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96화 (96/180)

제96화. 성녀의 기적 (2)

흥정의 주사위.

주사위를 던져서 높은 수가 나올수록 고위험 고수익의 돌발 미션이 주어지는 보상이다.

일전에 던전에서 한번 경험한 바 있는 유물.

전요한은 잠시 고민하다가 수락 버튼을 눌렀다.

영향력이 충분히 올라갔다고는 하나 아직 죄악의 사도들을 근절시키기엔 역부족.

그리고 성녀 마케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새로운 원동력이 필요하다.

주사위를 던지기 전에 원하는 결과를 위해 기도부터 올렸다.

“지구의 여신님. 제발 높은 수가 나오게 해주세요.”

소원을 들어줄지는 미지수였지만, 시도해보는 편이 나았다.

곧바로 주사위를 던졌고 숫자는 놀랍게도 6이었다.

[돌발 미션 #3]

명칭: 성역의 수호자

내용: 무대의 절반 이상을 성역화하고 외부적인 위협으로부터 지켜낼 것

제한: 타임 어택(7일)

보상: 기여도에 따른 차등 지급

기타: 실패 시 공공의 적이 됨

미션 내용은 다행히 기존의 계획과 관련이 있었다.

성역화에 성공하려면 우선 상징적인 건축물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집단의식이 행해져야 한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성역인가인데 성녀 마케팅을 하고 있으니 절대선으로 방향성을 잡았다.

이렇게 되면 선과 악의 대결 구도가 다시금 형성되겠군.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 때문에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것이나 지금은 이것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이제 더 공격적으로 약팔이를 할 수 있겠어.’

군용 침상 위에 드러누운 채 날이 밝으면 어떻게 할지 고민했다.

현재 추종자들은 늘어난 상태나 민심이란 것이 언제 갑자기 돌아설지 모른다.

그리고 아까 경고했던 신광현도 사이비 교도 출신이라 나름의 세력을 구축해가고 있을 터다.

지금까지처럼 온건한 방식만으로는 성역화된 영역을 확장하는 데 한계가 있을 거란 의미.

그래서 조금 폐단이 있더라도 절대선의 광신도들을 양성해야겠단 결론을 내렸다.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주마.’

광신도들이 많으면 그들을 앞세워 죄악의 사도들을 견제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묘안이 떠오른 전요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잠을 청했다.

* * *

날이 밝자 성당을 중심으로 다시 인파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미션 진행을 위해 서로 사기를 치는 경우가 많았고 성당 주위는 아침부터 소란에 휩싸였다.

“그딴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고? 난 호구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믿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어!”

개중에는 종교를 빌미로 부당 이득을 취하는 자도 있었다.

자신이 성녀의 출현을 예언한 선지자라며 기부를 요구한 사례까지 발생한 것이다.

“정말 혼란의 도가니군요.”

“선과 악이 뒤얽혀 서로 싸우는 것만 같네요.”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을 보며 실비아와 멜리사가 짧은 감상을 말했다.

“이대로 두면 곤란해지겠는걸?”

“질서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개입은 필요할 것 같아.”

소란이 점차 커지자 채린과 메이가 메르첼를 바라봤다.

별생각 없이 하품을 하던 메르첼은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정색했다.

“…저보고 어쩌라고요, 대체.”

메르첼이 권능을 빌려 성녀 행세를 할 순 있어도 저들의 사사로운 갈등까지 개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계속해서 기적을 일으켜야 교세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성녀님.”

“하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던 메르첼은 전요한의 부추김에 끝내 고개를 푹 숙였다.

이후 앞으로 나선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환호하기 시작했다.

“오오! 성녀님이다!”

“저희를 구원해 주세요!”

하지만 이들의 신앙심은 대부분 얄팍한 수준이었다.

단지,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얻기 위해 성녀에게 기대려고 하는 것이다.

그 모습이 썩 달갑게 여겨지지 않았는지 메르첼은 정색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오늘은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말하고 싶어요. 중요한 이야기이니 잘 들어주세요.”

본래 메르첼도 신앙심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다.

그녀는 죄악과 맞서야 할 땐 강한 모습을 보여줘 왔다.

전요한은 기대감을 갖고 옆에서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언제나 시험받는 존재예요. 완벽하지 않으니 때때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죄악의 길로 빠져들면 구원은 받을 수 없습니다.”

메르첼이 강조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이었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성실하게 믿음을 실천하라는 그녀의 요구에 신도들은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성녀님.”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성녀님께서 이렇게 이끌어 주려고 하시는데….”

종교가 없는 자들도 분위기가 이렇게 되면 함께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들은 마음이 울컥했는지 죽을죄를 지은 것처럼 몸을 엎드렸다.

“앞으로는 성녀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겠습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세요, 성녀님!”

그야말로 중세 시대의 전도 현장과 같은 분위기.

적당히 예열이 되었다고 판단한 전요한은 헛기침을 한 후 메르첼의 옆으로 걸어갔다.

“성녀님께서는 여러분이 죄악과 맞서 싸우길 원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죄악의 사도들은 조금씩 수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달이 난 것은 모두 죄악의 사도들 때문이다.

그들이 여기서 불온한 사당을 짓고 악마적인 의식을 거행했기에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성역을 건설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자 주위에 모여 있던 군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악의 사도라니….”

“그런 존재가 있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식의 재해는 현세에서는 처음 관측된 까닭이다.

전요한은 부가 설명을 해주라고 메르첼에게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여러분이 매일 죄악을 행해야 하는 것도 모두 그들 때문이에요. 이대로 놔두면 여긴 원상 복구가 불가능해지겠죠.”

“그, 그러면 저희는 메인 미션을 거부해야 합니까?”

“원칙적으론 거부해야 하지만 사면권을 드리겠어요. 여러분이 속죄한다는 가정하에요.”

속죄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위해 생필품이나 의약품을 구해오거나 성역화를 위한 건축 사업에 참여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면 직접 죄악의 사도들과 맞서 싸우는 방법도 있습니다. 각자의 적성을 고려해서 결정하세요.”

메르첼 대신 말을 마친 후, 전요한은 동료들과 함께 추종자들을 집단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수행하는 역할에 따라 각자의 집단을 관리하기로 했다.

“메이, 너는 채린하고 구호단을 맡아. 박수호는 건축 사업을, 나머진 식량 조달을 맡으시고요.”

한편, 전요한의 역할은 죄악의 사도들과 맞서 싸우기 위한 광신도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저기… 저는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되나요?”

“네, 성녀님은 상징적인 존재니까 여기서 신도들을 계속 이끌어 주세요.”

이로써 체계는 어느 정도 잡혔다.

일행이 임무 수행을 위해 흩어지자 메르첼이 전요한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아무것도 안 하세요? 혹시 농땡이 부리는 거?”

“이들의 신앙심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조사를 하는 중입니다.”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의 집단이 전요한의 앞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만큼 사상 검증이 필요하다.

“그건 제 전문인데요. 어디 한번 독실한 신도들인지 알아보죠.”

모여 있는 이들의 모습을 살피던 메르첼이 눈을 빛냈다.

그녀는 신성력을 이용하여 언행의 진위를 판별하는 게 가능하다.

“성녀님, 저는 성당에서 존 적이 없습니다.”

“저는 헌금을 많이 냈습니다. 이단 적발도 많이 했고요.”

죄악의 사도들과 싸우겠다는 자들답게 전체적으로 신앙심은 깊은 편이었다.

독실한 신도로 위장한 채 내부 정보를 캐내려던 죄악의 사도들도 있었지만 말이다.

“여기가 어디라고 잠입한 겁니까? 순순히 죄를 자백하시죠!”

“크윽….”

색출된 죄악의 사도들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붙잡아서 채찍으로 모진 고문을 한 결과 녀석들은 고통에 못 이겨 정보를 털어놓았다.

“신광현이란 자가 저희를 이끄는 우두머리입니다.”

“의심을 사지 않도록 교묘하게 방해할 계획이었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분열도 유도하고요.”

역시 배후엔 신광현이 있었다.

사이비 교도 출신답게 이런 일에 제법 능했고 전요한은 녀석을 사로잡을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임무는 신광현의 소재를 찾아내는 겁니다. 이들과 똑같은 전략으로 반대 세력에 잠입하세요.”

어차피 민간인들이라 신앙심이 아무리 깊어도 실제로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그러니 이런 밀정 임무가 제격이었고 신도들은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저들의 죄악을 낱낱이 파헤쳐서 돌아오겠습니다.”

“만약 발각되더라도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겁니다.”

광신도들은 확실히 독기가 있다.

이들의 수를 더 늘릴 필요성을 느낀 전요한은 수소문하여 거짓 선지자를 찾아냈다.

“당신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성녀의 출현을 예언했다고요?”

“…히익.”

거짓 선지자는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무서워 두려움에 떨었다.

전요한은 적당히 공포감을 형성하다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성녀님은 관대하시니 속죄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어, 어떤 방식으로요?”

“설교를 하고 돌아다니며 성녀님의 존재를 널리 알리시죠. 아직 구원의 손길이 닿지 못한 구역이 꽤나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소환되는 몬스터들 때문에 고립된 구역이 존재했다.

그곳에 숨어 있던 자들은 당연히 이쪽 상황을 모를 테고 머릿수도 적지 않을 터였다.

“하, 하지만 저 혼자서 어떻게 몬스터들이 날뛰는 거리를….”

“딱히 할 일도 없으니 동행해 드리겠습니다. 저만 믿으시죠.”

거짓 선지자도 혼란의 시기엔 적당히 이용해먹을 필요성이 있다.

녀석과 함께 떠나기 전, 메르첼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성녀님.”

“네, 수고하세요.”

“제가 없어도 행실에 신경 써주시길. 성녀님은 모두의 희망입니다.”

“…….”

짓궂은 놀림에 메르첼은 몰래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무언의 반항 의사를 보내왔다.

그렇게 성당 구역을 떠난 후, 황폐해진 시가지를 돌아다니고 있을 때 어디선가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고개를 돌리니 괴수에 쫓기는 여성이 이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스걱!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소환하여 단번에 괴수를 베어냈고 여성은 감사를 표했다.

“어머,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러면서 은밀히 어딘가로 향하는 눈빛.

그녀가 뭔가 속셈을 부린다고 생각했을 때, 멀리서 마력 화살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역시 함정이었나.’

하지만 대미궁의 고인물이 이렇게 허접한 장난질에 당할 리는 없다.

우선 ‘마력 방벽’을 시전해서 이쪽으로 날아오던 화살들을 모두 튕겨냈다.

팅! 팅!

예상치 못한 방어에 미끼였던 여자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이런….”

알고 보니 그녀도 이능력자였다.

본래 헌터는 아닌데 이번에 운 좋게 개화하게 된 부류.

조금 전 공격했던 자들도 비슷하리라 추측했다.

“도망치면 죽이겠습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시길.”

귀찮아진 전요한은 신경질적으로 여자의 목에 칼날을 들이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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