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성녀의 기적 (6)
‘드디어 돌파구를 찾았다.’
이제 전요한은 시련의 예외자에 해당했다.
누구든 그의 도움을 받아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아르켄 화로’에 구운 몬스터 요리를 나눠줘도 룰을 위배한 것이 아니었다.
“서, 성녀님….”
“사실 믿고 있었습니다. 구원의 손길이 찾아오리란걸요.”
‘아르켄 화로’를 통한 무상 배식이 다시 가능해지자 상황은 즉시 반전되었다.
변덕스러운 민심을 실감하며 시르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이지 하루에도 이랬다저랬다 하는군요.”
조금 씁쓸한 현실이긴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로써 소악마가 패배를 인정했으니까 말이다.
“으으… 어쩔 수 없군요. 주인님이 먼저 떠나셨으니 저도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요.”
허탈한 표정을 보니, 더는 얄궂은 수작을 부리지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성녀 마케팅은 다시금 막강한 원동력을 되찾았다.
죄악의 사도가 되었던 자들도 회개하며 속죄를 약속했다.
절대선의 성역은 지역구를 점차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곳곳에 신성력이 넘쳐나자, 타천사가 생성했던 결계도 결국엔 와해되어버렸다.
옥신각신하던 끝에 며칠간의 악몽이 끝난 것이다.
위협 요소가 모두 사라지자, 일행은 모여서 소소하게 잡담을 주고받았다.
그동안 고생해야 했던 것 때문에, 어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잠이나 푹 잘 거야.”
“난 목욕부터 좀 할래.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편하게.”
지친 표정의 채린과 메이가 각자 자신의 소망을 말했다.
한편, 그 옆에 있는 메르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이번 일로 현실적인 딜레마에 대해 고민이 많아진 탓이리라.
‘그건 그렇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전요한은 허공에 아직도 남아 있는 차원 통로를 올려다봤다.
폐허가 된 시가지 위로 흉물스럽게 남아 있어서 어지간히도 신경이 쓰인다.
“따라가면 상당히 고생하게 될 겁니다. 어쩌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죠.”
시르케가 차원 통로 너머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했다.
일찍이 타천사는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켰다고 알려진 존재.
다시 말해서 저곳은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함께 가지 않을래, 시르케?”
“분명 당신에게만 허락된 초대라고 들었습니다만.”
“주어진 선택지 따윈 거부하면 돼. 녀석이 그렇게 말했잖아?”
씨익 웃어 보인 전요한이 손을 내밀었다.
위원회에서 보낸 검은 차량들이 주위로 몰려들고 있다.
“하아, 당신은 어째서 저를 이렇게 고생만 시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쪽 세계를 더 여행하려던 시르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전요한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정말로 떠날 거야?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채린이 다가오며 가슴에 손을 모았다.
그녀는 전요한이 떠나길 원치 않는 표정이다.
다른 일행도 비록 말은 안 하지만 한결같은 마음이었다.
“금방 돌아올게.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야.”
타천사는 분명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녀석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로부터 현세의 혼란을 막아낼 방법을 알아낼지도 모르는 일.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을 느끼며 전요한은 시르케를 안아 들었다.
“단번에 내부로 진입할 거니까 꽉 붙잡아!”
“알겠습니다!”
이윽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두 사람은 소용돌이치는 차원 통로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 * *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콘크리트 도로만이 끝없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전요한은 옆에 쓰러져 있는 시르케를 깨웠다.
“일어나, 어서.”
“으음…”
시르케는 눈을 비비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군요.”
“이미 멸망한 세계라면 딱히 이상할 것도 없겠지.”
아마도 이곳은 타천사 예카자엘이 멸망시킨 차원 중 하나일 터였다.
녀석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재해를 일으키고 다니는 걸까.
의문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은 도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존자는 있지 않을까? 척박한 환경이지만 말이야.”
“가능성은 있습니다. 일단 주위 탐색을 해보죠.”
지평선을 보며 한참을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 낯선 존재가 두 사람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스팀펑크 장르에서나 볼 법한 기계병기.
녀석은 다짜고짜 경보음을 울리더니, 총알을 난사했다.
타다다다다다다!
위협을 느낀 시르케가 결계를 형성하며 방어에 집중했다.
“신기한 존재로군요.”
마치 의지를 지닌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일단은 부수고 보자고!”
흥미롭게 지켜보던 전요한이 아르티나를 휘둘렀다.
냉기 어린 검기가 날아가서 기계병기의 움직임을 구속했다.
삐리리리.
녀석은 도움을 요청할 셈인지 어딘가로 전파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검격에 의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이건 모든 기능을 관할하는 핵심부인 것 같군요.”
시르케는 흩어진 파편을 뒤적이다가 보석 같이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코어를 발견했다.
자율운용동력장치.
기계종의 심장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어이, 꽤나 하는데?”
이것저것 조사하는 두 사람에게 낯선 사내가 다가왔다.
로건 알렌.
이쪽 세계의 몇 안 되는 생존자들 중 한 명이었다.
서로 통성명을 한 후, 그는 곧 다가올 위험을 예고했다.
“저 녀석이 지원 요청을 했으니 조만간 기계수들이 몰려올 거야. 어서 도망치는 게 좋을걸?”
그로부터 얼마 후.
멀리서부터 자욱한 안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놈의 말대로, 기계수들이 성난 기세로 이쪽을 향해 이동해오고 있다.
“어서 타. 안 그러면 버려두고 가버릴 테니까.”
운전대를 잡은 로건이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르케와 함께 트럭 뒤에 탔다.
“달라붙는 기계수들 좀 제거해줘. 탑승료는 그걸로 받도록 할게.”
기계수들 중엔 기동에 특화된 녀석들이 있었다.
놈들이 거리를 좁혀 오자, 시르케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치지지지직!
쇠사슬처럼 뻗어나가는 전격 마법이 기계수들을 일시에 침묵시켰다.
“제법 하는걸? 역시 호의를 베풀길 잘했어, 하하하!”
로건 알렌은 뭐가 그리 좋은지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가다 보니 미쳐버린 건가.’
아무튼, 현지의 조력자가 생겼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대체 원동력이 뭐죠? 엔진 구동도 안 느껴지는 게 마치 테슬X의 전기차 같은데.”
“후후, 마력(魔力)입니다. 일단 기계종의 코어장치를 흡수하는 식으로 충당하고 있죠.”
시르케의 질문에 로건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계종이 넘쳐나는 세계에서는 연료 걱정 따윈 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전요한은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시간 좀 돼요? 이방인이라서 모르는 게 많아요.”
“물론이지. 일단은 내가 머무르는 거처로 가자고.”
황야를 가로질러서 가다 보면 소도시가 나온다고 했다.
지구의 현생 인류과 비슷한 문명을 꽃피웠던 이계인들.
어떤 의미에선 한 단계 진보했었지만, 지금은 기계종에 의해 모든 게 상실된 상태였다.
“흥미롭군요. 이 차원에 서로 유사한 문명이 존재한다니.”
“게다가 인종도 비슷해. 어쩌면 기원이 같을지도 모르겠어.”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은 로건의 지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 *
소도시의 풍경은 종말에 가까웠다.
시가지엔 개별 행동하는 기계수만 보이고 이따금씩 차량 탈취를 하려는 무법 세력만 만났다.
거처라고 하기엔 조금 위험한 구석이 많은 구역이다.
“정말로 이런 데서 살아요?”
“여기가 그나마 안전한 곳이야. 바깥엔 온통 기계수뿐이라고.”
로건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험악해 보이는 자들도 금방 친해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근거지가 될 만한 지점을 살펴봤다.
“이봐, 친구. 아마도 방랑자 같은데 이쪽 집단에 합류하지 않겠어?”
허름한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경비를 서던 한 놈이 곧바로 제의를 해온다.
“그쪽은 세력이 얼마나 되죠?”
“100여 명 정도. 우리 대장님은 능력만 있으면 대우해주는 분이시니까 늦게 들어와도 별문제 없어.”
일단 100여 명이란 것만 놓고 봐도 저들의 우두머리는 제법 수완이 좋음을 알 수 있다.
터를 잡은 위치도 나름 괜찮고, 싸움 실력도 제법일 것 같다.
마침 로건이 의뢰주를 찾는다기에 한번 접촉을 해보기로 했다.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내부 인원으로 받아주죠?”
“따라와. 그다지 상대하기에 어렵지는 않을 거야.”
사내는 등을 돌린 채 저만치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먼저 탔다.
“누구를 상대하는 거죠?”
“포로들 중 전투력이 제법 있는 놈들을 뽑게 되어 있어. 얼마 전에 무리끼리 쟁탈전이 벌어졌거든.”
무정부 상태를 자주 겪다 보니 무슨 일이 있었을지 뻔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생존자 집단끼리 맞붙는 건 영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곳의 세력 분포를 좀 알 수 있을까요?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요.”
“…세력 분포라. 그런 건 확실히 경계가 그어진 게 아니야. 하지만 유력한 집단은 조금 있지.”
사내는 마침 심심했었는지 이런저런 수다를 떨어댔다.
녀석의 말에 의하면 여태까지 자리 잡은 세력은 크게 셋.
그리고 식량이 많이 보관된 지역에서 격전이 자주 벌어진다고 한다.
“생존 문제 때문이군요.”
“우리도 충분한 양을 확보하러 상당수가 거기로 나가 있어. 되도록 약탈은 하지 않고 물물 교환을 하지.”
“하긴, 여기엔 유용한 상품이 많이 있겠네요.”
“대장님의 판단력이 좋았던 거야. 이쪽은 침입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니까.”
대형 마트를 점거한 세력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거의 매시간 전투가 반복될 터다.
가장 중요한 자원이 집중된 곳이긴 해도 유지비가 많이 든단 단점이 있었다.
꽤나 전략적인 판단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님과 만나 뵙고 싶네요. 혹시 어디에서 뭘 하던 분인지 알 수 있습니까?”
“미안, 대장님에 대한 발설은 사내 규정에 위배돼. 잘못하면 기계수들과 싸우는 임무에 매일 투입될 수도 있어.”
여기에서 대장이란 자의 존재는 가히 절대적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서 사내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있었으나 좀 더 참기로 했다.
“혹시 포로수용소가 중간 층인 이유라도 있나요?”
“아아, 거기가 가장 불필요한 게 많이 모여 있던 곳이야. 아동 용품 위주라 대장님 지시로 정리했지.”
사내는 직접 보여 주겠다는 듯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를 따라 걷자 백화점 내부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참혹한 공간이 나타났다.
“말이 포로수용소지, 사실상 시체 처리장이야. 대장님은 이런 데 비용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으시거든.”
철창에 갇힌 채 죽어가는 포로들을 보며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이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지저분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여긴 올 때마다 기분이 나쁘네. 잘못하면 놈들에게서 역병이라도 옮겠어.”
상처가 심한 자들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고립 상태.
한구석에선 발정 난 녀석들이 누군가를 상대로 지저분한 짓을 벌이고 있었다.
“…이건 좀 참기 어려운데.”
아무리 잠입 중이라고 해도 선을 넘는 무법 행위까지 방관할 생각은 없었다.
단순히 정의감이나 영웅 심리에서라기보단, 이러한 악의가 주위에 못한 영향을 주는 까닭이다.
본보기를 보여 줘야겠단 판단이 서자 곧바로 옆에 있던 사내의 얼굴에 주먹부터 뻗었다.
퍼억!
코뼈가 으스러진 사내가 피를 흘리며 그대로 나자빠진다.
“잠깐, 나는 의뢰를 받으러 온 거라고?”
당황한 로건이 전요한을 만류하려 했다.
그러자 시르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따진다.
“이런 무법자들을 내버려 두면 당신도 언젠가 뒤통수를 맞게 될 겁니다. 능력이 좋은 지도자라고 해도, 질 나쁜 범죄까지 용납해선 안 되죠.”
로건은 더는 반박하지 못했다.
실은 그에게도 여동생이 있었는데, 무법자들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책임지라고. 손해 안 보고 나오려면 놈들의 금고를 털어야 해.”
“알겠습니다. 후우….”
날뛰기에 앞서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 한 무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봐, 지금 장난해?”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아?”
전부 별것 아닌 소인배들이다.
그래서 아르티나를 역소환한 후 주먹을 불끈 쥐어 올렸다.
“당신들에겐 눈높이 교육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한번 서열 정리를 해볼까.
가장 먼저 달려드는 불량배를 향해 전요한은 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