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성녀의 기적 (1)
“닥치는 대로 사냥하죠. 인근 지대의 치안도 유지할 겸 해서요.”
일단 눈에 띄는 괴수들의 등급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적당히 흩어져서 사냥을 시작하자 민간인들이 지켜보며 응원을 보내왔다.
“헌터들 파이팅!”
“전부 박살 내버려!”
특히 후위에서 활약하는 메르첼의 인기가 대단했다.
“성녀님 사랑해요!”
“너무 멋지십니다!”
이 정도면 사이비 종교를 하나 세워도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정작 당사자인 메르첼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으나 전요한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조리하는 시간도 있으니 적당히 사체를 모으죠.”
사실상 지역구 내의 모든 인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 최소한 몬스터 수십여 마리는 필요했다.
사체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전요한은 인원을 나눠서 식량 확보를 시작했다.
“메이는 나와 함께 해체 작업을 맡아줘. 린은 조리를 부탁해.”
이 또한 시가지의 민간인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벌이는 일이었다.
그들은 다들 처음엔 뭘 하는지 몰랐으나 본격적인 조리가 시작되자 경악한 반응을 보였다.
“세상에 몬스터를 요리하다니….”
“먹다 죽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일반적으로 몬스터 요리는 불가능하단 것이 세간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성녀 이미지의 메르첼도 껴 있었기에 민간인들은 기대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성녀님이 계시잖아.”
“맞아, 성녀님이 기적을 보여주실 거야!”
본의 아니게 이것도 성녀의 기적으로 포장될 것 같다.
‘아르켄 화로’에 몬스터 고기를 굽던 나는 보란 듯이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그러자 생생한 육질과 함께 고소한 식감이 입안에 퍼져나갔다.
“저, 저것 봐!”
“몬스터 고기를 먹었어!”
전요한의 모습을 본 민간인들이 경악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곁에 있던 실비아마저 안색이 새파래져서 질문을 던졌다.
“저, 정말로 괜찮으세요?”
“네, 교관님도 한번 드셔 보세요.”
“…알겠어요.”
실비아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지만 그를 신뢰했기에 다소곳이 입을 벌렸다.
이후 시식을 한 그녀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정말 몬스터 고기 맞나요? 전혀 믿기지가 않아요.”
“상대적으로 식감이 좋은 녀석입니다. 물론 먹기 어려운 종도 존재하고요.”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자 어느덧 지켜보던 민간인들의 입에도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이 사달이 나고 제대로 된 고기를 먹어 본 적이 없군.”
“몬스터 고기라도 입에 넣고 싶어. 솔직히 어떤 맛인지도 궁금하고 말이야.”
계획은 대성공이었다.
전요한은 성당 앞에 적당히 공간을 마련한 후 몬스터 고기로 무상 배식을 시작했다.
“성녀님의 은총으로 행한 기적입니다. 다들 와서 챙겨 가세요!”
이 정도면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상 배식에 의해 민심은 확실히 이쪽으로 기울었고 성당 주위에선 추종자들의 찬송가가 늦은 밤까지 울려 퍼졌다.
“구원자가 된 기분이 어떠십니까? 교화 담당 교관님.”
“장난치지 마세요. 저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아요.”
사람들의 환대를 보며 억지 미소를 짓던 메르첼이 짓궂은 질문에 몰래 눈을 흘겼다.
밤이 깊어서 슬슬 무상 배식을 끝내려 하고 있을 때, 한 무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정말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계시는군요.”
말투부터가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것이 이 녀석들은 새롭게 뽑힌 죄악의 사도인 모양이었다.
“무슨 의미죠?”
“무상 배식을 중단하세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지도자로 보이는 사내는 눈을 야리더니 대뜸 일행에게 협박을 가해왔다.
* * *
“그게 무슨 말이시죠?”
“서로 죽이고 이용해 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에서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겁니다.”
사내가 면박하듯 메르첼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전요한은 순간 어이가 없어졌으나 곧 녀석이 방해하려는 목적임을 간파했다.
죄악의 사도는 혼란을 바랄 뿐이지 이런 식으로 질서가 유지되는 걸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물러설 이유가 전혀 없었기에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딱히 문제 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저희가 따로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당신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이곳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려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약한 애들 밥 먹이고 보호해 주면서 말이에요.”
“딱히 그런 권력욕은 없습니다만.”
“신경 쓰인단 말이죠. 언제 갑자기 왕관 쓰고 나타나서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할까 봐.”
사내는 우리가 세력을 키우는 걸 경계하고 있었다.
힘없는 민간인들도 모아놓으면 집단적인 영향력이 생기니 자신들의 일에 방해가 될 거라 여긴 것이다.
이런저런 헛소리를 하며 자꾸 트집을 잡자 참고 있던 메르첼이 인상을 구겼다.
“그럼 당신들도 무상 병원 같은 거 하나 차리든가요. 참나, 가뜩이나 팔자에도 없던 노릇 하느라 힘들어 죽겠는데 왜 꼬투리 잡는 거지?”
늦은 밤이라 주위엔 추종자들이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메르첼의 역정에 사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봐요 당신, 성녀가 아니군요?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 거였어요.”
“그럼 어쩔 건데요? 한번 붙어 보실래요?”
온종일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는지 메르첼이 법구를 소환하며 노려봤다.
그녀는 진심이었고 여차하면 선공을 가할 기세였으나 사내는 조용히 물러났다.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추종자들이 많다고 경거망동하지 마시길.”
검은 로브를 입은 무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실비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무력 충돌은 넘겼네요. 저들도 지금 맞붙으면 불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에요.”
“하지만 조만간 다시 나타날 거다. 이쪽의 영향력이 커지니까 조바심이 난 모습이었어.”
율리안은 협잡배들의 권모술수를 예견했다.
앞으로의 무대 상황에서 민심이 중요해진 만큼 저들은 어떻게든 건수를 잡으려 할 것이다.
일행이 대책을 논의하는 동안 전요한은 사내에게서 떠올랐던 인물 정보를 정리해봤다.
[신광현]
기회주의적 모략꾼.
군중을 선동하는 일에 자질이 있습니다.
틈만 나면 당신의 계획을 방해하려고 하므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붙잡아서 신도들 모아다가 재판이라도 해버릴까.’
문득 그런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무작정 맞붙어서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건 손해 같다.
우선 저들을 악의 축으로 내몰 필요성이 있었다.
실제로 악의 축이기도 하고 귀찮은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막는 예방 효과도 있으니까 말이다.
“일단 오늘은 좀 쉬죠. 나름의 수확도 있었으니까요.”
하루 내내 계속된 몬스터 토벌과 무상 배식으로 인해 다들 많이 지쳐 있었다.
* * *
조금 남은 몬스터 고기를 나눠 먹으며 일행은 잡담을 늘어놓았다.
“남들 몰래 메인 미션을 진행하느라 힘들었네.”
“그러게 말이야. 선행을 베풀면서 부당한 이득을 챙긴다는 게 쉽지 않았어.”
채린과 메이가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소소한 일탈 행위에 대해 언급했다.
둘 다 올곧은 성향인 것치곤 담담한 표정.
물론 도덕적으로 정당한 일은 아니었으나 살인보단 심적인 부담이 적고 죄책감도 적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끼리 속여 먹었을 가능성도 있겠네. 오늘은 민간인들과 뒤섞일 기회가 적었으니까.”
“사기당한 일이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어요. 딱히 손해를 본 느낌은 없지만요.”
마치 [범인은 이 안에 있다]는 듯한 멜리사의 말에 실비아가 장난스레 맞받아쳤다.
확실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다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분위기다.
속임수를 썼더라도 가벼운 수준이었을 거라며 상당한 신뢰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일행의 모습.
전요한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저번에도 짚고 넘어갔던 것이지만, 언젠가는 계속 나아가기 위해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날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겠어.’
후회는 그때 해도 늦지 않다.
슬슬 자리를 정리해야겠다 생각하던 때였다.
주둔지의 잔여 인원이 짐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중간에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아서 좀 늦었습니다.”
“여기를 새로운 주둔지로 삼으실 건가요?”
주둔지를 성당 근처로 옮기려는 이유는 성녀 마케팅에 더 힘을 실으려는 목적에서였다.
“네, 여러모로 성당 근처가 자리를 잡았을 때의 이점이 많아서요.”
“저희는 전요한 님의 지시에 따르겠습니다.”
“전요한 님이 없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고된 일을 많이 겪었을 테니까요.”
일전에 골칫거리였던 서남부 세력을 괴멸시킨 이유로 이들은 적극 나를 지지했다.
대부분이 헌터 출신이고 전력에 도움이 되었기에 전요한은 이들을 최대한 배려해 주었다.
“오늘 밤엔 군용 텐트에서 야영을 할 것이니 부상자들은 먼저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세요. 달리 도움이 필요한 분들은 절 찾아오시고요.”
그렇게 해서 대략적인 정비가 끝나고 기존의 일행을 포함한 모두는 잠자리에 들었다.
첫 번째 불침번인 전요한만 제외하고 말이다.
“당신의 세계도 어지간히 혼란스럽군요.”
주위가 조용해지자 시르케가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오늘따라 많이 심심해 보였다.
“두렵나요?”
“두렵기는 해. 그때처럼 모두 죽어버릴까 봐.”
대미궁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시르케는 걱정 말라는 듯이 전요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번엔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혼자서 너무 고통받을 테니까요.”
“…너무 의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제대로 지켜주지도 못했던 너에게.”
“조금 더 어리광 부려도 좋습니다. 제게 있어 당신은 아직 어린아이니까요.”
시르케는 희미하게 웃어 보인 후, 전요한에게 무릎베개를 해주었다.
전요한은 잠시나마 평온을 되찾은 채,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누군가가 군용 텐트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
박수호.
두 번째 불침번이라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녀석은 한 차례 기지개를 켜더니 가까이 다가와서 상황을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딱히 없다.”
“그런데 둘이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이 모습을 다른 여자애들이 봤으면 기겁했겠는데?”
전요한을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들이 일부 있었다.
“오해하지 마. 시르케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그러면 여동생과 오빠 같은 관계라도 되는 거냐?”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지.”
“시르케가 몇 살인데?”
“나보다 100살은 많아.”
“히익?”
박수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시르케를 바라봤다.
시르케는 이런 반응엔 익숙한지 무덤덤하게 고개를 돌린다.
“몬스터들이 다가오는지 잘 지켜봐. 꽤나 정리해 뒀지만 다시 늘어날 거야.”
“알았어, 맡겨두고 들어가 쉬어.”
박수호가 불침번 자리에 앉으며 손을 흔들었다.
시르케와 함께 군용 텐트로 향하고 있을 때,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주어진 조건을 만족했습니다.]
[지난 미션에서 획득했던 ‘흥정의 주사위’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