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성녀의 기적 (5)
사실 그 부분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다들 상황에 몰입하여 깨닫지 못했다.
“지금부터 죄악의 사도들을 처형하겠습니다. 다들 타락한 이들의 말로를 잘 지켜보세요.”
소악마를 무시한 채, 전요한은 근엄한 표정으로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각각의 화형대 앞에 서 있던 처형자들이 차례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사, 살려줘!”
몸에 뜨거운 열기가 붙자 사도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주위의 누구도 그것을 동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가 박수갈채를 보냈다.
“다들 기뻐하세요! 그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죄악의 무리가 정화되고 있습니다!”
“저렇게 되고 싶지 않으면 회개하세요! 어리석게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지 맙시다!”
어떻게 보면 광기에 가까운 반응.
성녀 역할을 하던 메르첼도 비위가 상했는지 표정을 굳혔다.
“…….”
하지만 이번 화형식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죄악의 강림과 관련된 무대를 와해시키려면 절대선의 광기도 동원해야 했으니까 말이다.
물론이게도 그 파급 효과는 매우 컸고 모두가 절대선의 진영에 서려고 했다.
“지금이라도 회개할게요, 성녀님!”
“속죄를 하고 싶습니다!”
성당 구역은 이제 인구가 너무 많아져서 발 디딜 틈조차 없게 되었다.
그러자 신도들은 공간 확보를 위해 외곽 쪽에 새롭게 종교적인 건축물을 지었고 이런 식으로 성역화는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돌발 미션, ‘성역의 수호자’를 클리어했습니다.]
[경이로운 업적! ‘구원의 부름’을 획득했습니다!]
[구원의 부름]은 한시적으로 권능자의 이목을 불러 모으는 유물이다.
하지만 꼭 간택을 받기 위한 용도로만 쓰이는 건 아니고 곤란한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테니 잘 보관해두는 것이 좋겠다.
“그 미션을 클리어해 버리다니, 저도 손발 다 들었네요.”
어느새 나타난 소악마가 나를 향해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역구의 절반 이상이 이제 절대선의 성역으로 형성된 상황.
다시 말해서 절대악은 주도권을 잃었고 그 추종자들도 몰락하여 더는 대항해오지 못하는 중이다.
“다음 미션은 그래서 뭘로 할 거지? 분명 난이도를 높인다고 했었는데 말이야.”
“원래는 디펜스 시나리오를 주고 도전자들이 각자의 성역을 구축하도록 할 생각이었는데… 이래선 의미가 없네요.”
의미가 없다는 건 소악마의 목적대로 되기 어렵단 말이다.
즉, 녀석이 원했던 결과는 죄악의 성역이 확장을 거듭하여 더 큰 무대를 만들어내는 것.
하지만 절대선의 성역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건 실현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우리를 이간질시킬 건가?”
“솔직히 그것도 힘들어 보여요. 해서 고민해 봤는데, 이게 가장 좋은 것 같군요.”
[메인 미션 #3]
명칭: 독자 생존
내용: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고 위협으로부터 생존하시오
제한: 타임어택 (7일)
보상: 성적에 따른 차등 분배
기타: 실패 시 데스 매치
소악마가 꺼내 들 수 있는 최후의 카드.
어느 정도 예상하였으나 막상 당하고 보니 곤란하기 짝이 없다.
지금까지 성녀 마케팅이 성공했던 이유는 바로 구원의 가능성이 크게 어필되었기 때문이다.
즉, 메르첼을 성녀로 믿고 추종하는 세력이 존재한단 걸 전제로 하는데 이것은 그 근간을 뿌리째 뒤엎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여태껏 구축해왔던 성역은 유지하기 어려워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순 없었기에 소악마와 마지막 결판을 했다.
“만약 이것까지 무마시키면 너도 적잖이 곤란해지겠지?”
“아마도요. 그땐 깨끗하게 물러나고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습니다.”
죄악의 강림과 관련된 무대에서 절대악이 완전히 짓밟히면 미션 시나리오는 끝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소악마도 이것이 마지막이란 점을 순순히 인정했다.
“좋아, 내가 증명해주지. 절대악은 이 무대에서 절대 득세할 수 없다는 걸.”
“음… 행운을 빌게요.”
다른 상대였다면 콧방귀를 뀌고 무시했겠지만 소악마는 감히 그렇게 대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후 전요한은 미션 정보창을 보고 경악하는 일행을 향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이 시간부로 모두 개별 행동을 해주세요. 앞으로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진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 * *
세 번째 메인 미션이 시작되고 난 후 분위기는 처참하게 바뀌었다.
타인과의 협력이 불가능했으므로 서로 말조차 주고받지 않았고 무상 배식도 중단되었다.
인기를 끌어왔던 성녀 마케팅은 사실상 한계에 달한 셈이다.
하지만 메르첼은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는지 마지막으로 신도들에게 말을 건넸다.
“이제 각자가 시련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고독한 싸움이 되겠지만 반드시 신념을 지켜주세요.”
가장 큰 골칫거리는 식량 문제일 것이다.
‘아르켄 화로’를 지니고 있는 건 오직 전요한뿐이므로 나머진 몬스터 고기를 조리해 먹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식량 자원은 엄청나게 희소해져 버렸고 생존자 대부분이 굶는 처지에 이르렀다.
“먹을 게 없어….”
“배, 배고파….”
당장 굶고 있는데 신앙심이 유지될 리 없다.
그토록 열광했던 신도들의 물결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남아 있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건 성녀님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구나.”
“신앙심에만 의존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야.”
절대선의 성역은 점차 황폐해지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서 죄악의 씨앗이 다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가진 거 다 내놔!”
“반항하면 죽인다!”
생존은 무엇보다 절대적인 과제였다.
그것을 등한시하는 자는 전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협력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허용되어야 하는데.’
그나마 최선의 방법은 죄악의 길로 들어선 자들을 처단하는 것이다.
단독 심판은 협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절대악에 대한 유일한 견제 수단이었다.
“사, 살려줘!”
“먹을 게 없었단 말이야!”
“으아아악!”
동료들도 같은 결론을 내렸는지 엄격한 심판자 역할을 자처했다.
성녀 역할을 맡았던 메르첼만은 끝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나 그녀도 희망이 없단 건 알았다.
어느덧 그 수가 많이 늘어난 죄악의 사도들.
생필품 지급을 보장하는 돌발 미션이 신도들을 변절하게 했다.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흐름처럼 되어가는 중이었다.
“이번엔 다들 체념한 건가요?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니까 결국 본성이 드러나는군요!”
허공에서 현장을 지켜보던 소악마가 비웃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로 신앙심이 굳건했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성녀님도 딱하게 되었네요!”
사방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들려오고 날붙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무간지옥처럼 변해버린 공간.
제법 괜찮은 무대라고 여겼는지 다른 소악마가 구경을 나왔다.
“의외로 이쪽 세계도 별것 없군요? 죄악의 강림을 막아냈다고 해서 솔직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허공에서 현장을 지켜보던 소악마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나저나, 이런 식이라면 얼마 못 버티겠는걸요? 비록 규모가 아직 작긴 해도 방심하면 곤란하답니다.”
무대를 감싸고 있는 돔 형태의 투명한 결계.
소악마가 가리킨 방향을 본 전요한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어엇?”
지금까지 조용하던 타천사가 허공으로 날아올라 있었다.
모든 상황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마치 최후의 심판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마음에 안 드네, 정말.”
순간 전요한은 한판 붙고 싶어졌다.
완전한 형체로 강림한 녀석이라 최대한 유리한 상황에서 싸우려 했지만.
‘이대로는 공든 탑이 전부 무너지고 만다.’
동료들이 절망감에 휩싸여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오랜 여정 끝에 되돌아온 지구가 놈의 손에 놀아나는 꼴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타오르는 전의와 함께 전요한은 각성 모드로 돌입했다.
“건방진 자식!”
등 뒤로 뻗어 나간 불사조의 날개가 한 차례 펼쳐졌다.
“그 잘난 얼굴을 지금 깔아뭉개 주마!”
자세를 취하던 전요한이 허공으로 한껏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타천사를 향해 거침없는 검격을 날렸다.
티잉!
하지만 튕겨지는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크윽!”
압도적인 위세에 밀린 전요한이 입가에 피를 흘렸다.
각성을 했다고 해도 상대는 준신급의 위계에 해당하는 존재.
인간의 몸으로는 온전히 감당해내기 어려웠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아직은 맞설 때가 아닙니다!”
지상에서 바라보던 시르케가 다급하게 외쳤다.
채린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도 무모하다며 말려 보지만, 전요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네놈이 던져주는 선택지 따윈 거부하겠어! 나는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거다!”
현실적인 문제를 피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강건한 의지를 불태우는 전요한.
그의 머리 위에 원반 형태의 표식이 나타나자, 타천사는 서서히 눈을 떴다.
“…내 이름은 예카자엘. 위선적인 창조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긍지 높은 천사.”
타천사가 입을 열며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요한이 말없이 노려보는 동안, 생존자들은 경외 어린 마음으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내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천계에서 추방된 후, 인간들은 줄곧 나를 모욕하고 조롱하며 갖은 야유를 보내왔다.”
타천사의 눈동자에 희미한 살의가 드리웠다.
그 시선은 눈앞의 전요한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게 도전하는 자여, 묻겠다. 그대가 시련을 거부하는 이유는 뭔가?”
타천사는 오로지 전요한의 언행에만 반응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며 시르케는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을 건가요, 여기까지 온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전요한이라면,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었다.
“왜 거부하냐고? 나는 그저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며 이래라저래라 하는 놈들이 싫어!”
“지배를 거부한다는 의미인가?”
“그래, 남의 운명을 쥐고 흔드는 녀석들이 있는 한, 나의 투쟁은 멈추지 않아!”
말을 마친 전요한이 다시 한번 타천사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미약한 균열이 투명한 장벽에 발생한다.
타천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대는… 변혁자다. 아직 미숙하지만, 곧 진정한 사명을 깨닫게 되겠지.”
“변혁자라고?”
“잊지 말지어다. 변혁은 혼돈과 함께 찾아오는 것임을. 그대가 깨부수는 건, 심연이 아니라 위선적인 질서다.”
타천사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딘가로 향하는 차원 통로가 생겨난다.
“궁금하다면, 시련을 모두 마친 후에 넘어와라. 오직 그대에게만 보여줄 것이 있으니.”
의문의 말을 남긴 채, 타천사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동시에 미션정보창이 새롭게 갱신되었다.
[메인 미션 #3]
명칭: 독자 생존
내용: 누구와도 협력하지 않고 위협으로부터 생존하시오
제한: 타임어택(7일)
보상: 성적에 따른 차등 분배
기타: 실패 시 데스 매치, 예외(전요한)
다른 건 전부 똑같은데, 예외 대상에 한 명이 추가되어 있었다.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지상으로 내려왔다.
“다들 모이세요. 성녀님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약을 팔기에 아주 좋은 타이밍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