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검은 별의 재해 (4)
시르케는 긴 이야기를 하다 졸음이 오는지 잠시 잠을 청했다.
그녀를 어깨에 기대어 쉬게 하고 있을 때, 엄익현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주,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루를 줬는데 한나절 만에 일 처리를 끝내 버리다니.
피의 구속에 걸려 있는 상태라 대충 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인 후 일행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대략 몇 명 정도지?”
“72명입니다.”
전원이 헌터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녀석들이 그동안 민간인을 학살하고 집단의식으로 악마종을 소환했던 주범.
더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모두 없어져야 했다.
엄익현의 안내를 받으며 도착하자, 한자리에 모여 있던 죄악의 사도들이 보였다.
“오오! 새로운 멤버인가!”
“죄악의 번영을 위해 피의 축제를 벌입시다!”
지도자 격인 엄익현과 함께 나타났으니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다.
물론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곧, 죄악의 사도들의 머리 위로 어둠이 드리우며 광활한 숙청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커허헉!”
“습격이다!”
죄악의 사도들은 맞서 싸우려 했으나 시르케의 영계 마법에 의해 움직임을 구속당했다.
결국 모두가 메이의 급습에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한참 피바람이 불고 난 후에 결국 엄익현만이 자리에 남았다.
“크으….”
엄익현은 다분히 억울해하는 표정이었다.
전요한이 눈빛을 보내자 메이가 그에게 다가가며 사이드를 들어 올렸다.
“당신을 구원해줄 존재는 안타깝게도 없는 것 같군요. 그럼 잘 가시길.”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다란 사이드가 한 차례 휘둘러졌다.
이후 엄익현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고 주위엔 정적이 감돌았다.
“무고한 이들을 학살했던 악인에게 걸맞은 최후로군요.”
“…내가 죽였지만 기분 나빠.”
숙청이 끝나자 시르케와 메이가 짧은 감상을 말했다.
이로써 가장 골칫거리였던 자들은 완전히 박멸했고 그 본거지였던 성역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죄악의 사도들이 세운 사당은 모두 파괴해야 합니다. 이 또한 무대의 형성 조건이었으니까요.”
현실 세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이세계적인 요소는 모두 제거하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건축물을 해체하고 돌아다니는 건 우리로선 당장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우선 주둔지로 복귀부터 했다.
“무사히 돌아왔네.”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인물은 박수호였다.
생각해보니 녀석은 신체강화 계열의 능력자라서 지구력은 꽤 높다.
예전에 막노가다도 뛰었다고 하니 인력만 붙여주면 사당을 효율적으로 해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거야 시간문제지. 나에게 맡겨둬.”
박수호는 드디어 자신이 할 일이 생겼다며 흔쾌히 수락했다.
“인력은 민간인들을 이용하자. 적당히 생필품을 제공하고 지켜주면 충분히 인원을 확보할 수 있을 거야.”
일행 중엔 사제 계열인 메르첼을 동행시키기로 했다.
전요한은 불러 모은 민간인들을 향해 그녀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분은 성녀입니다. 여러분이 사당을 철거하더라도 화를 입지 않도록 지켜줄 겁니다.”
“…….”
얼떨결에 고귀한 존재가 된 메르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기적을 행한 것처럼 몇 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그냥 성녀라고만 하면 잘 믿지 않을 테니까요.”
판을 벌린 김에, 메르첼을 데리고 제대로 약을 팔기로 했다.
지하철역으로 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 후 성녀의 기적을 행하는 것이 주된 계획.
메르첼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꼭… 이래야 해요?”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사람들은 구원을 원합니다.”
절대악의 세력이 판을 치는 무대에서 절대선의 존재감이 미약하면 마땅한 견제 세력을 내세우기 어렵다.
물론 그렇다고 선과 악의 대결 구도를 유도할 생각은 아니지만 적당히 존재감을 과시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보세요! 이분의 손길이 닿으면 모든 게 정화됩니다!”
“오오, 성녀시여!”
메르첼이 화분의 시든 꽃을 소생시키자 지하철역에 모여 있던 인파가 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있던 메이가 내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봐, 저 언니 지금 울려고 해.”
* * *
메르첼을 모델로 한 성녀 마케팅은 대박을 터트렸다.
가는 곳마다 인파가 바글바글 끓었고 성녀의 기적이 행해지면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정작 본인은 적성에 맞지 않은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말이다.
“성녀님! 이쪽을 봐주세요!”
“저희를 구원해 주세요! 성녀님!”
하지만 민간인들이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요구한 건 살인에 대한 회개였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부디 죄를 용서해 주세요.”
종교를 믿지 않는 자들도 자신의 잘못을 말하며 눈물로써 용서를 구했다.
이런 모습은 험악하던 분위기에도 영향을 끼쳐서 불필요한 폭력이 벌어지는 일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또한, 시련에 의해 요구되는 살인 또한 검투장 같은 장소를 통해 최대한 공정하게 이루어졌다.
“절대선이란 존재의 파급력이 생각보다 대단하군요.”
말세나 다름없었던 시가지가 질서를 되찾아가자 실비아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편, 옆에 있던 멜리사는 조금 우려하는 모습이었다.
“너무 일을 크게 벌이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긍정적인 역할을 미칠지 몰라도 변수가 너무 많아요.”
“아뇨, 오히려 대담하게 나가야 합니다. 이건 사람들이 어떤 신념을 갖느냐에 승패가 달렸으니까요.”
인간은 선과 악의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현실 속에서 어느 쪽의 존재감이 더 큰지에 따라 그들의 신념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추종자들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전요한은 일행과 함께 버려진 성당을 찾았다.
“여길 조금 손봐서 성녀님의 공간으로 삼죠. 뭔가 상징적인 건축물이 존재해야 신앙심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한편, 죄악의 사도들이 건축했던 사당은 박수호의 주도로 차근차근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계속 연기는 하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아요.”
마침내 추종자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메르첼이 울상을 지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채린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잘 어울리시던데요. 실제로 수호성도 성녀이시고요.”
채린의 말대로 메르첼이 성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성당의 분위기에 힘입어 경건한 아우라를 점차 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미션도 곧 있으면 끝이 나네.”
“다음 미션은 대체 무엇일지… 벌써부터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새로운 미션을 앞두고 메이와 시르케가 걱정을 토로했다.
두 사람을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슬쩍 정보를 흘렸다.
“이번엔 죄악의 사도를 늘리는 방향으로 주어질 겁니다. 저번에 서남부 세력이 완전히 괴멸당했으니.”
이미 첫 번째 미션에서 살인을 강제하여 죄악에 무뎌지도록 만들었으니 다시금 새로운 세력이 생겨날 것이다.
말을 마치자 기다렸단 듯이 소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새로운 미션 부여하겠습니다.”
소악마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대 상황이 정말 말이 아니다.
죄악의 사도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고 오히려 성녀의 추종자들이 득세하고 있다.
[메인 미션 #2]
명칭: 불신 시대
내용: 매일 누군가를 속여서 부당한 이득을 취할 것
제한: 비밀 유지를 하지 않으면 무효
보상: 부당한 정도에 비례한 익일 지급
기타: 실패 시 데스 매치
이번엔 서로 죽이는 대신,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첫 번째 미션보다 덜 가혹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파급 효과는 이쪽이 더 컸다.
어떤 집단이든 최소한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런 상황에선 그것이 어려워진다.
“사소한 것이라도 매일 한 번씩만 속이면 되는데 문제는 비밀 유지군요.”
“네, 잘못을 밝힐 수 없으니 결국 서로를 불신하게 됩니다.”
비밀 유지에 대한 부분은 추종자들이 메르첼에게 회개하는 일 또한 어렵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걸로 어떻게 죄악의 사도를 늘린단 거죠?”
“죄악의 사도가 되는 건 성향이 악한 자에 한해 히든 미션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성향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속임수를 쓰더라도 살아남기 위해 최소한으로만 할 테지만 누군가는 본격적으로 타인을 이용해 먹겠지.
어쨌든 다시금 악의 존재감이 커지기 시작할 테니 성녀가 일선에서 활약해줘야 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미션을 수행해요? 선행만 베풀어야 하는 성녀인데요.”
문제점을 찾은 메르첼이 대뜸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전요한은 문제없다는 의미로 성당의 제단을 가리켜 보였다.
“실제로 성녀인 건 아니니까 조금씩 부정 축재를 하시면 될 겁니다. 십일조 같은 거라도 걷으세요.”
“지금 상황이 이런데 누가 돈을 가지고 다녀요?”
“그럼 쌀알이라도 열 개씩 받으면 됩니다.”
오히려 메르첼은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서 엄청난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 부분은 나쁘지 않았는지 메르첼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으음…. 저번에 악마를 상대한다고 값비싼 성유물을 날려먹었긴 한데.”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녀가 재미를 볼 가능성은 아무래도 거의 없어 보인다.
다시금 실의에 빠진 메르첼을 위로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성당 내부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헉헉…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죠?”
“시, 식량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내의 제보에 의하면 지역구 내의 모든 식료품이 먼지가 되어 소멸하는 중이었다.
대형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것이든, 각 세력이 따로 챙겨놓은 것이든 가리지 않고 말이다.
* * *
“정말 큰일이군요. 이젠 생필품까지 손을 대고 있어요.”
“당장 생계에 문제가 생기면 인심이 더 흉흉해질 겁니다.”
사내가 되돌아간 이후, 모여 있던 동료들은 곤란하단 반응을 보였다.
그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자신에게로 향하자 전요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네요.”
소악마가 재량권을 행사한 것 같은데, 어지간히도 다급해진 모양이었다.
“만약 굶주린 이들이 성당으로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은 신앙심에 호소해보죠. 방법은 함께 찾아보고요.”
결국, 시르케가 우려했던 일이 터져버렸다.
곤란함을 느낀 전요한은 고심하다, 골동품 상점에서 몰래 구입했던 유물 하나를 내놓았다.
“어쩌면 이걸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치 화로처럼 생긴 것이었다.
“이건 ‘아르켄 향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여러 용도가 있는데 주로 야지에선 몬스터 사체를 조리할 때 사용하죠.”
“몬스터 사체요?”
“네, 본래 몬스터는 독성이 있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조리하여 먹으면 수 분 내로 사망합니다.”
하지만 ‘아르켄 향로’가 있으면 대부분의 몬스터를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른 유물에 비해 내구성 또한 뛰어나서 대량 조리 시에도 수일은 버틸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몬스터가 없지 않습니까?”
“맞아요, 거리에 차량과 노숙자들만 있는데.”
아직 동료들은 왜 이걸 구입했는지 의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소악마가 등장해서 그 의문을 말끔히 해소해 주었다.
“아 참, 이야기하는 걸 깜빡했는데 이제부터 무대에 주기적으로 몬스터가 소환됩니다. 너무 분위기가 한가한 것 같아서요.”
이로써 식량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우선 몬스터를 토벌하여 그 사체부터 구해야겠지.’
일행과 함께 밖으로 나서자 시가지를 성큼성큼 활보하는 괴수들이 눈에 띄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