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성녀의 기적 (3)
목숨의 위협을 받자, 여자는 사색이 되어 몸을 벌벌 떨었다.
옆에 있던 거짓 선지자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기입니다!”
건물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일단의 무리.
그들은 전요한이 여자를 인질로 잡자 이쪽으로 걸어와 협상을 시도했다.
“그녀를 놔줘라. 그럼 순순히 물러나지.”
그런데 먼저 제안한 협상 내용이 상당히 뻔뻔하다.
비열한 방법으로 기습한 주제에 아무 일 없는 걸로 하자니.
순간 괘씸해진 전요한은 경고의 말을 건넸다.
“마음먹으면 당신들 따윈 혼자서도 학살할 수 있습니다. 서남부의 세력이 왜 갑자기 괴멸당했는지 궁금하십니까?”
“…….”
사내들은 고민되는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무기를 내려놓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약탈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가 어려웠어.”
이들은 대부분이 각성자가 된 지 사나흘밖에 되지 않았다.
살펴본 결과 죄악의 사도는 아니었기에 죽이진 않고 적당히 이용해 먹기로 했다.
“앞장서시죠.”
“응?”
“이 구역에도 민간인들의 피난처가 있을 테죠.”
그리고 혼란기의 피난처에선 모종의 권력 관계가 형성된다.
이들도 각성자이니 여기선 지배층에 속하겠지.
고분고분 말을 듣게 하려면 적당히 서열 정리가 필요했다.
“누가 당신들의 지도자죠?”
“…이름은 오정구다. 어디서 온 건진 잘 모르겠는데 능력이 있어서 따르는 자들이 많아졌지.”
오정구?
사내들의 뒤를 따르던 전요한은 뜻밖의 이름에 순간 당혹스러워졌다.
오정구는 좀비 사태를 해결하던 도중 교도소에서 만났던 인물인데 그리 성향이 썩 좋진 않다.
당시에 우선순위가 많아서 내버려 뒀던 녀석을 여기에서 만나는군.
마침 잘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오정구도 당신들과 같은 각성자인가요?”
“그렇다. 거대한 도끼를 휘둘러 대는데 우리 모두가 달려들어도 승산이 없을 정도지.”
오정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상당히 거품이 끼어 있었다.
뭐, 운 좋게 이레귤러 능력을 얻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전요한이 보기엔 혼란을 이용해 다시 한자리 차지한 것 같다.
“한번 만나 보고 싶군요. 그렇게 대단한 자라면 말이죠.”
우선은 오정구가 죄악의 사도인지 확인해봐야 한다.
잠시 후, 피난처에 도착하자 그들을 본 사람들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
“…….”
적대적이진 않은데 마냥 고깝게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략 이들이 어떻게 피난처를 관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 너는?!”
아지트에서 여자들을 끼고 앉아 있던 오정구가 갑작스런 전요한의 출현에 식은땀을 흘렸다.
일전에 교도소에서 그가 큰형님으로 모셨던 고동배를 제압한 일도 있고, 녀석에겐 트라우마가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제법 출세한 모양이네. 이렇게 군벌 노릇을 하니까 좋나?”
“시, 시끄럽다!”
보는 눈이 많았기에 오정구는 일어나서 자신의 무구를 소환했다.
아까 들었던 대로 거대한 도끼.
제대로 적중한다면 파괴력만큼은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별로 내겐 위협적이지 않았고 전요한은 오정구에게 짧은 도발을 해보였다.
“덤벼, 박살 내주마.”
“크으!”
분개하는 오정구의 모습에 망설임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자존심이 있는지 끝내 전요한에게로 달려들었고 주위엔 구경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것 봐, 오정구가 싸운다!”
“상대는 대체 누구지?”
전요한의 얼굴은 세간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한 차례 외모가 정변한 상태인 것도 있고, 지금까지 배후에서만 활약해왔던 탓이다.
그렇기에 멋모르는 사람들은 결투가 오정구의 승리로 끝날 거라 예측했다.
“조금 어려 보이는데 무슨 깡으로 오정구에게 도전장을 내민 거지?”
“오늘 사람 하나 잡겠네. 오정구는 흥분하면 막을 방법이 없잖아.”
하지만 전투를 시작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서 오정구는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으윽….”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압도적인 전력 차를 극복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오정구가 한 대 먹이려고 주먹을 뻗을 때마다, 가차 없는 응징이 가해졌다.
타격을 입히는 건 고사하고, 자신의 안전을 지켜내기조차 어려워 보인다.
예상외의 결과에 구경꾼들은 눈을 깜박였고 전요한은 오정구의 목에 검날을 들이댔다.
“항복할 겁니까, 아니면 여기서 죽을 겁니까?”
* * *
예상대로 오정구는 항복을 해왔다.
전요한은 주위의 사람들을 물린 뒤 그에게서 현지 상황을 들었다.
“물자 보급은 어떻습니까? 다른 세력의 침입은 받았나요?”
일단 오정구가 죄악의 사도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죄악의 사도는 어디에나 잠입해 있을 수 있었고, 없다가도 새롭게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
현재 진행 중인 미션의 내용은 타인을 속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
이것에 심취하는 사람들은 죄악의 사도가 될 수 있는 미션을 은밀하게 부여받게 된다.
오정구를 죽이지 않고 구태여 살려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
이곳의 권력자였던 만큼 녀석은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식량 문제만 제외하면 여긴 그럭저럭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외부적인 침입도 많진 않았는데 최근 불순분자들의 소동이 있었죠.”
이야기를 듣던 도중 오정구의 입에서 흥미로운 정보가 나왔다.
전요한은 그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불순분자? 무슨 일이 있었죠?”
“그냥 정신이 좀 이상한 녀석들인데 이상한 의식을 하려다 붙잡혔어요. 밤에 불을 피우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더군요.”
그건 분명 죄악의 사도들이다.
오정구를 앞세워 아지트의 지하로 내려가자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이 손을 철창 사이로 내밀었다.
“먹을 걸 줘!”
“언제까지 굶길 셈이야!”
가혹한 대우를 받았는지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하지만 위험한 녀석들이니 선의를 베풀 생각은 없었다.
“당신들이 숭배하는 악마에게 달라고 하시죠.”
“이 자식!”
“죽을 때까지 저주해주마!”
죄악의 사도들은 경멸하는 눈빛으로 전요한에게 삿대질을 했다.
그러자 오정구가 도끼를 들어 올린 채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까불지 마라. 전부 화형시켜 버리기 전에.”
“…….”
진심을 담은 협박에 쥐 죽은 듯이 정적이 감돌았다.
안 그래도 오정구는 전요한에게 깨져서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전요한은 감옥 안의 사도들을 좀 더 지켜본 후 오정구에게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저놈만 오늘 밤에 매질을 한 다음 풀어 주십시오. 어디로 향하는지 조용히 뒤를 밟을 겁니다.”
죄악의 사도는 자신들끼리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다.
그러니 뒤를 밟다 보면 지도자인 신광현의 소재도 확인할 수 있겠지.
거짓 선지자 역시 좋은 생각이라 여겼는지 옆에서 킬킬거렸다.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녀석들의 은거지를 알아내면 일이 쉽게 풀리겠군요.”
“당신은 여기 남아서 사람들을 교화하세요.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말이죠.”
만약 별다른 성과가 없으면 성당 구역으로 끌고 가서 지난 죗값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압박을 주자 거짓 선지자는 식은땀을 흘렸다.
“바, 반드시 개종시키겠습니다. 저만 믿어 주십시오.”
한편, 오정구에게도 기회를 주기로 했다.
“당신의 큰형님처럼 속죄하고 선량하게 살도록 하세요. 개선의 여지가 안 보이면… 아시죠?”
“아, 알겠습니다….”
사실 기회를 준다기보단 이용해 먹는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오정구는 성향이 썩 좋진 않아도 위계질서는 잘 지키는 편이다.
이번 기회에 전요한이 상위자라는 걸 각인시켰으니 함부로 악인처럼 굴진 못할 터.
녀석이 빌빌거리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요새 저런 사이비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거 아십니까?”
“솔직히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정신 나간 놈들이라고만 생각했죠.”
“지금 이 난리가 난 게 바로 저놈들 때문입니다.”
지하 감옥으로부터 되돌아온 후 전요한은 오정구와 마주 앉은 채 상황을 설명했다.
오정구는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정말 미친놈들이 많군요. 범죄자인 제가 정상인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조금 의외이긴 한데, 오정구가 타락하지 않은 건 악마 같은 존재를 혐오해서였다.
그는 적당한 무법세력으로 남길 원했고 현 상황에서 그건 어느 정도 허용 범위였다.
“보아하니 여기서 그렇게 나쁜 짓은 안 한 것 같더군. 그래서 봐주는 거야.”
물론, 상황이 정리되면 이 녀석도 교관들을 데려와 고동배처럼 갱생시킬 것이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오정구를 따르던 자들이 진귀한 음식을 가지고 나타났다.
“소고기는 어디에서 구한 겁니까?”
“인근에서 가축을 옮기던 차량이 발견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동물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양이더군요.”
소악마의 개입으로 사라진 건 식재료뿐이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생명체는 식재료로 구분되지 않는다.
덕분에 전요한은 뜻밖의 대접을 받았고 이를 지켜보던 거짓 선지자가 처량한 눈빛을 보냈다.
“저, 저도 한입만….”
“안 들립니다.”
지역구의 질서 유지를 위해 몬스터 고기를 무상 배식하는 입장에서 이 정도의 호의는 받아둘 만하다.
전요한이 생색을 내자 주위에 있던 이들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몬스터 고기요?”
“무상 배식?”
슬슬 성녀 마케팅을 위한 전도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눈치 빠른 거짓 선지자가 헛기침을 한 후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흠흠, 죄악의 무리가 여길 뒤덮고 나서 사람들이 절망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성녀님이 등장한 것이죠.”
“성녀?”
“네, 그분은 몸소 기적을 행하시며 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보이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적당히 미사여구를 사용하며 성녀의 존재를 알렸다.
그 말을 믿지 못하겠는지 오정구가 전요한을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기, 정말입니까? 성녀의 기적이란 거 말입니다.”
“네, 믿으세요. 악마도 나타났는데 성녀의 존재를 의심하는 겁니까?”
“허어….”
오정구는 놀란 나머지 쉽게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는 자에게 복이 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내려진 시련을 이겨내려면 성녀님의 가르침에 따르세요.”
“가르침이요?”
“네, 성녀님은 우리가 죄악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제 역할을 잘 수행해내고 있었다.
녀석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며 전요한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음미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듯한 질감과 고소한 식감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가 아지트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크, 큰일 났어요!”
전에 미끼 역할을 했던 여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뭔가 큰일이 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몬스터들이 바리케이드를 뚫고 내부로 대거 들어왔어요!”
제대로 된 헌터가 없다 보니 치안 유지가 힘든 모양이다.
남은 소고기 스테이크를 마저 먹은 후 전요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정리하도록 하죠. 밥값은 하고 떠나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