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종말의 세계 (5)
“제가 먼저 들어가 큰형님에게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양해를 구하기 위해 덱스터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행이 잠시 기다리자 다른 녀석이 내부에서 걸어 나온다.
“따라오십시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마도 덱스터는 큰형님이란 자에게 붙잡혀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중인 것 같다.
고개를 끄덕인 후 안내자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여기는 거점을 지배하는 수뇌부를 위한 공간입니까?”
“그렇습니다. 허락 없이는 아무나 들락거릴 수 없죠.”
꽤나 조직적인 걸 보니 역시 하나의 길드가 주도하는 것 같다.
내부로 발을 들이자 참모로 보이는 인물들이 말없이 우리의 모습을 훑는다.
“…….”
“…….”
“…….”
통찰의 권능으로 살펴보니 대부분이 덱스터하고 비슷한 수준이었다.
떼거리로 달려들어도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단 의미.
전요한은 홀로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사내를 바라봤다.
“당신이 큰형님입니까?”
“그렇다. 용건이 뭐지?”
사내는 평범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전직 군인 정도 되어 보였다.
“상황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차라리 함께 나서서 싸우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시간도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러자 사내는 전요한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자기소개부터 했다.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조엘. 합동 작전에 대해서라면 논의를 좀 해봐야겠군.”
전요한의 예상대로 조엘은 전직 군인이었다.
하지만 이외의 녀석들은 변변치 않은 자들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들의 협력을 받는 편이 여러모로 유리했다.
“서로 신뢰가 부족한 것 같은데, 저희는 생존자도 구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기다렸단 듯이 여성 생존자를 향해 다시금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그녀가 마스크를 벗으며 우리를 변호해준다.
“이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기계종과 맞서 싸우던데, 전부 어디 가서 밀리지 않는 실력자들이에요.”
마침 이쪽 세계에서는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는 나름 잘나가는 여자 연예인이었다고 한다.
“…스텔라 씨? 살아 계셨군요.”
“네, 불한당들에게 치욕을 당할 뻔했지만 다행히 별일 없었어요.”
스텔라는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조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갑자기 이런 일을 당해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알고 보니 조엘은 스텔라의 열혈 팬이었다.
아니, 열혈 팬을 넘어서서 영혼을 팔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
게다가 우연히 몇 번 만난 인연도 있어 관계가 공고했다.
“스텔라 씨의 목숨을 구해줘서 정말 고맙다. 그런데 기계종은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지?”
호의적인 표정을 지으며 조엘이 내게로 돌아섰다.
전요한은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쪽은 적당히 게릴라만 해주시면 됩니다. 기계종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인 셈이죠.”
전요한이 가리킨 지점은 기계종의 거점 중 하나였다.
이전에 녀석들이 장악했던 전략적 요충지인데, 외곽의 산업 단지 쪽에 위치해 있다.
“알겠다. 어차피 모두의 생존이 걸린 일이기도 하니 한번 최선을 다해보지.”
조엘은 이번 계획에 달리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행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크흠… 아무튼, 서두르도록 하지. 기계종이 우리를 먼저 발견하기 전에.”
미묘해진 분위기에 조엘이 헛기침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물론,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일단 일부터 벌여야죠. 여기서 고민해봤자 딱히 해결법은 안 나오잖아요?”
전요한이 당당하게 정면 돌파를 의견으로 내놓았다.
이에 기다렸단 듯이 로건의 동의가 뒤따른다.
“때려 부수는 거라면 자신 있지!”
대장장이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덕분에, 이런저런 전투장비가 많다고 한다.
“기계수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을 텐데 잠입하는 방법도 고려해보는 게 어떤가요?”
너무 단순무식하다며 재고할 것을 권하는 시르케.
그녀의 생각도 분명 나름 일리는 있었다.
“…대체 누구 의견이 맞는 거야.”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리안은 선택의 갈림길에 선 모습이다.
스텔라도 자신이 끼어들 일은 아니라며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선택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어요. 저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일반인이라서 이곳에 잔류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아무튼, 슬슬 결론을 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콰쾅쾅쾅!
상당히 먼 지점으로부터 들려오는 폭발음.
사방에서 경보가 울렸고 장신우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기계수들이… 끝내 여기를 찾아낸 모양이다.”
예상컨대, 우리를 뒤늦게 추적해온 모양이다.
이쪽 세력이 괴멸하면 곤란했으므로 조엘에게 결단을 촉구했다.
“전투 가능한 인원을 전부 불러 모으세요. 피해가 커지기 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 * *
조엘에게 후속 조치를 맡긴 후, 일행은 곧장 바깥쪽의 구역으로 향했다.
이미 기계수들이 파상 공세를 벌이는 중이었고 사상자가 상당했다.
“사, 살려줘!”
“으아아악!”
재래식 무기를 들고 어쭙잖게 전방에 서 있던 자들이 무참히 찢겨나간다.
“병사들의 수가 너무 부족해요. 저들만으로는 최전선을 지켜낼 수 없겠어요.”
“우리가 나서야지 뭐. 이건 거의 숙명 같은 거잖아?”
시르케의 말에 전요한이 먼저 전장에 뛰어들었다.
이를 본 로건도 전투장비들을 걸치며 다급히 뒤따른다.
“젠장,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라고! 고철 덩어리들아!”
한편, 리안은 전의가 별로 생기지 않는지 형식적으로 후위에서 장궁만 들어 올렸다.
“…….”
아마도 자신의 종족인 엘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은 모양.
그녀에게 동기 부여를 해줄 필요성이 있었다.
“리안, 엘프는 숲과 정령을 사랑하는 종족 아닌가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죠?”
“이곳에도 자연은 존재합니다. 엘프가 추구하는 균형과 조화. 그것이 깨지려고 하는데 가만히만 있을 건가요?”
“…웃기지 말아요. 나는 어디까지나 여왕님의 명을 받고 당신들을 감시하러 온 거니까.”
리안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뭐라 했는지도 신경 쓰지 않고 갑자기 전방을 향해 마법 화살을 열렬하게 쏘아댄다.
…역시 천하의 호구 종족답다.
‘이래서 엘프는 항상 당하고만 사는 거로군.’
현재 엘프 종족은 에테리아 대륙에서 멸망 위기에 처해 있다.
본래 함께 살던 다른 종족들에게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인데, 진정한 군고구마 빌런은 바로 저들이다.
콰드드드득!
아르티나를 지면에 내리꽂자, 균열이 일어나며 커다란 빙하가 솟아났다.
결빙하는 혹한.
이제는 마법검을 활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속성 공격이 가능하다.
그만큼 마력을 다루는 능력이 상승하고 있단 의미.
나름 4성급의 성유물이니 정말 나중에는 얼마나 대단한 위력을 보여줄지 모른다.
“너의 검, 볼수록 대단하네. 던전이란 곳에서 얻었다고 했지?”
기관총을 쏘던 로건이 부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본다.
“네, 운이 좋았죠.”
“나중에 새로운 병기를 설계할 때 참고해야겠어. 마법 문명의 이능은 실로 대단하군.”
로건은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전방으로 유도탄을 발사했다.
유도탄은 회전하며 적진 깊숙이 침투한 후, 폭발하며 최대한의 피해를 일으킨다.
“근데 그게 최대 화력이에요? 왠지 전력을 아껴두는 것 같은데.”
“물론 아니야. 조만간 내 진정한 실력을 보게 될 테니 기다려.”
로건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이후 기계종과의 급박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을 때였다.
치지지지지직!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거체가 입자포를 쏘며 이쪽으로 성큼 다가선다.
순간,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저, 저건 뭐죠?”
“정예 개체인 것 같은데… 꽤나 강력해 보이네.”
기계 문명에 익숙하지 않은 시르케와 리안은 당황한 기색마저 내비쳤다.
“오랜만에 때려잡고 싶은 놈이 나타났네.”
거대한 기계종을 올려다보며 전요한이 씨익 웃었다.
이후 그는 정예 기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쾅! 콰아아앙!
빙결의 마법검에 의해 얼어붙은 정예 기체가 무참히 얻어맞았다.
아무래도 기계 부품은 혹한에 당하면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어서 박살 내버려!”
배후에서 구경하던 리안이 열렬하게 응원했다.
그녀들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은 양산형 기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졸데의 삼대기신 중 하나라는 녀석인가요. 그 악명에 걸맞게 흉포하네요.”
상대적으로 여유가 많던 시르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정예 기체에게 전격 마법을 내리꽂았다.
콰지지지직!
마치 정전이 일어난 것처럼 녀석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삼대기신이라고 해도, 마룡까지 물리친 대마법사 앞에선 한없이 나약한 존재였다.
“하아아아아!”
전요한이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 다시 한번 돌격했다.
정예 기체는 이번엔 얻어맞기 싫은지 제대로 된 반격을 해온다.
치이이이익!
진홍빛 입자포가 한 쌍의 포문에서 일직선으로 발사된다.
코어부의 동력을 최대한 이끌어낸 것이라 그 위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 따위!”
거리를 좁혀가던 전요한이 민첩한 움직임으로 도약을 시도했다.
그 궤도를 추적하듯 입자포가 뒤따라가며 아찔한 상황을 연출한다.
“저희도 돕는 게 어때요?”
“여기서 굳이 일대일 결투를 지켜보고 있을 필요는 없잖아?”
예상보다 시간이 걸리겠다고 판단한 로건과 리안이 레이드에 끼어들었다.
그들의 가세에 힘입어 전요한은 본격적으로 활약을 해보였다.
“뒤처질 수는 없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오러가 기계수들의 내부 기관을 망가뜨렸다.
곧이어 검격을 날리자 전방의 일부 공간이 이지러지듯 왜곡된다.
콰드드드득!
왜곡된 공간에 갇힌 기계수들이 충격파에 의해 찌그러졌다.
시공참(時空斬).
전요한이 일정한 수준에 오른 후 즐겨 썼던 검술 중 하나다.
드드드득.
이대로 질 순 없다고 생각했는지, 정예 기체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한 쌍의 입자포를 이리저리 난사하는데, 끝내 전요한을 따라잡진 못했다.
스걱!
상대적으로 측면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놈의 하체를 절단했다.
물론, 덩치가 워낙 커서 문어발 다리에 해당하는 일부분만.
“좋은 시도였습니다!”
조금 전의 일격으로 정예 기체가 무게 중심을 잃자, 시르케가 긍정적인 반응을 날렸다.
이후 그녀는 비장의 전격 마법으로 결정타를 내리꽂는다.
파지지직!
동력 장치에 데미지가 들어가자 파열음과 함께 난잡한 전류가 튀었다.
정예 기체는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지면에 쓰러졌다.
쿠우우웅!
거대한 덩치에 걸맞게 육중한 소리가 주위를 메운다.
“어서 나머지 놈들도 정리하죠. 언제까지고 여기 묶여 있을 순 없습니다.”
우두머리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기계수들이었다.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다시 들어 올렸다.
강철의 여왕, 이졸데와의 결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