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종말의 세계 (2)
“그런데 요리 담당은 누구로 해야 하나? 일단 나는 소질이 많이 부족하다만….”
주방장의 자리를 놓고 로건이 먼저 기권표를 던졌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유력한 인물인 시르케를 쳐다봤다.
“안 됩니다. 시르케는 도전정신이 강하니까요.”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요. 물론, 매번 새로운 걸 추구하는 편이긴 하지만.”
전요한이 딱 잘라서 반대하자 시르케는 절반쯤 인정했다.
그녀의 어깨 위에 매달려 있던 캣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르렁댄다.
“하지만 여기 있는 녀석들보단 요리 솜씨가 나을 거잖아?”
로건은 퓨전음식도 괜찮다며 계속 부추겼다.
결국, 시르케가 나서서 주방 일을 맡게 되었다.
“고급 요리를 선보여야 하는 게 아니라면 제가 하겠습니다. 이래 봬도 경험이 제법 있으니까요.”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훌륭하게 완성된 고기 스튜를 음미하며 로건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건 그렇고, 인근에 기계종의 거점이 있다면서요?”
모두의 식사가 끝나가자, 전요한이 물었다.
정찰을 나왔던 세르게이의 부하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합니다.”
“거기는 인간의 형체를 한 안드로이드들이 있다던데요.”
“안드로이드가 배치된 걸 보면 전략적으로 중요한 장소 같습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기엔 무언가 중요한 게 숨겨져 있을 것 같다.
물론, 요새를 방어하다가 세르게이에게 되돌아간다는 선택지 또한 존재한다.
“한번 살펴보고 오죠. 우리의 목적은 이쪽 세계가 지닌 비밀을 알아내는 거니까요.”
시르케는 탐색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전요한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 정비를 한 후에 떠나자. 가장 경계가 소홀할 타이밍을 노려야겠어.”
만약 기계종의 거점을 기습한다면 가장 적합한 시기는 바로 야심한 새벽.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흉내 낸다고 수면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이 건넨 지도를 보며 두 사람은 침투 계획을 의논했다.
* * *
기계종의 거점은 소도시의 어느 최첨단 연구소였다.
소문에 의하면, 인류를 궤멸시킬 각종 병기를 개발하는 중이라고 한다.
“저기인가 보군요.”
전투용 바이크의 뒷좌석에 탑승한 채, 시르케는 멀리서 보이는 연구소를 응시했다.
그녀가 탐지 마법으로 원격정찰을 시도하려던 때였다.
스르르르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스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뭐지? 우리 말고도 저길 노리는 녀석들이 있는데?”
전요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보니, 기계종에 대항해 각지에서 활동 중인 레지스탕스가 있다고 했었다.
저들이 먼저 소란을 일으킬 것 같으니 일단 구경해 보기로 했다.
“기계종도 만만치 않군. 미리 예상하고 방비를 해뒀어.”
“뭐, 침입사실이 사전에 발각되었나보네요.”
레지스탕스가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유물이 있었다.
[이그드라실의 잔해].
그것을 복원하면 위계 높은 권능자에 맞설 힘을 얻게 된다고 한다.
“세계수 이그드라실이라면 전승을 통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라그나로크]를 일으킨다는 예언이 있죠.”
“근데 그건 아스가르드의 신족과 거인족의 대전쟁 아니야? 기계 여왕하고는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알고 있던 상식과 다르기에 전요한은 의문을 표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르케가 보충설명을 해줬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멸망 시나리오일 뿐입니다. [라그나로크]는 세계를 무로 되돌리고 재복원하기 위한 과정이니까요.”
“그럼 레지스탕스가 문명을 재건하기 위해 그걸 손에 넣으려 한다는 말이야?”
“네, 하지만 그만한 결과를 이루어내려면 다른 요건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잘은 몰라도, 저들의 힘만으로는 무리겠지요.”
기계 여왕, 이졸데의 기세를 꺾으려면 레지스탕스를 도울 필요성이 있었다.
그들이 연구소를 덮친 지도 이제 수어 분이 지난 상태.
외부에서 지켜봤을 때는 상당히 잠잠해진 터라 이제 잠입해도 될 것 같았다.
“슬슬 시작해볼까.”
연구소로 다가서자 경계 임무를 맡고 있던 안드로이드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촤아아악―!
이들은 급하게 외부 지원을 나온 것 같은데, 상대하기 버겁진 않았다.
“조심하세요. 무장세력이 무언가를 깨운 것 같으니까요.”
연구소 내부의 깊은 곳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 * *
스걱! 스걱!
거침없이 마물들을 베어내며 전요한은 최심부로 향했다.
기존의 첨단 설비와 보안 장치는 이미 파괴되어 있고 모든 구역이 피투성이다.
사방에 즐비한 마물의 사체.
이곳은 이종족을 대상으로 한 생체연구도 진행되고 있었던 듯하다.
사라라락―
잠시 멈춰 서서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청아한 빛의 물결이 은은하게 옆을 지나쳤다.
“음…?”
마치 대자연의 정기가 담겨 있는 듯한 색채.
어떤 존재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려던 찰나, 옆구리의 급소를 향해 마법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휘리리릭!
예기치 않은 순간의 기습.
하지만 전요한에겐 피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가볍게 상체를 젖혀 뒤로 물러선 다음,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엘프는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저는 예외인 건가요?”
숲의 종족, 엘프.
어둑한 통로의 저편에는 적당한 굴곡의 늘씬한 여성체가 서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마력을 품은 듯이 보석처럼 빛났는데 이로 인해 신비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우리들의 계획에 방해가 됩니다. 기분 나쁘기도 하고요.”
엘프가 들고 있는 장궁에서 조금 전 스쳐 지나갔던 청아한 물결이 일어났다.
다시금 공격해 오겠다는 의사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엘프 족과의 악연은 딱히 없을 텐데요.”
“…그럴 의무는 없습니다.”
이종족은 신뢰할 수 없다는 듯 엘프의 눈매가 한층 매서워졌다.
더는 대화가 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기에 우선 달려들어서 그녀를 제압했다.
“꺄악!”
거칠게 바닥으로 내쳐진 엘프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에게서 장궁을 빼앗은 후, 기다란 귀에 대고 속삭여줬다.
“제가 악마였다면 당신의 숨은 이미 끊겼을 텐데요?”
여기서 엘프를 죽이면 앞으로의 국면이 조금 성가셔진다.
순순히 따를 것을 권하자 날이 선 목소리가 귀 끝을 간지럽혔다.
“어설픈 회유책은 안 통합니다. 당장 손 떼시죠.”
이번엔 허리춤의 정령검을 뽑아 목에 찌르려 한다.
전요한은 별수 없이 손날로 엘프의 손목 관절을 내리쳤다.
“그만 반항하세요. 저는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습니다.”
“아아, 피나 여신이시여….”
완전히 결박되자 엘프는 자신의 수호신을 찾았다.
에테리아 대륙의 여러 종족을 창조하고 균형과 질서를 관장하던 존재.
그녀는 현재 여기에 없었고 시르케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당신들은 지금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차원을 넘어왔는진 모르겠지만, 기계들과 맞서 싸우세요.”
어째서 엘프족이 이쪽 세계의 인간들과 싸우는 중인지는 불확실했다.
하지만 이종족 간의 분쟁에 [이그드라실의 잔해]가 관련되어 있단 사실은 짐작 가능하다.
전요한은 소심하게 반항하는 엘프를 앞세워 나아갔다.
이따금씩 출몰하는 마물들을 베어 넘기며 나아간 지 수어 분.
마침내 연구소의 최심부에 도달했다.
거기엔 마수(魔獸)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있었다.
알에서 부화한 요르문간드.
신화상으로 녀석은 거대한 뱀인데, 아직은 새끼라서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았다.
“…차원 전쟁이라도 시작했나.”
멸망한 세계다 보니, 각종 차원에서 위협적인 존재들이 난입하는 중이었다.
다만, 요르문간드의 경우엔 아마도 이졸데의 지시로 연구되고 있었던 듯하다.
“잘만 길들이면 이종족을 궤멸시키기에 적당한 병기라고 생각한 것 같군요.”
똬리를 트는 요르문간드를 보며 시르케가 덧붙였다.
녀석의 주위엔 경계심 많은 엘프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이쪽을 바라봤다.
“어? 리안!”
숲의 종족 엘프는 서로에 대한 정신적 의존도가 높아서 종족애가 매우 강하다.
그녀들은 안드로이드와 싸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이쪽으로 원군을 보내왔다.
“리안을 놓아줘라!”
“치한! 변태!”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댔다간 봐!”
졸지에 전요한은 불순한 악당이 되어버렸다.
순간, 어이가 없었지만 리안이라고 불린 이 엘프의 정신 상태를 보니 조금 납득이 간다.
“으으….”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단 것에 대한 불안감.
이로 인한 망상이 마력의 흐름을 통해 동족들에게 전해지면서 오해가 생겨났다.
“여러분의 자매는 놓아드리죠.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헛소리하지 마!”
“우리는 불온한 세력과 타협하지 않는다!”
협상안을 내놓는 도중에도 사방에서 마법 화살이 날아왔다.
조금은 이쪽이 우위에 있다는 걸 보여줄 필요성이 있어 보이는군.
전요한은 아까 빼앗았던 정령검을 리안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저는 불온한 세력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쯤에서 오해를 거두고 함께 기계종과 맞서 싸우죠.”
“그, 그게 조건이라고?”
“어떻게 하지?”
“여왕님도 지금 안 계시는데….”
이쪽으로 다가오던 엘프들이 당혹스러워하며 수군거렸다.
그녀들이 주저하는 것을 확인한 후, 먼저 리안의 구속을 풀어주었다.
“거래는 성립한 것으로 간주하죠.”
“…….”
자유의 몸이 된 리안에게서 차가운 눈빛이 감돌았다.
자신을 팔아먹은 것에 대한 항의를 하고 싶은 모양.
하지만 끝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리고 동족에게 돌아갔다.
“리안, 괜찮아?”
“어쩌다가 저런 저질의 손에 붙잡힌 거야?”
“이세계는 항상 위험으로 가득하단 걸 잊지 말아야지!”
엘프들은 아까부터 나와 투덕거렸던 리안을 상당히 아끼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엘프 여왕인 오필리아의 전속 수행원.
아직 오필리아는 구석지의 차원문을 통해 이쪽으로 넘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차원문의 매개가 된 것은 [태고의 정령석].
여신 피나가 숲의 종족인 엘프에게 맡겼다고 전해지는 유물이었다.
물론 본래의 능력은 상실하고 겨우 형체만 유지하는 수준이다.
엘프족과 함께 싸우며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조그마한 형체로 바닥을 기던 요르문간드가 고개를 쳐들며 섬뜩하게 울부짖었다.
키야아아아악―!
알에서 부화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요르문간드는 아직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명색이 미드가르드의 세계뱀이라고 불리는 마수(魔獸).
흑랑(黑狼) 펜리르와 그 격이 같으며 일전에 릴리스가 소환했던 레비아탄의 전력과 필적한다.
“전승신화에 의하면, 요르문간드는 모든 형태의 마법에 면역이라고 합니다.”
시르케가 자신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임을 밝혔다.
그녀의 말대로 요르문간드를 상대하려면 접전을 벌여야 했다.
쏟아지던 마법 화살이 모두 무력하게 형체를 잃자 엘프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바다뱀이 아니었잖아?!”
“지, 징그러워….”
“우리들의 주무기는 장궁인데….”
허리춤에 휴대하는 정령검은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엘프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저만치서 눈치만 보고 있던 무장세력이 공격 신호를 내렸다.
타탕! 탕! 탕!
상당수가 재래식 무기인 소총과 닮아 있었고 위력이 제법이었다.
“나의 애완동물을 사냥하려면 최소한 신격의 권능을 지닌 무구가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인간들아.”
벽면에 기대어 잠들어 있던 안드로이드가 용병들을 향해 비웃어 보였다.
기계 여왕, 이졸데.
그녀는 자신의 권속들을 통해 이처럼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