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종말의 세계 (1)
포로수용소가 위치한 중간 층을 정리하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하, 한 번만 봐주세요!”
딱히 뒤늦게 비는 녀석들을 봐준 것도 아니었다.
전부 똑같은 부류라 여겼기에 무슨 짓을 하고 있든 박살을 내주었다.
정리를 끝내고 보니 혼자서 무술 영화라도 찍은 기분이다.
“커헉….”
“사, 살려줘….”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을 기는 소인배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너무 날뛰긴 했네요.”
시르케가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사실, 그동안 조금 스트레스가 쌓여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휘두르는 주먹에 조금 사심이 담긴 면이 없잖아 있으리라.
물론, 먼저 선을 넘은 것은 저들이니 딱히 미안한 감정은 들지 않았지만 말이다.
끼이이익.
포로들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전부 풀어줬다.
저들 중에도 못마땅한 부류가 있을 테지만 지금 그걸 일일이 구분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상당수의 포로들에게서 호의 어린 눈빛을 받았다.
영웅놀이를 하긴 싫었기에 그들과는 가급적 말을 섞지 않았다.
“…….”
어색하기만 하니 슬슬 자리를 떠야겠다 생각하던 때였다.
상황 보고를 위해 갖춰져 있던 무전기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단하군. 여러 의미로.
세르게이.
이쪽 집단에서 대장님이라 불리던 자였다.
“드디어 말을 거는군.”
- 네 실력이 어떤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상외로 제법이구나.
세르게이는 전요한의 실력을 순순히 인정해줬다.
부하들의 실책에 사과하며 대화를 유도한다.
- 의뢰주를 찾아왔다고 들었다. 그래도 힘들게 여기까지 왔으니 만나서 대화하고 가는 편이 좋지 않겠나?
실력이 있으면 일단 포섭한다.
그것이 세르게이의 방식이었다.
“좋습니다, 한번 만나죠.”
그렇게 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향했다.
“대장님께서 기다리고 게십니다.”
대기 중이었던 여직원이 정장을 입은 채로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
꼭대기 층은 흡사 고급 레스토랑과도 같았다.
본래 푸드 코너였던 것을 여러모로 개조한 듯하다.
“자리에 응해줘서 고맙군.”
여직원의 안내를 따라 다가가자 자리에 앉아 있던 세르게이가 먼저 인사를 해왔다.
그는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제법 비싸 보이는 스테이크를 천천히 썰고 있었다.
“상당히 여유로워 보이는군요.”
“최선이 기다리는 일이라면 그 시간을 적절히 보내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지.”
이렇게 만나 보니 중세 시대 귀족같이 느껴진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에 그의 가문은 상당한 재벌가였다고 한다.
“골치 아픈 일이라도 있습니까? 저희가 해결해드릴 수 있습니다만.”
이 기회에 의뢰를 받아 내야겠다 생각한 로건이 말했다.
“주문부터 하는 게 어떤가? 아까도 말했듯이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세르게이는 대답 대신 뭔가를 내밀었다.
가격표가 적혀 있지 않은 메뉴판.
애초에 최상층은 그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마련된 곳이었다.
대충 메뉴를 고른 일행은 세르게이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다.
“어떤 거래를 제안하는 거죠?”
“적색지대로 정찰을 나갔던 부하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졸데의 군대에 포위당한 모양이더군.”
이졸데는 이쪽 세계에 실질적으로 지배권을 행사 중인 기계 여왕이었다.
타천사 예카자엘에 의해 소환된 그녀는 한 달 만에 기존의 문명을 멸망시켰다.
이후로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생존자 무리를 소탕해 왔는데, 한번 걸리면 끝까지 추격해 온다고 한다.
“방랑자에게 맡기는 의뢰치곤 너무 위험한데요.”
“보상은 얼마든지 주겠네. 급박한 상황인 만큼 잠시 이쪽의 전력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군.”
아까 소란을 일으킨 걸 눈감아주는 건 물론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 수단을 확보하는 건 중요한 일.
잠시 고민하던 전요한은 의뢰를 수락하기로 했다.
“좋습니다. 기계 여왕의 군세를 한번 구경하러 가보죠.”
* * *
여직원의 공손한 인사를 받으며 일행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오자 무장한 사내들이 모여 있는 게 보인다.
“…….”
“…….”
대장의 명령만 떨어지면 곧바로 달려들 기세였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상점을 나서자 전투형 바이크가 한 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세르게이 님의 호의입니다. 부디 잘 써먹으시길.”
장사꾼으로 보이는 사내가 재원을 읊었다.
마력이 상당해서, 기계수들의 추격을 손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다.
휘이이이잉.
전요한은 멋진 자세로 바이크의 운전대에 올라탔다.
“어서 타.”
“알겠습니다. 개인적으로 탑승감이 궁금하군요.”
고개를 끄덕인 시르케가 뒷좌석에 앉았다.
로건은 자신의 트럭을 운전하며 함께 이동하기로 한 상태.
그렇게 해서 빠른 속도로 시가지를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크드드드득!
어디선가 나타난 기계수들이 무리를 지어 일행을 바짝 추격해오기 시작한다.
* * *
황폐해진 시가지를 배경으로 급박한 추격전이 이어진다.
전방의 기계수들은 전투형 바이크를 운전하는 전요한이 직접 제거했다.
콰드드득!
아르티나 끝에서 응집된 한기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
그것에 당한 기계수들은 얼어붙어서 더는 뒤따라오지 못했다.
“저번보다도 위력이 증가했군.”
마법검이다 보니, 아무래도 소유자의 마력 스탯에 비례한 파괴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시르케가 화염 마법을 시전했다.
콰아아아앙!
인근의 차량으로부터 새어 나오던 휘발유에 불이 붙으며 거친 폭발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몰려들던 기계수들 중 상당수가 파괴되는 전과를 거둔다.
“다들 전투 감각은 나쁘지 않은데? 좋은 파트너가 생겼어.”
나쁘지 않다고 여겼는지, 로건이 입에 발린 말을 했다.
이후 그는 다시 전방을 바라보며 이쪽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졸데는 폐허가 된 도시를 기계화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있어. 그래서 어디든 기계수들이 넘쳐나는 거지.”
기계종의 생태계가 점차 구축되어 갈수록, 생존자들은 더욱 살아남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모두의 바람은 이졸데를 쓰러뜨리는 데 있었다.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죠?”
“[이졸데의 방주]를 노리는 것 말곤 없어. 그녀는 그 함선을 모체로 삼고 있으니까.”
오래전에 강철의 여신, 이졸데는 드넓은 은하를 떠돌며 여러 종족을 정복해 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이쪽 행성에 머무르는 중이라고 한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두도록.”
멀리서 외곽의 산업 단지가 보이자 로건이 미리 주의를 주었다.
주위로 몰려드는 기계수의 개체 수도 점차 늘어난다.
전요한은 일거 소탕의 필요성을 느꼈다.
콰아아아앙!
검격으로 인한 충격파에 의해 기계수들의 몸체가 구겨지듯 오그라들었다.
눈앞의 상황이 정리되자 로건이 속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선회하듯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정지하는 트럭.
그 너머에선 세르게이의 부하들이 정신없이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더 몰려오는 거야?!”
“이대로는 우리가 먼저 지쳐버릴 것 같아!”
개중엔 불만을 늘어놓는 녀석들의 모습도 보인다.
“어? 지원군이다! 무전 연락을 받고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이쪽을 발견한 사내가 격렬하게 손을 흔들었다.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군요.”
점점 무너져 내리는 상대 진영을 보며 전요한은 혀를 찼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전력은 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힘들어할 줄은.
바리케이드로 형성된 거점을 지켜내기 위해 서둘러 가세했다.
“아무래도 이졸데인가 하는 그 기계 여왕이 이쪽으로 화력을 집중하는 것 같군요.”
잠시 전황을 살피던 시르케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출몰하는 기계수들의 규모가 점차 늘어나는 상황.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나름의 대책이 필요할 터다.
“이렇게 된 이상 더 강력한 거점을 구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강력한 거점?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거죠?”
로건의 말에 전요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모두를 응시하는 로건.
황금 망치를 소환하더니 사방에 널브러진 기계수의 파편들을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다.
대장장이 신, 나인클리프의 권능.
드물게도 그는 이세계의 권능자에게 선택받은 상태였다.
파손된 기계수들의 몸체도 황금빛 망치질 몇 번이면 무결한 합금 재료가 된다.
“흥미롭군요. 이런 식으로 무식한 생산성을 보여주다니.”
현재 진행 중인 축성 작업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지 시르케가 한마디 했다.
세르게이의 부하들은 부피가 제법 나가는 합금 재료를 지게차에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그러게. 한편으로는 일용직 노동자가 된 기분도 들어.”
바리게이드 쪽에서 전투를 벌이던 전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축성 작업에 동원된 인원은 설계자인 로건 알렌을 포함한 셋.
나머지는 그와 함께 몰려드는 기계수들을 처리하고 있었다.
스걱! 스걱!
전투에 참여하는 인원의 숫자가 줄어들어서 최전선을 지켜내기는 매우 힘들었다.
“강화 요새는 축성이 얼마나 더 걸려요? 여유가 이제 별로 없는 것 같은데요.”
침착한 움직임으로 기계수들을 베어 넘기던 사내가 물었다.
치열했던 기계수와의 접전 탓에 부상자가 늘어나고 있는 상태다.
“예정보다 축성 작업을 더 빨리 완료해야 할 것 같다. 기계 여왕이 더욱 많은 군세를 보내오고 있을 테니까.”
현재 일행이 작업 중인 강화 요새는 제법 규모가 컸다.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을 넉넉히 하여서 앞으로의 공방전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최대한 노력해 보죠. 인근 지대의 인력을 동원해서라도 말이죠.”
전요한이 산업 단지의 곳곳에 숨어있는 일용직 노동자들을 살폈다.
이들은 기계수의 침공을 피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에 무리별로 흩어져 있었다.
“저들까지 끌어들일 생각까진 없었는데, 결국 그래야겠네요.”
다시금 몰려드는 기계수들을 상대하던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두 사람은 협력하면서 일용직 노동자들을 구출해왔다.
* * *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단순한 운반 작업만 시킬 거니까 더는 인원을 늘릴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어느덧 모인 상당수의 일용직 노동자들.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해서 축성 속도엔 한창 박차가 가해졌다.
“후우… 힘들었네요.”
“이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
막 완성된 강화 요새 내부로 일행이 들어섰다.
시르케가 축 늘어지며 합금 재질의 차가운 내벽에 몸을 기댔다.
“기력을 되찾은 후에 저녁 준비를 하죠. 날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전요한은 출입구가 빈틈없이 봉쇄된 것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곧 내부 포탑이 설치될 자리에 걸터앉았다.
급한 대로 완성하느라 강화 요새는 아직 내외부의 설비가 많이 부족한 편이다.
“저녁 준비라면… 식량은 있는 거야? 저기 뻘쭘하게 서 있는 인부들도 뭔가 먹여야 할 텐데.”
오늘의 작업량을 마친 로건이 걱정을 표했다.
“혹시나 해서 소도시로 갔을 때 비상식량을 챙겨뒀어. 이걸로 일단 당장의 끼니는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전요한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헌터 전용의 백팩을 소환했다.
여기에 물건을 집어넣으면 마치 다른 차원에 진입한 것처럼 그 부피가 현격히 줄어든다.
그래서 꽤나 많은 양의 수납이 가능했고 일행은 비상식량의 종류에 감탄했다.
“와아… 혼자 어디 가서 놀다 온 건 아닌 모양이네요.”
“대부분 동네 마트에서 파는 식재료 위주이지만… 스튜 정도는 끓여먹을 수 있겠네.”
특히 허기가 잔뜩 져 있던 시르케와 로건이 눈을 빛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