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성녀의 기적 (4)
피난처로 침입해온 몬스터의 개체 수는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 등급은 그리 높지 않았고 전요한은 차근차근 현장을 정리해 나갔다.
서걱!
서걱!
요새 잦은 빈도로 날뛰어서인지 움직임이 더 나아진 기분이 든다.
“와아… 대단하다….”
“혼자서 무쌍을 하는군요. 꽤나 유명한 헌터인가 봐요.”
저만치서 전투를 지켜보던 민간인들이 하나같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들에겐 헌터가 싸우는 장면이 좀처럼 보기 드문 것일 터다.
몬스터 토벌은 빠르게 끝났고 전요한은 모두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멋지십니다!”
다른 각성자들도 뒤에서 거들긴 했으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따라오진 못했다.
그로부터 경외감을 느꼈는지 오정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일로 심려를 끼쳐 드려서 송구합니다.”
전에 보이던 도전 심리는 이미 얼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혹시 부상자가 있습니까?”
“아니요, 형님께서 활약해주신 덕분에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전요한을 형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호형호제할 만큼 가까이 둘 생각은 아니었으나 서열을 인정하는 것인 만큼 호칭은 내버려 뒀다.
“날이 저물 때까지는 여기 머무를 겁니다. 그동안 귀찮은 일이 생기면 더 도와 드리죠.”
일주일 이내에 무대의 절반 이상을 성역화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구역도 조금은 질서를 잡아둬야 귀찮은 일을 덜 수 있었다.
“형님에게 호감을 보이는 여인네들이 있는데 한번 데려올까요?”
“…그건 됐습니다.”
지금은 사랑놀이나 할 정도로 한가한 시기가 아니다.
심심하면 놀림을 받는 것도 지겨웠고 말이다.
조금 여유가 있었기에 전요한은 오정구를 데리고 다니며 방어 시설을 정비했다.
“이 정도면 일단 며칠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형님.”
“하지만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니 성녀님에게 성의를 보이세요.”
“…성의요?”
“네, 성녀님이 계신 성당에 가치 있는 것을 바치는 겁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유명무실해진 화폐 따위보단 몬스터 따위로부터 얻은 전리품이 더 가치 있었다.
내가 손을 벌리자 오정구는 잠시 당황하다가 마정석을 내놓았다.
“이건 어디서 구한 거죠?”
“…몬스터에게서 얻은 전리품인데 드랍률이 매우 낮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될까요?”
오정구는 성의가 못 미칠까 심히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성녀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피난처에도 축복이 있을 거고요.”
사실 이건 메인 미션을 클리어하기 위한 사기극이다.
매일 타인을 속여서 그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얻는 것.
상대가 오정구이다 보니 딱히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후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전요한은 피난처를 떠나 인근 지대에 몸을 숨겼다.
“…….”
이제 본격적으로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다.
잠자코 기다리자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씩씩거리며 피난처 밖으로 뛰쳐나왔다.
“헉헉… 제기랄….”
앞서 오달구에게 밤이 되면 매질한 후 쫓아내라고 했던 인물.
녀석은 죄악의 사도 중 한 명이었고 재빨리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이런 식의 미행은 조금 번잡하긴 한데.’
하지만 다른 방법은 신광현이 눈치챌 가능성이 높으니 어쩔 수 없다.
은밀히 뒤를 쫓은 결과, 사내는 어떤 건물 안으로 자취를 감췄다.
“흐음….”
아마도 저기가 죄악의 사도들이 모이는 곳인가 보다.
기척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당신도 저 녀석들을 제거하러 온 건가요?”
멜리사.
그녀는 어디선가 일을 벌였는지 피가 묻은 대검을 들고 있었다.
“네,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몰랐군요.”
“인사치레는 됐어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죠.”
멜리사는 여전사답게 굳이 긴말하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악마적인 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사도들이 보였다.
제단에 바쳐진 사람들은 이미 숨이 끊어졌는지 미동도 하지 않는 상황.
멜리사가 먼저 도약하며 죄악의 사도들을 베어 넘겼다.
촤아아아악!
전요한도 질 수 없었기에 도망치려는 죄악의 사도들을 차례로 도륙했다.
“빌어먹을 놈들… 여길 어떻게….”
제사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이를 갈다가 뭔가를 꺼내 들었다.
수류탄.
이렇게 협소한 곳에서 투척하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도들도 모두 죽을 터였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물귀신 작전을 눈치챈 멜리사가 걸음을 내달려 순식간에 노인의 손목을 벴다.
절단된 부위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고 고통스러워하는 노인이 저주의 말을 내뱉었다.
“너희는 결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을 강림시키고 말 것이야!”
탐욕의 죄악, 바르바토스.
지역구를 모두 성역화하여 그녀의 영지로 바치는 것이 저들의 최종 목표다.
하지만 성녀 마케팅이 성공을 거두고 있으니 뜻대로 되지는 않을 터.
전요한은 실소를 내뿜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모두 죽는 건 당신들입니다. 성녀님은 이단에 엄하시거든요.”
이후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인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주위는 정적에 휩싸였다.
* * *
급습 계획이 성공한 이후 죄악의 사도들은 더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들만 아는 암구어를 사용하며 기밀을 유지하는 한편, 의식을 거행하는 장소도 신중하게 선정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전요한 또한 멜리사와 함께 치밀하게 뒤를 밟았고 녀석들은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신광현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 어딘지 대충 알 것 같군요.”
“그래, 녀석들의 세력 범위가 줄어드니까 후보지를 뽑을 수 있게 되었어.”
개인적으로 짐작 가는 곳이 있는지 멜리사가 지도를 펼쳐봤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서남부 지역.
예전에 다른 사도들이 자리 잡았던 쪽이었다.
“저도 그곳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당을 죄다 철거해서 폐허가 됐긴 하지만 숨겨진 비밀장소가 없진 않을 테죠.”
“사방에 심어놨다는 신도들에게선 아직 정보가 안 들어왔나?”
“얼마 전 잠입에 성공했단 연락이 왔으니 슬슬 시간이 되긴 했습니다.”
잠입한 신도들은 정체가 들통나지 않기 위해 처신하느라 매번 소식이 늦었다.
멜리사와 함께 인근 지대를 수색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소란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죠?”
“…누군가 쫓기고 있군.”
깊은 밤중에 한 무리의 추격을 받는 사내가 있었다.
검은 로브에 기괴한 가면을 쓴 것으로 보아 죄악의 사도 같은데 그건 뒤쫓는 무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네 신도가 염탐을 하다 발각된 것 같군.”
“…확신은 없지만 일단 도와주죠.”
진실은 어차피 전부 때려잡고 나서 밝혀내도 늦지 않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개입하자 뒤쫓던 무리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스륵.
하지만 대부분이 낮은 등급의 몬스터에게서 나온 전리품이었고 녀석들은 순식간에 목이 달아났다.
“저, 전요한 님….”
상황이 정리된 후 추격을 받던 사내가 가면을 벗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확인 결과, 그는 염탐을 보냈던 신도가 맞았고 멜리사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은 뭔가 알고 있을 것 같네요. 아마도 비밀 집회에 참여했던 모양이에요.”
멜리사의 예상대로 신도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네, 신광현이란 자가 질 나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질 나쁜 계획?”
“오늘 밤에 저희 구역을 침범하여 성당에 불을 지르고 성녀님을 살해하겠다고 합니다.”
슬슬 녀석도 절박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동안 성녀 마케팅을 통해 신도들의 수를 늘리고 곳곳에 천사상과 종탑 같은 상징적 건축물을 설치해왔다.
어느덧 절대선의 성역은 무대의 절반에 가까운 비율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
그에 반해 절대악의 성역은 음지에 존재할 뿐 이렇다 할 확장을 전혀 못하고 있었다.
“정보가 새어 나간 걸 신광현이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 모를 겁니다. 그는 죄악의 사도들을 결집하기 위해 떠났고 그 후에 제가 자리를 이탈하다 걸린 거니까요.”
한마디로 우리가 죽인 사도들은 잔존 세력이었다.
작전에 투입되지 않는 녀석들이라 신광현은 이 사실을 모를 수밖에 없을 터다.
잘하면 오늘 밤에 끝장을 볼 수 있겠다고 판단한 전요한은 성당 구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성녀님을 도우러 갑시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거리가 제법 있었으나 인근에 지나가는 차량이 하나 있어서 바로 탈취했다.
퍼억!
운전자는 역시나 검은 로브를 입은 죄악의 사도였다.
녀석은 아까 처리했던 무리의 일원이었고 곧바로 즉결 처형을 당했다.
“운전은 제가 합니다.”
먼저 탑승한 전요한은 시동을 건 후 고속 주행을 시작했다.
어차피 시가지는 한적했고 장애물이라고 해봐야 가끔씩 보이는 몬스터뿐이었다.
“다들 준비하세요, 슬슬 거의 도착해 갑니다.”
게다가 같은 지역구라서 시간이 그리 오래 소요되지도 않았다.
곧이어 성당 구역에 도착하자 전요한은 차량에서 내린 후 일행을 불러 모았다.
“놈을 붙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신광현은 여기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 터.
그러니 잠복해 있다가 덮치면 아무리 용의주도해도 빈틈이 생길 것이다.
계획대로 숨죽이고 기다리자 녀석은 꽤나 많은 무리와 함께 어두운 저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
아무래도 이번 거사에 모든 것을 건 모양이다.
이윽고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자 전요한은 공격 신호를 내렸다.
“시작하도록 하죠. 이교도들을 숙청하는 축제를.”
겉보기에 인원수는 이쪽이 열세지만 전력으로 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콰쾅쾅쾅!
뜻밖의 기습을 당하자 신광현은 순간 얼어붙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승산이 없음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도주를 시도하는 교활함.
하지만 예상하고 있던 멜리사가 기민한 몸놀림으로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다음 기회는 없어요.”
콰드득.
멜리사가 내지른 주먹에 신광현은 그만 갈비뼈가 여럿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커헉!”
신광현이 허무하게 쓰러지자 나머지 사도들은 우왕좌왕하다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우리 계획을 알았지?”
“빌어먹을!”
하지만 그들도 결국 소란을 듣고 몰려든 신도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저들을 처형하는 일은 날이 밝고 나서 진행하죠. 보는 눈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포박당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씨익 하고 웃었다.
* * *
이단을 심판하기 위한 화형식.
수많은 신도들이 아침부터 모여들어 그 준비 과정을 지켜봤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대규모의 숙청을 벌이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문제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정당한 승리의 결과였기에 소악마는 머리를 긁적이며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에… 재량권을 행사하고 싶어도 규정이 딱히 없네요. 충분히 절대악에 유리한 무대였고요.”
하지만 이대로는 좋지 않으므로 녀석은 다시 수작을 부렸다.
“다음 미션은 조금 난이도를 높여 볼게요. 이건 저로서도 예상치 못한 전개니까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