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기계 여왕 (2)
“너희들의 이동 수단은 아까 저 밑으로 처박히더군. 확인해보는 게 좋지 않겠나?”
알베르티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하지만 아찔한지 아무도 거길 바라보진 않는다.
“중간 관리자의 권한으로는 못 멈추는 거야? 하다못해 우리가 있는 구역이라도.”
리안이 다급한지 알베르티를 향해 물었다.
공사용 발판 위에 서 있는 알베르티와 달리, 그녀는 불안정한 철골에 매달려 있었다.
“모든 기계종은 이졸데의 명령에 정면으로 맞설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자폭이라 할지라도.”
“그러면 이졸데가 지금까지 자폭 명령을 내리지 않은 거야?”
이번엔 전요한이 질문을 던졌다.
알베르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분명히 명령은 전달받았다. 하지만 내가 거부했어.”
“거부했다고?”
“그래, 나도 잘은 모르겠다. 어쩌면 저 마녀가 내게 주입했다는 자의식 때문일지도.”
우물쭈물하던 알베르티의 시선이 시르케에게 향했다.
시르케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녀라니. 그건 모욕에 가까운 언사입니다. 제가 질투나 탐욕 같은 마계 군주처럼 보이나요?”
이후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한 가지 가능성을 내놓는다.
“아마도 중추 시스템에 의해 특이 개체로 인식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보호를 받는 것이죠.”
“중추 시스템? 그건 또 뭐야? 이졸데가 최상위 관리자 아니었어?”
리안이 모르겠단 듯이 고개를 갸웃한다.
“중추 시스템은 기계종의 창조주인 그랑벨이 고안해낸 것입니다. 이졸데도 그 근간을 손대는 건 불가능하죠.”
따라서 이졸데는 최상위 관리자일 뿐, 기계종의 진정한 주인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 초월적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거군요.”
“알베르티 같은 특이 개체를 만들어낸 것도 그 일환이라 봐야겠네.”
몇 가지 정보를 덧붙이자 일행은 고개를 끄덕인다.
한편, 알베르티는 슬슬 모두를 채근했다.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설명이다. 이럴 시간에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나?”
돌파구라.
실은 아직 말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 있긴 했다.
[‘몽환의 요부, 루시아’가 어서 다음 전개를 보고 싶어 합니다.]
[‘불패의 용병대장, 라인하르트’가 이런 위기는 적당히 편법으로 건너뛰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가 기계종의 내부 반란에만 집중하고 싶어 합니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이 위기에 빠진 일행을 도우려 합니다.]
…….
예상대로 권능자들이 제법 많이 모여 있었다.
흥미로운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차원을 찾아다니는 유희 추구형.
그들은 기계종의 내부적인 분열 가능성에 흥미가 고취된 상태였다.
[참관 중인 권능자들의 기대감이 주위 상황에 영향력을 미칩니다.]
모처럼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고개를 끄덕이자 여러 장의 인물 카드가 떠오른다.
루시아. 라인하르트.
시리우스. 에스텔….
모두가 참관 중인 권능자의 프로필 화면이다.
이렇게 주어진 인물 카드는 기대주의 전용 특전이다.
권능자들이 특정 전개를 열망할 때에만 가능한 서사 개입.
활용하기에 따라서 비장의 전략이 될 수도 있다.
‘누구의 가호를 받는 편이 좋을까.’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하는 수호성은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
그는 생전에 신성 제국의 존망을 두고 기계종과 한바탕 격전을 벌인 바 있었다.
영웅으로서의 격도 제법 높은 편이니 분명 도움이 될 터다.
[‘백룡의 기사, 시리우스’를 당신의 흑기사로 활용합니다.]
위엄 있게 서 있는 용기사를 선택하자 주위에 순백의 강기가 감돌았다.
허공답보를 가능하게 해주는 시리우스의 권능.
이외에도 현재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일행이 내 뒤를 따라오기 어렵다.
‘다른 방법이 있다.’
아직 눈앞에 남아 있는 인물 카드가 꽤 있었다.
물론, 차원 간섭의 제약 때문에 이걸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두 개 정도는 더 선택이 된다.
[‘광휘의 무녀, 에스텔’을 당신의 흑기사로 활용합니다.]
이번엔 무릎 꿇은 채 기도를 올리는 하늘색 머리칼의 여인.
에스텔은 신성 제국의 초대 무녀로서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지녔다.
“어어? 뭔가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인데요?”
가장 먼저 변화를 느낀 시르케가 어리둥절해 보인다.
이후 그녀를 비롯한 일행 모두가 하늘색 기류에 휩싸인 채 허공에 떠올랐고.
“단번에 이졸데가 있는 곳까지 날아갈 좋은 기회입니다.”
전요한은 앞장서서 비틀린 위쪽 통로를 향해 허공답보를 시작했다.
기계 탑의 내부 공간은 다시금 설계 변경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
위험하긴 해도 그 정도의 수고는 감수해야 했다.
* * *
기계 거탑이 지속적인 설계 수정을 통해 구축하려는 최종 형체.
그것은 다름 아닌, 초문명 우주 전함 ‘이졸데의 방주’였다.
하지만 완성도는 썩 높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특정 조건을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어서 첫 미션이 종결되길 원합니다.]
이졸데가 본격적으로 재앙화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첫 미션이 실패했을 경우의 이야기.
아직 우리에겐 한나절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기계수들의 공격이 점차 줄어드는걸? 여왕도 이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나 봐.”
활을 든 채 뒤따르던 리안이 한적해진 통로를 두리번거린다.
그녀는 에스텔의 권능으로 인해 평소보다도 몸놀림이 더 민첩해진 상태였다.
“뭐, 위기감은 충분히 느끼는 중이겠지. 우릴 맞이할 준비는 이미 끝났을 거야.”
슬슬 긴장해하는 일행을 훑어보며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향하고 있는 우주 전함의 최심부엔 이졸데가 준비해둔 비장의 카드가 있을 터.
그것이 무엇일진 세계관 정보를 통해 쉽게 짐작 가능했다.
“그런데 로건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공중전함으로 외부에서 견제를 한다고 했었잖아.”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가 떠올랐는지 리안이 내게 물었다.
“글쎄.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문득 궁금해진 전요한은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 뭐 하고 있는 거야?
- 어디선가 몰려온 기계수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어. 당분간은 돕지 못할 것 같다.
상황이 다급한지 로건은 간략하게 상황을 전달했다.
별다른 언급이 없는 걸 보니 로건 혼자서도 충분히 할 만하다 여기는 듯했다.
“네, 저희가 결착을 낼 테니 좀 더 시간을 끌어주세요.”
사실 그 정도로도 동료로서 1인분은 하는 셈이다.
얼마 전에 합류한 알베르티 역시 내부 통로의 방어 시설을 무력화시키며 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이졸데와 정면으로 대적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여왕의 방에 도착하면 호위를 부탁한다.”
알베르티가 아군으로 합류한 이유는 이졸데의 본심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만약 그녀가 기계종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리려 함이 확실하면 곧바로 적대 관계를 선언할 셈이다.
물론, 이졸데도 순순히 자신의 계획을 인정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대신, 지시에 잘 따라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후 전요한은 거대한 문 앞에 멈춰 섰다.
여태껏 봐왔던 출입구와 달리 외관부터가 장엄하고 굳건해 보인다.
“이제 레이드가 눈앞이네.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위험한 장소라고 판단한 리안이 침착하게 눈빛을 가라앉혔다.
“그럼 시작하죠. 최후의 결전을.”
적당히 대화를 일축한 후 힘차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점차 시야에 들어오는 내부의 모습.
중앙부엔 완전무장한 대형 포탑이 보였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기계 여왕.
그녀는 대형 포탑을 중심으로 다수의 정예 기체들을 손수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이제 결착을 내볼까, 이졸데? 여기가 최후의 보루라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전요한은 앞서 걸어 나가며 마법검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여기에서 확보해야 할 것은 기계종의 창조주, 그랑벨의 표본.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그랑벨의 표본은 반드시 필요하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자신은 나약한 인간종 따위에겐 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려는 찰나.
뒤따라 아군 진영의 앞으로 나온 알베르티가 입을 열었다.
“자율 구동 시스템의 중간 관리자로서 전투 전에 한 가지 묻겠습니다.”
그건 이 같은 혼란에서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건 영속적인 진보입니까, 아니면 이탈입니까?”
흡사 영웅들의 전당과도 같은 원형 공간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본래 여러 세계관의 생체 표본들이 전시되어 있었을 여왕의 방.
그 전리품들을 다시 채워 넣으려 하는 목적을 두고 두 기계종 간에 보이지 않는 마찰이 생겨났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그것이 정말로 궁금하냐고 묻습니다.]
[‘강철의 여신, 이졸데’가 중간 관리자 수준의 지능체와는 고차원의 지적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일축합니다.]
예상대로 직접적인 답변을 꺼리는 이졸데.
이에 알베르티는 곧장 전요한에게 한 가지 정보를 알려줬다.
“그랑벨의 표본은 저 포탑 안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니 최대한 생포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벌여라.”
알베르티가 알려준 표본의 위치는 예상외였다.
그 위치를 체크한 후 전요한은 뒤를 돌아봤다.
“다들 들으셨죠? 포탑을 공격할 땐 신중하셔야 합니다.”
그래도 자잘한 것까지 설명해야 하는 수고는 덜었다.
스걱!
더 이야기를 이어나갈 것 없이 곧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단번에 정예 기체 하나의 핵심 부위를 절단 내자 일행도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별로 어려울 건 없겠네.’
확실히, 전력 차는 이쪽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다.
대미궁을 공략한 이가 둘이고 리안도 엘프 여왕의 호위답게 활솜씨는 좋은 편이었다.
반면 저들은 이졸데의 본체도 아니고 다급히 끌어모은 정예 전력에 불과하다.
‘예상대로 이졸데는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군.’
현재 이졸데의 본체는 모두가 갇혀있는 우주 전함 자체였다.
아직 불완전한 상태라 되도록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지시만 내리는 중이다.
치지지직!
아군의 파상 공세에 위협감을 느꼈는지 대형 포탑이 코어 장치의 동력원을 끌어모았다.
곧이어 지면에 다채로운 마법진이 전개되었고.
“이건, 꽤나 수준이 높은 주문인데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위험을 감지한 시르케가 뒤로 물러서며 모두에게 소리쳤다.
리안도 고개를 끄덕인 후 그녀의 옆으로 가서 정령검을 내리꽂는다.
엘프 종족의 수호 마법으로 펼친 결계.
주위에 산개해 있던 아군이 찬란한 빛을 발하는 성역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강력한 마공포가 포탑으로부터 발사되기 시작한다.
콰콰콰콰쾅!
황금빛의 장벽이 위협적인 마공포를 간단히 막아낸다.
“휴, 큰일 날 뻔했네. 다른 방비책으로는 어려웠을 것 같아.”
겨우 타이밍을 맞춘 것에 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이럴 때 리안이 곁에 있어서 다행이야.”
시르케가 나서도 되었던 일이었지만, 전요한은 굳이 그녀를 칭찬해줬다.
호구 종족인 엘프는 칭찬에 약한 탓이었다.
“뭐, 뭘 이 정도 가지고.”
얼굴이 붉어진 리안은 고개를 떨구더니 결계를 강화하는 일에 집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