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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06화 (106/180)

제106화. 종말의 세계 (6)

이런저런 노력 끝에 생존자들의 거점은 무사히 방어해냈다.

조금 발목이 잡힌 감이 있었으나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었다.

이번 전투로 생존자들은 기계종에 대항할 용기를 얻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생존자들의 거점은 그대로 둬도 괜찮을까? 기계수들에게 다시 공격당할 수도….”

군용 트럭의 뒤편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리안이 우려를 표했다.

호구 종족 아니랄까 봐, 이제는 일반인들의 안전까지 책임지려 한다.

“그들이 게릴라전을 펼쳐줘야 우리로서도 일을 벌이기 쉬워.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이제부터는 대장 노릇을 하는 조엘이 제 몫을 해줘야 했다.

“요새에 남아 있는 자들에게 무선으로 연락해 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 여차하면 강화 요새 쪽으로 대피시키는 계획도 세워뒀어.”

연락수단인 무전기를 흔들어 보이며 로건이 일행을 안심시켰다.

“슬슬 우리 걱정이나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기계종들의 거점이 코앞입니다만.”

앞쪽을 바라보던 시르케가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도심부의 거대한 타워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마치, 구약 성서의 바벨탑처럼 끊임없이 최상층을 증축해 가는 거점.

저것이 완성되는 순간, 기계 문명이라는 대재해가 세계를 완전히 잠식할 것이다.

여기까지 접근해 오면서도 상당한 수의 기계종을 제압한 상황.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이어질 엄청난 파상 공세에 비하면 말이다.

콰아아아앙!

일순간, 기계탑으로부터 섬광이 번뜩하더니 거대한 입자포가 바로 옆쪽을 휩쓸었다.

타이밍 좋게 핸들을 돌린 로건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우,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녀석은 주위에 띄워놓은 드론들로부터 미리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리안은 사색이 다 된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미, 미쳤어….”

숲속에서 균형과 질서를 수호하며 살아왔던 엘프 종족이다.

이러한 공격은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으므로 놀라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할 거야? 내 운전 실력에 목숨 걸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조만간 다음 포격이 예상되자 로건이 의향을 물었다.

전요한은 먼저 군용 트럭을 멈춰 세운 후 조수석에서 내렸다.

“시르케, 미안한데 조금 도와줄 수 있어?”

그럴듯한 거점을 구축했다고 우쭐대는 이졸데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함이었다.

“혹시 반격하려는 건가요?”

“응, 한 번이면 돼.”

어차피 타워 내부로 진입하면 방금처럼 괴랄한 포격의 표적은 되지 않는다.

진지하게 설득하자 시르케는 결국 승낙의 의사 표시를 한다.

“알겠습니다. 도와드리죠.”

이제 타이밍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

얼마 전부터 기계탑을 면밀히 관찰하던 리안이 돌연 내게 외쳤다.

“두 번째 포격이야!”

엘프는 동체시력이 뛰어나서 금방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졸데가 이제 우리를 곤란한 적으로 인식하나보군.’

멀리서 날아오는 거대한 입자포를 보며 전요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행 전원이 긴장했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후 예상되는 지점에 시공참(時空斬)을 날렸고 그로부터 왜곡된 공간이 생겨났다.

본래 사용 중이던 오러 스킬을 근간으로 구현해낸 극한의 카운터 어택.

이렇게 하면 왜곡 현상을 일으켜 날아오는 공격 스킬이 그대로 반사되도록 할 수 있다.

그 결과, 이졸데는 자신이 발사한 포격에 보기 좋게 당해버렸다.

콰콰콰콰콰콰쾅!

기계탑의 최상층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잔해가 추락한다.

오버 테크놀로지로 구현한 입자포에 직격탄을 맞았으니 저만한 피해는 무리도 아닐 터다.

“제대로 한 방 먹였네요!”

“다시는 이런 방식으로 공격해오지 않겠는걸?”

여차하면 몸을 피하려 했던 시르케와 로건이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리안도 말은 안 하지만 대단하단 반응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환호할 때가 아니다. 전요한은 다시 조수석에 올라탔다.

“전속력으로 주행해. 당분간은 포격을 해오지 못할 거야.”

아까 전의 피해로 인해 이졸데는 내부 시설을 복구하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알았어.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을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로건이 군용 트럭의 시동을 걸었다.

이후 기계탑의 출입구를 향해 점차 주행 속도를 높여간다.

“더는 수작질을 해오지 않으려나요? 그래도 기계종들로선 정면 돌파를 당하는 중인데….”

“전에 봤던 정예 개체가 나타날 수도 있어. 조심해.”

군용 트럭의 뒤편에 탑승 중인 시르케와 리안이 새로운 위협을 예상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기계탑의 거대한 출입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드드드드득.

저 정도 규격이면 내부에서 정예 기체도 충분히 등장할 수 있었다.

“뭐야, 의외로 순순히 들여보내 주는데?”

“기계 여왕…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어.”

개방된 출입문에서 아무런 위협도 찾아볼 수 없자, 잔뜩 긴장하던 로건과 리안이 의아해했다.

시르케는 이졸데가 무슨 속셈인지 눈치챘다.

“어차피 입자포 따위로 요격하지 못할 상대라면 들여보낸 후에 가둬놓겠단 거죠.”

그간 정찰을 통해 모아 왔던 정보에 의하면 기계탑의 내부 구조는 매우 악랄하다.

따라서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면 이렇게 나오는 편이 더 승산이 있는 것이다.

이졸데가 오버 테크놀로지의 산물이란 점을 되새기며 전요한은 내부 돌입을 지시했다.

“그냥 들이받아. 내부에도 주행 공간은 충분히 있으니까.”

적어도 해가 지기 전에는 이 높은 타워의 중턱까지 돌파해야 한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로건도 달리 방법이 없다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어. 대신 충돌 사고 내도 뭐라 하지 마.”

이윽고 기계탑의 광활한 내부로 진입한 군용 트럭.

거기에선 수많은 기계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쓸어 버리려면 한나절은 걸리겠는걸?”

트럭의 뒤편에서 장궁을 들어 올리며 리안이 혀를 찼다.

그녀의 곁에 있는 시르케도 적잖이 곤란하다는 표정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개체 수를 많이 줄인 줄 알았는데… 기계수의 양산 속도가 엄청나네요.”

정예 기체라면 모를까, 양산형의 경우엔 재료만 넣으면 뚝딱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않아? 강행 돌파가 지금으로선 최선이야.”

씨익 웃어 보인 전요한이 태평스럽게 몸을 풀기 시작한다.

사실 그에게도 숨겨놓은 비장의 카드는 있었다.

먼저 조수석에서 내린 후 아르티나를 올렸다.

이에 기회를 노리던 기계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었고 냉혹한 한기가 녀석들을 집어삼켰다.

* * *

일행은 다시금 몰려온 기계수들로 인해 고립되어 있는 상태였다.

군용 트럭을 타면 어지간한 수는 돌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경우엔 다들 내려서 전투를 치러야 한다.

“대체 저 녀석들의 생산 재료는 어디에서 충당하는 거야?”

“그러게. 급한 대로 상층부의 내부 설비라도 떼어내나?”

끝이 없는 교전에 로건과 리안이 투덜거리듯 대화를 주고받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입니다. 어서 물리치죠.”

아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전요한은 먼저 모범을 보였다.

용아파참(龍牙破斬).

강력한 위력의 돌격 스킬로 적진을 헤집으니 조금은 공백이 드러난다.

기계수들을 꽤나 정리했을 무렵, 저 너머에서 낯선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익. 끼이익.

기계 인간.

인류를 농락할 셈인지 이졸데는 본인도 탐탁지 않을 유형의 기체를 고안해냈다.

“더는 우리에게 도전하지 마라,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기계 인간은 제법 정밀한 설계를 통해 구현되어 있었다.

다른 개체와 달리 신소재로 골육(骨肉)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도 했고 말이다.

“이번엔 기계인간인가요? 별로 위협적이지도 않아서 조금 당혹스럽네요.”

“우리를 저렇게 만들어 버리겠단 선전 포고일지도 몰라.”

시르케와 리안은 예상대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한편, 전요한과 로건은 그저 신기하다는 반응이다.

“와… 이게 영화 속에서만 보던 바로 그 장면이야?”

“막상 실제로 만나고 보니 감회가 새롭네. 저 녀석은 우리처럼 감정이 있는 걸까?”

저럴 땐 코드가 맞는 것 같아서 왠지 모르게 같은 세계의 인물들 같다.

황당해진 리안은 멋대로 마법 화살을 쏘아 올리려 했다.

그러자 전요한이 손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멈춰.”

“왜? 외형만 비슷할 뿐이지 저놈도 기계종인 건 맞잖아.”

대체 속셈이 뭐냐며 리안이 쏘아봤다.

“지금부터 저 녀석을 반란의 불씨로 삼을 거야.”

“뭐, 뭐어?”

“안 되리란 법도 없지. 이졸데는 최상위 관리자에 불과하니까요.”

기계종의 창조자는 오래전에 이졸데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문명 또한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고 말이다.

즉, 기계종을 누가 이끌어가든 딱히 문제는 없단 의미.

그렇다면 적당한 계기를 만들어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것도 가능했다.

허세처럼 들렸는지, 눈앞의 기계 인간도 다소 어이없다는 눈치다.

“난 이졸데 님의 기대에 반하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위협을 받는다 해도.”

과연 그럴까?

전요한은 마음속으로 질문하며 주위를 흘끗 살폈다.

기계 인간의 등장 이후, 다른 기계수들은 배후로 물러나 있는 상태.

고개를 돌려 시르케에게 질문을 던졌다.

“영계 마법 중에 동식물의 의식을 일깨우는 유형이 있지?”

“네, 영력을 불어넣어서 자의식을 조금 강화해주는 정도죠.”

“지금 당장 저 녀석에게 시전해줘.”

왜 하필 녀석이냐 하면, 다른 기계수들은 전투를 주목적으로 설계되었기에 사고 능력이 부족하다.

반면, 생체 구조까지 정밀하게 모방된 기계 인간은 자의식이 충분히 싹틀 수 있다.

상위 관리자인 이졸데의 의식 통제로부터 벗어날 경우에 말이다.

“무, 무슨 짓을….”

자신에게서 생겨난 변화에 놀란 기계 인간이 이쪽을 노려봤다.

이후 저주 섞인 말을 퍼부으며 달려들었고 전요한은 맨손으로 녀석을 손쉽게 제압했다.

뒤늦게 의도를 파악한 이졸데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려고 했다.

잠시 대기 중이던 기계수들이 다시금 파상 공세를 벌인다.

기계 인간은 자신이 제거 대상이 되었단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이, 이졸데 님….”

자의식이 생겨난 현 시점에서 이 같은 처분은 부조리하게 느껴질 터.

녀석은 양산형 기체도 아니고 심지어 중간 관리자였다.

물론, 쓸모가 있어서라기보단 인류를 농락할 목적으로 그런 권한이 주어진 것이지만.

“당신은 어차피 버려질 운명이었습니다. 지구를 정복한 다음엔 그다지 필요성이 없거든요.”

“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졸데에게 있어 모든 기계종은 소모품에 불과합니다. 결코 동등한 존재가 아니죠.”

전요한이 기계 인간에게 하는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이졸데가 진정으로 바라는 건 초월적인 존재.

자신의 창조주였던 자들을 넘어서서 불멸의 여신이 되고자 한다.

수많은 은하계를 돌아다니며 정복 활동을 벌이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각 종족의 특성을 연구하여 초월자로 거듭나기 위함.

즉, 최상위 관리자인 이졸데는 그 누구보다도 기계종으로서의 정체성을 증오하고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계속되는 폭로에 기계 인간은 매우 혼란해진 모습이었다.

녀석이 머릿속을 정리하는 동안 전요한은 일행과 함께 몰려오는 기계수들을 물리쳤다.

“1순위 보호 대상은 이 녀석입니다. 신경 써서 봐주세요.”

“그런데 아까 말한 반란이란 거, 어떻게 일으키겠단 거야? 모든 권한은 이졸데에게 있지 않아?”

장궁을 쏘아대던 리안이 문득 내게 질문을 던졌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그 권한을 빼앗을 겁니다.”

최상위 관리자라고 해도 창조주의 개입은 어쩌지 못할 터다.

사실, 그 창조주는 이졸데의 첫 전리품으로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이졸데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한 궁극의 수단.

한 무리의 기계수를 물리친 전요한은 기계 인간에게 물었다.

“당신들을 만들어낸 외계종, 라크자르의 표본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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