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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07화 (107/180)

제107화. 기계 여왕 (1)

네메시스 은하계의 선지자라고 불리었던 외계종, 라크자르.

이들은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고 개척 정신이 강하여 우주 탐험을 좋아했다.

다른 은하계에서 미지의 원시종들을 발견하면 그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러한 연구는 처음엔 단순한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탐험이 계속될수록 점차 오만함이 싹트게 된다.

자신들보다 진보된 문명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결국, 라크자르는 스스로를 우월한 종족이라 여기고 원시종들의 지배자가 되려 한다.

비록 그들의 생태계는 존중해 주었지만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하위종으로서 대한 게 문제였다.

결국 종족간의 갈등이 생겨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 종 하나로 기계화된 군대가 제시된다.

라크자르의 신체 능력은 인류와 비교해서 별반 차이가 없는 수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기계화된 군대만 한 대안은 없었기에 야심찬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그 책임자의 이름은 그랑벨.

지금부터 전요한이 찾아내야 하는 두 번째 열쇠였다.

“그, 그랑벨은 대체 왜…?”

“도움을 받을 겁니다. 이졸데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요.”

“설마 생물학적 복제를 시도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번에도 기계 인간이 확고한 거절 의사를 밝혀 온다.

일행과 함께 전투를 계속하며 전요한은 녀석을 인내심 있게 설득했다.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겁니다. 이대로 기계종이 폭주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동의해 주시죠.”

“폭주라고?”

“네, 이졸데의 망상에 잠식된 순간부터 당신들은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최상위 관리자인 이졸데는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가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기계종은 정복 전쟁만 벌이다 멸망하고 말겠지.

위험 요소라고 버림받은 기계 인간도 그런 결말은 원하지 않았다.

“너를 믿는 건 아니지만… 그 가능성은 직접 확인해 보겠다. 자의식을 갖게 된 기계종으로서.”

설득이 효과가 있었는지 기계 인간은 끝내 중립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녀석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일단 이름부터 지어주도록 하죠. 지금부터 당신은 알베르티입니다.”

“알베르티? 내가 왜 그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지?”

“왜냐하면 이름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되는 게 아니니까요.”

사실 네이밍 센스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적당해 우겨대자 알베르티는 포기하는 반응을 보였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너희와는 잠시 동행하는 것뿐이니까.”

이제 녀석의 전담자를 정해야 했다.

딱히 누구로 해도 상관은 없는데 아무래도 리안이 나을 것 같다.

“내가 바쁠 땐 대신 알베르티를 맡아줘. 수상한 짓 못 하게 감시하는 겸해서 말이야.”

“아… 응….”

저만치서 활시위를 당기던 리안은 순간 벙찐 표정이었다.

의외의 임무를 맡게 되어 조금 당혹스러운 모양.

역시 천하의 호구 종족이었다.

타다다다다!

주위에 있던 기계수들의 공격이 더욱 맹렬해졌다.

라크자르 종족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니 위기 의식이 느껴지나 보군.

이윽고 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전요한은 일행을 군용 트럭에 태웠다.

“이번엔 시르케가 조수석에 타줘.”

“…알았어요.”

모두가 탑승하자 조종석에 있던 로건이 급발진을 시도했다.

“출발할게!”

요란한 소음과 함께 점점 가속도를 붙여나가는 군용 트럭.

산개해 있던 기계수들이 뒤늦게 따라붙으려 했다.

이에 개의치 않고 일행은 그대로 강행 돌파를 해버렸다.

콰아아아앙! 콰아앙! 쾅! 쾅!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연속적인 충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차체가 워낙 굳건해서 문제는 없었다.

이래봬도 대장장이 신의 권능으로 주조해낸 신소재 합금이다.

“너희들은 미쳤어….”

함께 군용 트럭의 뒤편에 타고 있던 알베르티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여전히 일행이 이졸데에게 이기지 못할 거라고 판단하는 모양이다.

“자, 더는 시간 끌지 말고 이야기하시죠. 그랑벨의 표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최상층. 여왕의 거처로 가봐라.”

알베르티는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해 주었다.

그의 답변에 시르케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그랑벨이란 자의 표본이 왜 여기 있단 거죠? 그걸 어떻게 알아냈어요?”

“그건 이졸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리품입니다. 리안으로부터 들은 엘프 족의 전승이니 확실하죠.”

초월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이졸데의 목적을 생각하면, 라크자르의 표본은 필수적이었다.

만약 문제가 생기거나 하면 자신의 창조주를 복원하여 그 능력을 빌려야 할 테니까.

“그러니까… 우리 목적은 그를 찾아내서 알베르티에게도 최상위 관리자의 권한을 부여하는 거네?”

“그래 맞아. 그랑벨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지.”

“하지만 오래전에 죽었다고 하지 않았어? 생물학적으로 복제할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도움을 받을 건데?”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로건이 잘 모르겠단 듯이 끼어들었다.

전요한은 그를 향해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시르케의 영계 마법을 통해 여기로 불러올 겁니다. 초혼이라고 하죠.”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야?”

“네, 적당한 매개체만 손에 넣는다면요.”

그랑벨의 표본 정도면 충분하리라 여겨졌다.

물론, 이런 계획은 사방에 설치된 감시망을 통해 이졸데도 거의 눈치챘을 터다.

“액셀 더 밟아요. 이럴 때 전력 주행을 해야 해요.”

군용 트럭의 주행 속도가 장애물들로 인해 느려진 것 같았기에 로건을 재촉했다.

앞으로 남은 여유가 별로 없는 상황.

조잡한 장애물들을 안전하게 피해가느라 발목이 잡혀 있을 순 없었다.

* * *

알베르티는 여전히 중간 관리자로서 권한이 있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만 한다면, 이번 계획에 문제는 없어 보였다.

“최상층에 도달할 때까지 조금 도와줘야겠습니다, 알베르티.”

“…너희를 도와주는 게 아니다. 나도 이졸데를 만나야 해서 이러는 것일 뿐이야.”

예상대로 알베르티는 기계탑을 공략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중간 관리자의 권한으로 숨겨진 함정들도 무력화시키고 말이다.

때였다.

콰콰콰콰콰쾅!

난데없이 굉음과 함께 외벽으로부터 상당한 충격이 전해졌다.

[‘대장장이 신, 나인클리프’가 건방진 이졸데를 향해 선전 포고합니다.]

갑자기 웬 상위 존재가 등장해서 코멘트를 띄우기 시작한다.

“뭐, 뭐죠? 이건!”

리안이 기겁한 표정으로 눈앞의 텍스트를 바라봤다.

시르케는 차분한 어조로 그녀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는 멸망한 세계입니다. 하나의 독립된 차원으로서 보호받지 못하니, 혼돈의 일부가 되어버린 거죠.”

이처럼 권능자들이 멋대로 개입해오는 유희 공간을 [어비스]라고 불렀다.

여기가 그동안 조용했던 이유는, 유희 공간치고 너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멸망해서 구경거리도 사라진 세계를 관음증에 걸린 것처럼 계속 지켜볼 권능자는 없다.

무언가 특별한 목적을 지닌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니까, 대장장이 신은 기계 여왕에게 남다른 관심이라도 있다는 거야?”

아연실색하던 리안이 침착을 되찾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이어서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아까의 포격은? 대체 누가 한 건데?”

상위 차원의 권능자들은 그저 지켜보며 가끔 장난질만 칠 뿐이었다.

마침 대장장이 신을 배후로 둔 인물이 바로 곁에 있었다.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로건이 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설계도의 전투병기들을 완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어. 그러니까 알겠다는 응답이 왔었지.”

로건처럼 선택받은 자는 언제든 권능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새롭게 접한 정보에 전요한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지구의 여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는데.’

이건 권능자의 성향 차이라고 해두기로 했다.

아무튼, 로건의 말에 의하면 대장장이 신이 보낸 기동전함이 기계 탑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다.

“조종은 누가 하는데요?”

“지금은 자동운행 중인데, 아무래도 내가 직접 조종석으로 가야 할 것 같아.”

어떻게 거기까지 도달할지는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로건은 여태껏 숨겨 왔던 자신의 전용병기를 소환했다.

조잡한 전투장비들로 구성된 외장병갑.

그것은 외골격을 지닌 강화 슈트인데, 유사시에 공중비행을 할 수 있는 엔진도 갖췄다.

“그럼 이따가 연락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로건이 기계 탑 한 구석을 향해 돌아섰다.

이후 외장병갑으로부터 담황색의 자주포가 발사되며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는다.

“무슨 아X언맨도 아니고….”

전요한이 조금 부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후, 자취를 감췄던 로건으로부터 무전 연락이 왔다.

- 아아, 들리십니까.

녀석은 계획대로 무사히 조종석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네, 수신에는 문제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전함을 대체 어떻게 운용할 거죠?”

대장장이 신의 변덕으로 얻게 된 공중병기였다.

이윽고 로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적당히 기계 탑의 주요지점을 요격하는 식으로 돕겠습니다. 이따금씩 달려드는 날파리들도 해치우고요.

로건은 자신의 권능자에게 선물을 받아서 감동한 기색이었다.

“뭐, 열심히 해주세요. 잘 보여서 다른 장난감들도 후원받아야죠.”

“장난감이라니, 신성 모독입니다. 이게 얼마나 고도의 기술력이 집약된 전투병기인데….”

로건의 잔소리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되면 양동 작전이 가능해져서 이졸데의 심기를 더 흔들어놓을 수 있을 터다.

- 그럼 저는 주위를 비행하며 기계종의 병력을 분산시키겠습니다.

로건 알렌은 자신의 비행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제 보니 평범한 밀리터리 마니아가 아니었다.

군용 트럭을 설계도도 없이 뚝딱 제작해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강철의 여왕, 이졸데’가 나인클리프의 도발에 진노합니다.]

[‘강철의 여왕, 이졸데’가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듭니다.]

순간, 정적이 감돌더니 내부 설비들이 개조되듯 복잡다단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전요한은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이졸데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눈치챘다.

“이런….”

사실 일행이 침입한 기계 탑은 그녀의 본체나 마찬가지였다.

외형은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오버 테크놀로지의 산물.

‘수정 설계’를 통해 구조도 변환 가능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미완성된 상태에서 그 기능을 불완전하게 시도한다면?

내부에 있는 존재들은 어떻게 되어버릴지 모른다.

“각오 단단히 해두는 것이 좋겠어. 미완성 상태의 구조 변환은 훨씬 폭력적으로 실행되거든.”

함께 탑승 중이던 알베르티가 일행에게 경고를 보내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내부 공간이 급격히 기울어지며 망가진 기계들의 잔해가 일행을 덮쳤다.

“뭐, 뭔가요 이건!?”

“빠져나가야 하는 거 아냐?”

갑작스럽게 기울어지는 경사면에 당황한 시르케와 리안.

몸이 미끄러지자 손을 뻗어 아무 기계장치나 붙잡고 버티려 했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전요한은 주위에 매달려 있는 일행을 살폈다.

다행히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군용 트럭과 함께 추락해버린 이는 없었다.

“하,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잖아!”

놀라서 아연실색하던 리안이 옆에서 화를 낸다.

내부 공간이 왜곡되는 바람에 모두가 절벽과 마주하고 있는 상태.

이 정도 높이에서 추락하면 누구도 무사하진 못할 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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