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종말의 세계 (3)
“웃기지 마, 고철 덩어리! 저딴 바다뱀 따위는 저번에도 잡아봤다고!”
전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이후 검격을 날려서 이졸데가 더는 떠들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박살 나버린 안드로이드의 잔해가 바닥을 어지럽힌다.
“…….”
“…….”
“…….”
요르문간드를 상대하던 엘프들은 이 같은 상황에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이그드라실의 잔해뿐.
그것을 가지고 되돌아가야만 절명의 위기에 처한 태고의 숲을 복원할 수 있다.
엘프들이 모두를 경계하고 있을 때, 구석의 차원문에서 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 여왕님….”
엘프 종족의 인도자, 오필리아.
그녀의 외모는 어떤 미사여구로도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한 성질 하는 인물이었기에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돈다.
“우리와 거래를 한 자는 어디에 있지? 온통 피바다로구나.”
엘프들이 멍하니 쳐다보는 동안, 오필리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시르케에게로 시선이 머물렀고 단번에 적의를 품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여기는 하프 엘프가 끼어들 전장이 아니란다.”
건방 떨면 바로 공격해올 생각인지 오필리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한껏 위엄을 뽐내는 엘프 여왕이었으나 시르케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이도니아의 시르케라고 하면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뭣이? 그렇다면 네가 마룡 네페리온을 물리쳤다는 대마법사란 것이야?”
오필리아는 믿기 어려운지 조목조목 따져왔다.
상대가 그래도 절반쯤은 엘프의 피를 이어받은 하프 종족이라, 인내심을 발휘하는 모습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왕도의 한복판에 나타난 대미궁을 공략하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악마들이 판치는 곳에서 오랫동안 지낸 모양이구나. 어쩌면 예전의 명성과는 달리 타락해 버렸을 가능성이 있겠어.”
예상대로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오는군.
전요한은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이그드라실의 잔해를 얻는 게 목적이라면 대신 제가 도와드리죠.”
조금 귀찮긴 해도 엘프 종족을 적당히 구슬리는 편이 앞으로 더 편해지는 탓이다.
“인간인 네가 어째서? 무슨 목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그쪽도 마계 진영의 공격을 받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공동의 적이 있는데, 힘을 합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굳이 기계종을 함께 토벌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들은 에테리아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만 신경 쓰기도 바쁠 테니까.
하지만 [이그드라실의 잔해]를 얻기 위해선, 결국엔 이졸데와 반복할 수밖엔 없다.
어느 정도의 단계까진 아군으로 활용해먹을 수 있단 의미다.
“내가 너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그간 수많은 배신을 당해왔다.”
“저와 손잡지 않으면 이대로 되돌아가는 편이 좋을 겁니다. 여긴 기계종을 막아낼 수단이 별로 없거든요.”
확실히 오필리아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원하는 성유물이 있으리라 판단하고 넘어왔을 텐데, 아쉽게도 여기엔 그게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침입 정보를 사전에 접한 이졸데가 다른 장소로 옮겨놓았을 터다.
결국 오필리아는 마지못해 수긍하는 의사를 내비쳤다.
“사정상 너의 존재는 묵과해주마. 하지만 조금이라도 수작을 부리는 날엔 나의 마법 화살로 네 심장을 꿰뚫어버릴 것이니라.”
역시 호구 종족답게 귀가 얇다.
이로써 담판은 지었으니 저기서 꿈틀거리는 바다뱀을 처리하는 일만 남았다.
“요르문간드는 다시 알의 형태로 봉인하는 편이 좋겠군요.”
“그래, 가만두면 계속 몸집을 불릴 테니 부화하기 전으로 되돌리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오필리아가 태고의 정령석을 들어 올렸다.
이후 푸른빛이 뻗어나가며, 새끼 상태의 요르문간드가 점차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엘프의 신성 마법이군요. 저만하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내 알로 되돌아가 버린 요르문간드를 보며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요한은 앞으로 걸어가서 알을 집어 들었다.
“그럼 이건 제가 갖겠습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나는 그런 것 따위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단다.”
오필리아는 곧장 이그드라실의 잔해를 찾으러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어디선가 몰려온 기계수들에 의해 앞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우선 제가 구축해둔 요새로 가죠. 거기라면 충분히 안전합니다.”
굳이 설득할 필요가 없어진 전요한이 길을 열었다.
푸른 궤적과 함께 기계수들의 잔해가 주위를 뒤덮었다.
* * *
“당신은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건가요?”
강화 요새에 도착하자 시르케가 전요한에게 계획을 물었다.
“우선 전력을 정비한 후에 곧장 기계종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겁니다.”
시간을 끌어 봤자 계속해서 양산되는 기계수들 때문에 소모전만 벌어질 뿐이었다.
“대화는 그만하고 어서 출입문이나 열어. 피곤하니까.”
엘프들을 이끌고 서 있던 오필리아가 하품을 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기계수들과 접전을 벌이느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모양이다.
“나도 왠지 모르게 뻐근한걸? 뒤통수도 조금 얼얼하고….”
옆에 있는 로건도 어서 쉬고 싶은 욕구를 호소한다.
그는 뒤늦게 합류해서 엘프들을 대형 트럭에 싣고 오는 길이었다.
끼릭끼릭.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강화 요새의 출입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다들 멀쩡한 걸 보니 여긴 별일 없었던 모양이다.
“기계 여왕의 집중 공격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강화 요새가 구축되고 나서 방어설비를 더 갖추니까 되돌아가더군요. 더는 성과를 못 볼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습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이 상세한 보고를 올렸다.
여기저기 포탑도 설치되어 있고 생활공간도 마련된 상태.
식량 문제만 해결하면 당분간은 머무르는 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전력을 강화하려면 이쪽에서도 전략적인 병기가 필요합니다. 혹시 그쪽의 능력으로 제작이 가능한가요?”
전요한이 로건을 향해 눈을 빛냈다.
대장장이 신의 권능을 부여받았으니, 재료만 있으면 뭐든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실은 나도 필요성을 느껴서 설계도만 그려 봤어. 실제로 만들어볼 엄두까진 못 냈지만.”
로건이 그려낸 설계도엔 전함을 비롯하여 각종 병기가 있었다.
직접 고안한 것이지만, 실제 제작엔 어려움이 많이 따른다고 한다.
그 내용은 한쪽 귀로 흘리고 마감일을 정해줬다.
“일주일 내로 완성하세요. 그것이 로건 씨의 임무입니다.”
“헉….”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로건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나설 생각까진 없구나. 저번 전투에서 이미 많은 아이들이 죽어나갔어.”
오필리아는 한쪽에서 혼자 팔짱을 낀 채 도도하게 자기 입장을 밝혔다.
그 모습을 본 시르케가 뒤늦게 나타나며 한마디 했다.
“무슨 말이죠? 가만히 있으면 기계종의 공격을 받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흥, 여긴 아르카디아 대륙이 아니란다. 우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면 최소한의 방비만 할 것이다.”
오필리아를 비롯한 엘프들은 이쪽 세계의 곤란함에 연루되길 싫어했다.
그녀들이 고집을 부리자 시르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식사부터 하죠. 배가 고프니까요.”
그녀는 잠시 사라지더니 요리 도구를 든 채 되돌아왔다.
혼자서 주방 담당을 맡은 것치고는 매우 빠른 속도였다.
“…맛은 괜찮으려나.”
“제 요리 실력을 너무 무시하진 마세요. 그래도 당신보다는 나으니까요.”
노숙 생활에 잔뼈가 굵은 시르케가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번 맛을 봐야겠다 싶어서 간이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대체 무슨 음식이지? 엘프는 숲에서 나지 않는 건 먹지 않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송이 수프를 내려다보며 오필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재료는 거의 숲에서 나는 것일 텐데 한번 드셔 보시죠. 고기는 전혀 안 들어갔습니다.”
스푼을 들어서 한번 맛을 본 후 전요한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오필리아를 비롯한 엘프들은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하나둘씩 시식을 했고….
“이, 이건?!”
“상상하지도 못했던 풍미야!”
“이쪽 세계의 숲에선 대체 뭐가 자라는 거지?”
반응은 매우 열광적이었다.
어쩌면 좋은 교화 수단을 찾은 걸지도…?
현실 세계에 길들여진 엘프의 모습을 상상하며 전요한은 양송이 수프를 떠먹었다.
* * *
엘프 종족이 합세하면서 요새 내부의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갑자기 나무를 심겠다며 떼를 쓰는 경우도 있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성벽 위를 올라갔다 내려왔다.
아무래도 숲속에서의 생활 방식 때문인 것 같은데 정신 사납긴 하다.
“숲의 종족이라더니,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온화한 종족은 아니네.”
“밤에 추워서 불 피우는 것도 뭐라고 해요. 숲의 정령들이 싫어한대서.”
엘프들에게 시달리던 세르게이의 부하들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매사에 호탕하던 로건도 썩 유쾌한 눈치는 아니다.
“특히 저들의 여왕은 제법 콧대가 높더군. 항상 하대하는 말투이기도 하고.”
하지만 공존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긴 하다.
“뭐, 어때. 예쁘게 생겼잖아. 관상용으로 잠시 기르는 셈 치자고.”
전요한이 태평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시르케는 핀잔하듯이 입을 연다.
“역시, 엘프가 취향이었나요? 어쩐지 대미궁에 있을 때부터 제게 자꾸만 달라붙더군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뭐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저만치 떨어지는 시르케를 향해 전요한이 머리를 긁적인다.
“아무튼, 기계종의 본거지는 결코 만만치 않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 만큼 준비를 단단히 해둬야 한다고.”
헛기침을 하던 로건이 이번 작전의 중대함을 강조했다.
시르케는 고개를 끄덕인 후 현재 지역의 지도를 꺼냈다.
“대부분의 생존자는 소도시와 그 인근 지대에 몰려 있을 겁니다. 나머지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현 상황에서 시간적인 여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인근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기계 여왕, 이졸데는 함선을 축조하는 중이라고 한다.
최종병기라 할 수 있는 그것이 완성되면, 나머지 생존자들도 더는 대항하기 어려워진다.
“확실히, 이졸데의 방주는 위력이 어마어마하겠죠.”
“그녀가 정신이 팔려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해요. 전력으로 우리를 몰아붙였으면 지금 살아 있지 못할 겁니다.”
일행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여기엔 이능력자는 없는 건가요? 로건 씨를 제외하고 말이에요.”
문득 뭔가가 떠올랐는지, 전요한이 물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실은 나도 우연히 차원의 틈새에 빨려 들어갔다가 이능력을 얻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은 아마도 그럴 기회가 없었겠지.”
로건은 이쪽 세계에선 마법 문명의 잔재가 거의 없음을 밝혔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는지,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마나의 밀도가 현저하게 낮으니, 이상할 것도 없습니다. 애초에 환경적인 면에서 결여되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주전력은 전요한과 시르케, 그리고 로건뿐이다.
이들이 떠나 있는 동안 나머지는 강화 요새를 지키기로 했다.
“그럼 출발하죠. 작전 수행에 필요한 물품은 전부 트럭에 실으세요.”
더는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전요한이 먼저 대형 트럭에 탑승하자, 구경하던 엘프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저도 갈 겁니다.”
리안.
엘프 여왕 오필리아의 전속 경호원이 우리를 따라나섰다.
“당신은 여왕을 곁에서 지키는 것이 주임무이지 않나요?”
“여왕님의 지시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지켜보라고 하셨죠.”
리안은 허락도 받지 않고 트럭 뒤편에 가뿐히 올라탔다.
그 모습이 꽤나 뻔뻔했지만 별말 없이 내버려 뒀다.
어차피 호구 종족이라 이번 일에 간섭한다 해도 적당히 이용해 먹으면 그만이다.
‘엘프 종족은 서로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고 했었지.’
이제부터 일행의 행동은 오필리아에게 모두 관찰당할 터다.
엘프 여왕은 가장 능력이 뛰어나므로 상당히 먼 거리까지 동족과의 시야 공유가 가능하다.
“저기, 궁금한데 엘프는 청력이 얼마나 좋나요?”
“몰라도 되니까 괜히 치근대지 마세요, 황금망치 뿅뿅이.”
호기심 어린 로건의 질문에 리안은 매몰찬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트럭 뒤쪽에 탑승 중이던 시르케가 풉 하고 웃었다.
“이종족끼리 같이 생활하는 건 여전히 흥미롭군요.”
세계관이 뒤얽히기 시작하면서 이전엔 상상조차 못 했던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중이다.
한껏 기묘해진 분위기.
곧이어 군용 트럭에 시동이 걸렸고 일행은 본격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