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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물이 스탯을 숨김-104화 (104/180)

제104화. 종말의 세계 (4)

기계종에 의한 침식 속도는 매우 빨랐다.

시가지가 눈에 띄게 황폐해졌고 행인은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처음 소도시를 방문했을 때보다도 더 암울한 광경.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바로 도심부의 거대한 타워였다.

“저게 바로 기계종의 거점인가 보네. 지금도 웅장한데 아직 미완성인 것 같아.”

조종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던 로건이 먼저 감상을 늘어놓는다.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기계 문명은 한때 하나의 은하를 뒤덮을 만큼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고 들었어요.”

자신들을 창조한 상위 종족을 절멸시킨 후 새로운 신을 자처한 기계 여왕.

그녀가 무슨 이유로 이종족을 정복하는 일에 힘쓰는지는 시르케도 모른다고 했다.

“기계종은 예전에 에테리아 대륙도 침공한 적이 있어. 고서의 기록이 남아 있는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거야”

장궁을 껴안은 채로 리안이 트럭 뒤편에서 중얼거렸다.

엘프족의 역사를 전승받은 그녀에게서 이졸데의 방주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을 수 있었다.

“멸종시킨 종족의 표본을 전리품으로 챙겨 간다고?”

충격적인 사실에 로건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맞아. 이졸데는 각 종족의 우수한 개체를 선정하여 박제하듯 가져가. 필요에 따라 복원하여 써먹으려는 의도에서겠지.”

과학 문명이 발전하면 지구도 이러한 비극에 처할지 모른다.

어쩌면 타천사는 그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이쪽 세계를 소개해준 것일지도.

전요한은 군용 트럭에 탑승한 채 동료들과 함께 시가지를 더 살펴보았다.

“어, 생존자네?”

로건이 의아한 표정으로 대상을 자세히 관찰했다.

이어서 다른 동료들의 시선도 그쪽으로 향했고 전요한은 군용 트럭을 정지시켰다.

“함정일 수도 있으니 혼자 확인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은 제자리에서 대기해 주세요.”

트럭에 내린 후 다가가자 여자 생존자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났다.

“뭐, 뭐예요?”

무법자라도 본 양 도망치려는 기색이 강하다.

머쓱해진 전요한이 그녀를 안심시키려던 때였다.

돌연 리안이 고개를 쳐들며 놀란 표정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크, 큰일 났어요! 기계수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기계 여신, 이졸데가 다시 마수를 뻗어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일행은 곧바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 * *

한바탕 공방전을 치른 후 나는 일행과 함께 다시 생존자들을 찾아 나섰다.

이졸데에게 위치가 발각되었기에 추격은 계속되었고 가끔씩 고립되는 상황도 발생했다.

“우리를 죽이려고 제대로 작정한 모양이네요.”

“뭐, 그렇겠지. 달리 위협 요소라 할 게 지금은 안 보일 테니까.”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시르케와 로건이 말을 주고받았다.

“아아….”

한편, 여자 생존자는 여전히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콰아아앙!

트럭이 맹렬하게 돌진하며 돌파구 쪽의 기계수들을 쓸어버린다.

“어? 저기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데? 잘은 몰라도 사고가 난 것 같아.”

조종석에서 묵묵히 운전하던 로건이 한쪽 손가락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그곳엔 반파된 차량을 둘러싸고 일단의 무리가 서 있다.

“제가 먼저 이야기를 해볼게요. 잠깐 적당한 데다 세워 봐요.”

대화가 통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다.

“무슨 일입니까?”

조수석에서 내린 후 전요한은 무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에 녀석들이 잔뜩 긴장한 채로 총기류를 집어 든다.

“정지! 움직이면 쏜다!”

“더는 가까이 오지 마!”

“뭐 하는 놈이야! 설마 코쟁이 패거리냐?”

코쟁이라면 시르게이 패거리를 의미하는 것일 터다.

일단 놈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두 손을 들어 협상 의사를 밝혔다.

“우리는 독립 세력입니다. 어려운 시기에 서로 돕는 것이 좋을 듯한데 어떠신지요?”

“뭐? 우리가 모르는 세력이 또 있었나?”

“분명, 이런 애들이 돌아다닌단 말은 못 들어봤어.”

“어떻게 하지? 큰형님하고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인데….”

생존자 무리는 내적 갈등을 겪는 듯이 우물쩍거렸다.

무엇보다 전요한이 이방인이라는 점이 심히 거슬리는 기색이다.

그때, 일행을 추격해왔던 기계수들이 배후에서 달려들었고 현장은 소란이 일었다.

“주, 죽어버려! 기계 놈들!”

“으아아아아!”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싸우는 모습들을 보니 별로 대단한 녀석들은 아니다.

기선 제압도 할 겸, 아르티나를 들어 올렸다.

콰드드득!

지면에 아르티나를 내리꽂자, 나선형의 혹한이 여러 갈래로 퍼져나간다.

이로 인해 순식간에 기계수들이 얼어붙자 생존자 무리는 침음을 삼켰다.

“히, 히익….”

“엄청나게 강하잖아?”

“대체 정체가 뭐지?”

때로는 말보다는 행동이 빠를 때가 있는 법.

주눅 든 분위기를 확인한 후 전요한은 녀석들을 향해 뒤돌아섰다.

“당신들의 큰형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어서 안내하세요.”

* * *

생존자 무리는 일행을 외곽 지역의 지하 터널로 인도했다.

녀석들의 말에 의하면 여긴 몇 년 전에 폐쇄된 곳이라고 한다.

“정지. 신분을 증명하시오.”

최후의 은신처라 그런지 제법 보안이 철저했다.

덕분에 큰형님이란 상대를 만나기까지 적지 않은 마찰이 일어났다.

그때마다 생존자 무리가 앞장서서 일행을 변호했고 말이다.

“실력이 대단한 사람들이야.”

“우리를 구해줬으니 그냥 비켜줘.”

“코쟁이 세력하고도 딱히 관련이 없는 것 같아. 외국인이 조금 껴 있긴 하지만.”

이들은 엘프 종족인 리안도 외국인으로 간주했다.

당사자인 리안은 별 관심 없단 반응이었다.

“…내가 인간같이 생겼나.”

단지, 옆 사람에게도 잘 들리지 않게 혼잣말을 하긴 했다.

이종족이긴 해도 세계관이 가깝다 보니 엘프와 인간은 생김새가 꽤나 비슷하다.

“휴우, 어떻게 여기까진 들어왔네요. 또 한바탕하는 줄 알았어요.”

무사히 두 번째 검문 검색을 통과한 시르케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 터널은 현재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피난민 수용소에 와 있다.

“무정부 상태라 그런지 남자들 시선이 좀 신경 쓰여. 여기 지배 세력은 호색한들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한편, 리안은 상당히 피곤하단 표정이다.

그녀는 인간들이 아름다운 엘프의 육체를 탐하려 할지 모른단 걱정에 빠져 있었다.

비슷한 고민을 지닌 여자 생존자는 비슷한 우려심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그나저나, 여긴 식량 문제가 심각한 것 같아요. 수용 인원이 이렇게나 많은데 다들 모습이….”

주위를 둘러보던 시르케가 걱정 어린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말대로 죄다 허기진 채 힘없이 누워 있어서 곧 죽을상들이다.

“큰형님이란 자도 고민이 많겠네. 어쩌면 이야기가 잘 풀릴지도 몰라.”

안쓰럽단 표정을 짓던 로건이 희망조로 내게 말했다.

녀석은 주위의 이목을 피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거야 이야기를 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죠. 너무 김칫국부터 마시지 마요.”

로건에게 경각심을 주며 전요한은 생존자 무리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여전히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는데, 은근히 시선이 이쪽의 여성들에게 고정되어 있다.

“어딜 쳐다보는 거죠?”

“아, 아뇨. 혹시 불편하신가 해서… 하하….”

“실은 여기로 오면 답답하단 사람들이 좀 있거든요.”

“아무래도 지하 터널이다 보니….”

생존자 무리는 전부 사내들이었고 어색하게 웃으며 흑심을 부정했다.

그때, 다른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주위를 둘러쌌다.

“죄송하지만 저희와 이야기를 좀 하셔야겠습니다.”

이후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분위기를 잡는다.

“뭐죠?”

“당신들은 이방인입니다. 즉,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의미인데 더는 내부 진입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인가.

어지간히도 보안이 까다로웠다

“저희는 그저 당신들의 큰형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만.”

이건 최후의 협상 통보다.

되도록 귀찮은 일을 덜려 했으나 어쭙잖은 자들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없다.

“큰형님은 지금 매우 바쁩니다. 당신들처럼 불순한 무리와 상대할 시간이 없죠.”

우두머리 사내는 그렇게 말한 후 우리를 여기로 인도했던 아랫것들을 슬쩍 노려봤다.

“…….”

“…….”

“…….”

위계가 제법 차이 나는지 이번엔 아무런 변호도 하지 못한다.

결국, 전요한이 나서기로 했다.

광전사의 격노를 발동시키자 주위가 얼어붙을 듯한 살의에 휩싸인다.

일행을 둘러싸고 있던 헌터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뭐, 뭐야….”

“으윽….”

저들로서는 버텨내기 어려운 구속 제어 효과였다.

“대체 무슨 짓입니까, 한바탕하겠단 생각인지요?”

우두머리 사내가 기분 나쁘단 듯이 경고를 해왔다.

하지만 그도 중압감에 총구조차 들이밀지 못하는 중이다.

쉽게 말해서 조금 전의 경고는 단지 허세에 불과하다.

“제 앞을 계속 가로막는다면, 목숨을 건 것으로 간주하죠.”

보란 듯이 우두머리 사내를 향해 아르티나를 겨눴다.

이에 우두머리 사내는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당신이 정말 대단한 분이라면… 직접 큰형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제 좀 말이 통하네요. 그런데 이름이 뭐죠?”

“덱스터입니다.”

덱스터는 포위망을 푼 후 자신의 부하들에게 눈치를 보냈다.

지시가 있기 전까지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란 의미.

분위기가 가라앉자 시르케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덕분에 수고를 덜었네요.”

“이 정도는 뭘.”

전요한은 어깨를 으쓱한 후 덱스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곳의 구조를 확실히 머리에 각인시키는 것쯤은 잊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자 마지막 구역의 장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 * *

다른 구역과 달리 제대로 요새화해 놓은 것을 보면 여기가 확실하다.

장벽의 한가운데에 굳건하게 닫혀 있는 출입문.

그곳을 여러 명의 헌터들이 경계 서는 중이었다.

“문 열어, 어서.”

앞장서던 덱스터가 녀석들에게 강압적인 어조로 명령했다.

“하, 하지만 저들은….”

“이방인이지 않아요?”

“큰형님이 대노하실 텐데….”

이번에도 통행권을 놓고 다소의 마찰이 벌어졌다.

시간이 지체되자 덱스터는 앞으로 걸어가서 자신이 직접 출입문을 열었다.

“책임은 내가 진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별로 대단한 녀석도 아닌데 무게는 제대로 잡는다.

덱스터를 따라 마지막 구역으로 들어서자 이런저런 분류 작업을 하는 무리들이 보였다.

외부로부터 들여온 물품을 용도에 맞게 서둘러 나누는 것이, 마치 시간에 쫓기는 듯하다.

“다들 공포에 질려 있군요.”

“저들에게 있어선 이런 것도 생존의 문제입니다.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물자 보급 순위가 밀리니까요.”

최심부의 부하들까지 긴장해 있는 걸 보면 상황이 정말 안 좋은 모양이다.

“그래서 큰형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도 꽤나 넓은데요?”

“조금만 더 가시면 됩니다.”

전요한에게 혼나고 싶지 않은지 덱스터는 걸음을 재촉했다.

곧이어 경계가 매우 삼엄한 구축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은 마치 야전 막사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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