장에 배치합니다.]

회심에 찬 코멘트와 함께 반대편 벽면의 비밀 공간이 개방된다.

이후 육중한 몸체의 흑색 기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리안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고, 골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마도 문명의 골렘은 아니었다.

유사한 동력원이 존재하긴 하나 설계상의 근간이 되는 마법 회로가 전혀 다르다.

마장병기는 망자의 사념에 의해 운용되는 기체.

이른바 소울 스톤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 맹목적인 자아의 본질이었다.

“자잘한 건 설명해줄 여유가 없네요. 중요한 건 녀석을 어떻게 제압하는지에 대한 겁니다.”

마도 문명에 박식한 시르케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장병기의 동력원은 단번에 파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선 무력화시키는 쪽으로 타격을 입히죠.”

설계상으로 불완전한 기체에 불과해도, 놈이 이졸데의 히든카드인 이유가 있다.

저 소울 스톤에 각인된 망자의 사념은 다름 아닌, 마법공학자 이안네스.

결코 격이 낮은 존재가 아니기에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럼 내가 먼저 좌측을 맡겠어! 시르케는 엄호해줘!”

전요한이 앞으로 나아가자 리안이 다음 포지션을 받았다.

그녀의 말에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호라면 책임지고 해드리죠.”

곧이어 여러 다발의 마법 화살이 허공을 찢는다.

사사사삭!

마법 화살은 전요한에게 달려들던 정예 기체들을 제법 억제해 주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으므로 시르케가 전장 한복판에 전격 마법을 내리꽂는다.

치지지지지직!

아무래도 기계종은 뇌전 속성에 약하다 보니, 이런 식의 상황이 자주 연출되었다.

휘이이익!

궤도를 따라 회전하던 단검이 정예 기체의 취약 부위에 함께 처박힌다.

스르르륵!

처박힌 단검이 정예 기체의 마력을 빨아들인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성유물이 한 단계 성장했음을 알리는 정보창이 전요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 * *

골동품 상점에서 500만 원에 매입한 단검.

미래시가 발동하여 황금빛으로 보였기에 구매를 망설일 수가 없었다.

[마법사의 최후]

등급 : ☆☆☆☆

타격을 입힌 대상으로부터 일정 마력을 갈취합니다.

찔러 넣은 상태로 유지하면 지속적인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무려 4성급의 성유물이었다.

이런 게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고 골동품 가게에 나뒹굴고 있었다니.

전요한은 스스로 운이 좋았다고 여겼다.

‘어떤 것들은 충분한 조건이 만족되기 때까진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지.’

이것의 경우엔, 아마도 일정량의 마력을 흡수해야 진명이 공개되는 것 같았다.

[‘용병대장, 란돌’이 그 단검을 이용하면 마장병기를 효과적으로 구속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관 중이던 권능자가 훈계를 해왔다.

마법사의 최후를 회수한 후 전요한은 뒤를 돌아봤다.

아까처럼 위협적인 마공포 따위가 날아올 경우를 대비해 리안은 성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길 벗어날 건가요?”

의도를 눈치챈 시르케가 곧바로 질문을 해왔다.

“나름 효율적인 공략법을 생각해 봤어. 지금 갈게.”

말을 마친 후 전요한은 전장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성역에서 벗어나자마자 일제히 이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기계수들.

역시 한발 늦게 움직여도 이졸데의 최우선 순위는 그였다.

콰앙! 쾅! 쾅!

좌측의 일행을 상대하던 대형 포탑까지 돌연 방향을 돌려 내게 집중 포격을 시작해온다.

마도 문명의 기술을 응용해서 구현해낸 개체인 탓에 위력이 남다르다.

휘아아아아!

아르티나의 검신에서 점차 거센 혹한이 몰아쳤다.

이어서 지면이 빠른 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하자 참관 중이던 수호성들이 흥미롭단 반응을 보인다.

[‘몽환의 요부, 루시아’가 당신의 무구를 신기하단 눈빛으로 봅니다.]

[‘불패의 용병대장, 라인하르트’가 다음 전개를 몹시 궁금해합니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가 당신의 전력을 높이 평가합니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이 더 이상의 개입은 몰입을 위해 불필요하다고 판단합니다.]

…….

아까 도움을 조금 주긴 했지만 저들은 다시 관람객의 입장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작 중요한 장면에서는 개입하지 않고 극을 감상하듯 순수하게 전개를 즐기고 싶어 하는 심리다.

그 대리만족을 선사하기 위해 전요한은 검 끝을 대형 포탑 쪽으로 향했다.

“이건 예비 동작에 불과해!”

타아아앙!

검 끝에 응집된 냉기가 마치 총탄처럼 포물선의 궤도를 타기 시작한다.

이윽고 목표점에 적중한 그것은 순식간에 빙하를 발생시켰다.

콰드드드득!

그 결과, 위용 있게 포격을 퍼붓던 대형 포탑은 무력하게 대부분의 기능을 상실했다.

“좋아요! 이러면 공략이 한결 쉬워지죠!”

먼저 마장병기를 상대하던 시르케가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마법 영창을 하며 회심의 마법을 시전하려던 순간.

[‘배반당한 대마도사, 이안네스’의 사념이 마장병기를 본격적으로 운용합니다.]

가만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흑색 기체가 일순간 붉은 눈을 번뜩였다.

* * *

마도 문명의 위대한 선지자.

대마도사, 이안네스는 기계종의 침입이 시작되었을 무렵엔 이미 연로한 나이였다.

아마 그가 10년만 더 젊었더라도 결과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에 이러한 가정은 그저 무의미할 뿐.

어쨌거나 마도 문명은 멸망하고 말았는데, 주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내부 분열이었다.

[‘금자탑의 마도사, 란티스’가 이 같은 상황을 몹시 안타까워합니다.]

이안네스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수호성이 연민의 코멘트를 보내온다.

엄밀히 따지자면, 소울 스톤에 각인된 사념은 영혼이라 부르기엔 부적합한 면이 많다.

그럼에도 자신이 존경했던 스승의 잔재이니 심정은 이해가 된다.

[‘배반당한 대마도사, 이안네스’의 사념이 공격 시도 중인 시르케를 적으로 인식합니다.]

마법을 시전하려던 시르케와 마장병기 사이에 암흑 장막이 펼쳐졌다.

이후 회심의 전격 마법이 튕겨져 나갔고 시르케는 미간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제법인데요? 단순한 사념 덩어리인 것치고는….”

단순한 사념체는 아니다.

소울 스톤의 특성상 영혼처럼 작동하게 하는 기능이 있으니까 말이다.

구동 원리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눈앞의 마장병기가 이안네스의 전력 일부를 지녔음은 확실하다.

시르케가 자세를 고쳐 잡는 동안 리안이 여러 다발의 화살을 쏘아 올렸다.

취약부라 할 수 있는 코어 장치를 노린 것이었지만, 별 의미는 없었다.

결계의 표면이 일부 이지러지긴 했으나 그것도 잠시.

마법 화살들은 조금 전의 전격 마법처럼 보기 좋게 튕겨 나갔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리안을 뒤로 한 채,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다시 공격을 시도해볼까.’

물론, 다시 한번 빙결 마법을 사용할 생각은 없다.

이제는 그런 식의 공략이 통하지 않는 탓이다.

대신, 그 구동 원리상의 허점을 노릴 것이다.

걸음을 내달려 지근거리까지 다가가자 지면에 심상치 않은 마법진이 펼쳐진다.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한 마장병기의 반격.

암흑 장막 너머로부터 일순간 핏빛 섬광이 비치더니.

슈슈슈슉!

여러 갈래의 가느다란 마공포가 다각도로 휘어지며 일제히 이쪽을 노린다.

제법 위협적인 공격이었으나 전요한에겐 적당한 카운터 스킬이 있다.

파사월섬(破邪月閃).

이것은 검신에 오러를 응집시킨 후 정면에서 적과 맞서야만 비로소 발동된다.

이윽고 창백한 번뜩임이 눈앞의 위협 요소들을 단번에 횡참한다.

[‘몽환의 요부, 루시아’가 가슴에 양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입니다.]

[‘불패의 용병대장, 라인하르트’가 당신을 믿고 있었단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가 앞으로의 전개에서 더 이상의 반전은 없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이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무대를 지켜봅니다.]

…….

참관하는 권능자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활약하는 재미는 있다.

전요한은 암흑 장막을 향해 재차 일격을 가했다.

이전보다도 더 힘을 실어 넣었는지 그 기세가 대단했고.

촤아아악!

균열이 생겨 있던 암흑 장막은 결국 찢겨나가며 완전히 파훼되었다.

[‘배반당한 대마도사, 이안네스’의 사념이 당신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품습니다.]

마장병기는 전요한에게서 상당한 수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대처한다고 해도 상황은 늦어 있었다.

휘리리릭!

전요한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우측 견갑골 쪽에 투척했다.

암흑 결계가 파훼된 직후를 노린 터라 이는 보기 좋게 적중했고.

파지지지직!

마법 회로의 파괴 현상으로 인한 전류 방출과 함께 불협화음에 가까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용병대장, 란돌’이 당신의 의도를 알아채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법사의 최후는 마력을 흡수하는 옵션이 있는 만큼, 본래의 소유자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전요한은 이제부터 그의 정체를 모두에게 보여주기로 했다.

“시르케, 지금이야!”

“알겠습니다!”

시르케가 즉각 응답하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후 영계 마법을 시전하자, 성유물과 관련된 망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성의 영혼 약탈자, 클리게인’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제게 당신의 능력을 빌려주시면 눈부신 성장으로 보답하겠습니다.”

딱히 클리게인에게 내건 매력적인 조건은 없었다.

그는 이미 생전의 목적을 이루고 승천한 전설적인 영웅.

애지중지하던 단검을 계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악마성의 영혼 약탈자, 클리게인’이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유품을 적절히 활용해 왔다고 생각했는지 클리게인은 흔쾌히 도움을 주었다.

스르르르!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서슬 퍼런 혼기를 내뿜는 마법사의 최후.

곧이어 눈앞에 일그러진 차원문 하나가 나타났고,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시르케, 어서 들어와!”

전요한은 별다른 설명 없이 차원문을 향해 곧장 도약했다.

뒤늦게 기능이 정상화된 대형 포탑이 이쪽을 향해 집중 포격을 퍼부었으나.

퍼퍼펑! 펑! 펑!

초인의 경지에 접어들어서 한껏 기민해진 움직임을 따라잡진 못했다.

그렇게 해서 대마도사 이안네스의 사념 세계로 진입했고, 미지의 흑막이 시야를 뒤덮었다.

* * *

일종의 던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절망의 공간.

여긴 대마도사 이안네스가 기억하는 마도 문명의 붕괴 현장이었다.

“이것이 구심점을 잃고 멸망한 세계관의 종착 지점인가.”

무너진 유적지 잔해와 갈라진 대지만이 있을 뿐,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전혀 없다.

눈앞에서 망자처럼 일렁이는, 흐릿한 형체를 제외하면 말이다.

언뜻 보기에도 온전한 의식을 지닌 영혼체라고 보긴 어렵다.

‘만약 대마도사 이안네스였다면 저렇게 보기 흉할 정도로 왜곡되지도 않았겠지.’

그저 본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집념에 불과할 뿐이다.

“조심하세요. 저 사념… 이제 대화로는 설득할 수 없습니다.”

뒤따라서 몸을 일으킨 시르케가 협상 가능성을 부정했다.

“일단 녀석을 쓰러뜨리자.”

사실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시르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리안을 혼자 내버려 두고 온 만큼, 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야 한다.

“당신은 언제나 제 도움을 필요로 하는군요. 그런 점은 변함없이 어린아이 같습니다.”

시르케는 잔소리를 늘어놓은 후 곧장 눈앞의 존재에 집중했다.

사실 여기에 오래 있어서 좋을 건 전혀 없었다.

소울 스톤에 의해 남겨진 사념 덩어리의 절대 공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점차 의식이 잠식되어 그 일부가 되어버린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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