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검은 별의 재해 (3)
기척을 숨기고 다가오는 자들이 대략 5~6명이었다.
잠시 대기하고 있자 저 너머에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구역에서 제법 행패를 부린 것 같더군. 그래서 경고를 하러 왔다.”
최선두에 선 채 말하는 인물은 인상이 날카로웠다.
엄익현.
국내에서 유명한 연예인의 자식인데 방탕한 성격을 타고났다.
“단지 경고만 하러 온 것 치고는 상당히 은밀한 움직임이던데 ?”
“응? 급습하려던 거 알고 있었냐…? 하하, 재미있군.”
엄익현은 잠시 당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어서 그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자신의 철학을 설파했다.
“뭘 모르는 것 같으니 설명해주지. 인간은 말이야, 원래 최대한 얍삽하게 살아야 하는 거야.”
엄익현에게 있어 세상은 결코 공정한 무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회의감에 빠졌고, 쾌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죄악의 사도로 타락할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인물이군요. 여러모로 말세가 가까워졌단 느낌이 듭니다.”
“저런 자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건 무의미하겠죠. 평화적인 해결은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요.”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는지 시르케와 실비아가 감상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엄익현이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뭘 그렇게 심각한 고민을 하고 그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 있다고! 너희들이 지금 당장 처한 현실을 봐!”
타천사가 강림한 이상, 학원도시도 더는 안전하지 않다.
언젠가 대혼란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면, 차라리 무법자로 일찍 정착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제정상이 아닌 것치고 엄익현은 나름대로 냉정하게 현실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악의 사도가 되어 덧없는 쾌락을 추구하겠단 건가요. 어리석은 작자로군요.”
옆에 서있던 멜리사가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엄익현을 향해 서늘한 살기를 내뿜는 중이었다.
“딱히 네놈들에게 우리와 함께하라고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계속 방해하면 끝이 좋지 못할걸?”
“무슨 의미지?”
“그건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거야. 후회하기 전에 어서 여길 떠나라고.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키킥.”
엄익현은 이쪽의 여인들을 향해 혀를 날름거리더니 수하들과 함께 물러났다.
내심 기분이 더러웠는지 메르첼이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저런 악질도 존재하는군요. 여기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처단하고 말겠어요.”
메르첼은 사제답게 약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한편, 메이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저 녀석의 혈액, 구해올 수 있어? 그럼 이곳을 정리하는 게 한결 수월해질 거야.”
네뷸러스의 일원이었던 아르센처럼 피의 속박을 걸면 엄익현도 꼼짝없이 복종할 터다.
전요한도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속전속결이 최선이겠지. 이런 식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이쪽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나서 죄악의 사도들은 함부로 전면전을 감행해오지 않았다.
대부분 기습을 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치고 빠졌고, 덕분에 동료들은 적잖이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한번 추격해보자. 일행 중에 거동이 빠른 자 세 명만으로.”
멜리사가 안 그래도 엄익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곧바로 후습을 제안했다.
그녀의 의견에 따라 전요한은 엄익현을 생포하기 위한 추격조를 뽑았다.
“멜리사와 메이 양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계속 토벌을 진행해 주세요.”
* * *
엄익현을 추격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진 않았다.
녀석이 여기저기 숨겨진 비밀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혼란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멜리사는 본업이 특수요원이고 한유림은 혈마법을 사용한다.
양쪽 다 추격엔 제법 소질이 있었기에 엄익현과는 거리는 점차 좁혀져갔다.
“메이, 어느 쪽인 것 같아?”
“…저기.”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하던 메이가 우측 통로를 가리켰다.
그녀는 혈마법을 이용하여 감각을 곤두세운 상태.
흡사 흡혈귀와 같은 인지 능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행이 바짝 따라붙자 엄익현은 위협을 느꼈는지 수하들을 보내 발을 묶으려 했다.
“제사장님의 경고를 무시하다니. 여기를 너희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고통으로 절망하며 죽게 해주지!”
“여자애라고 봐주는 일은 없다!”
일행의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이 위협적인 동작으로 한마디씩 떠들었다.
헌터이긴 해도 끄나풀에 불과한 자들이었기에 전요한은 행동을 서둘렀다.
“크헉!”
“이런 말도 안 되는!”
수하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일시에 쓰러졌다.
각자 한 명씩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3초.
사이드를 거두며 메이가 싱겁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약하네.”
“우리가 강해졌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거야.”
전원이 상당한 전력이다.
추격이 계속되자 결국 엄익현은 포기했는지 남은 수하들과 함께 우리를 기다렸다.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군. 역시 유명세가 헛것은 아니었던 모양인걸?”
킥킥대는 엄익현의 표정에선 여전히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다.
녀석이 뭔가 꼼수를 부리고 있다 판단한 전요한은 통로의 벽면을 살폈다.
여긴 이세계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사당.
유적지답게 침입자에 대비한 수단을 강구해놨을 가능성이 높았다.
휘리리리릭!
예상대로 곧이어 수많은 독화살들이 벽면에서 튀어나와 일행을 엄습해왔다.
전요한은 마력 방벽으로 간단히 방어한 후 엄익현을 쳐다봤다.
“이게 끝이냐?”
“크크… 그럴 리가. 이쪽도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고.”
엄익현이 말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음산한 마기가 주위를 뒤덮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함정.
그걸 본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잘도 수작을 부리는군.”
한 치 앞도 보지 못할 정도로 시야가 제한되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장난질에 당할 전력이 아니었다.
사이드를 치켜든 메이가 먼저 엄익현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역동하는 피의 흐름을 추적하며 가볍게 승부를 냈다.
“크윽!”
방심하다가 무기마저 빼앗겨버린 엄익현.
믿기지 않는지 무릎 꿇은 채 눈만 깜박인다.
“뭐, 뭐야 이게….”
아무래도 녀석은 악마종의 권능만 믿고 우리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전요한은 이만하면 됐다는 의미로 메이에게 눈빛을 보냈다.
“참교육은 충분히 했어.”
엄익현에게 피의 구속을 걸면 그를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었다.
이윽고 메이가 거대한 사이드를 든 채 다가가자 엄익현은 두려워하는 얼굴로 식은땀을 흘렸다.
* * *
나름 고생을 해서 엄익현을 사로잡은 전요한이었다.
이 기회에 죄악의 사도들을 일망타진하기로 했다.
“엄익현이 제사장 역할을 하는 모양이니 놈을 미끼로 전부 한자리에 모이게 하죠.”
죄악의 사도들이 여기에서 하고 있는 주된 일은 바로 악마종을 소환하기 위한 집단의식이었다.
그 점을 이용하여 모든 녀석들을 불러들이면 손쉽게 서남부 세력을 박멸할 수 있다.
“혹시 소악마가 방해하면 어떻게 하지?”
“녀석도 그러진 못할 겁니다. 아무리 재량권이 있어도 타천사의 눈치를 봐야 할 테니까요.”
타천사가 내린 시련은 모두에게 공평했다.
그의 본목적은 아직 알 수 없으나,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
걱정하는 채린을 안심시킨 후 전요한은 엄익현을 쳐다봤다.
녀석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으나 메이의 말에 철저히 복종하고 있었다.
“들었지? 전부 불러서 성대하게 의식을 거행해. 시간은 넉넉히 내일까지 줄게.”
“…알겠습니다.”
엄익현은 피의 구속에 걸려 있어서 이제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녀석이 떠난 후 일행은 주둔지에 남아있는 자들과 연락을 시도했다.
- 그쪽은 별일 없습니까?
- 네, 유랑하는 집단과 몇 번 마찰이 일어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주둔지에 남아 있는 자들은 대부분 상처를 입었거나 전투력이 다소 미흡했다.
그들을 오래 방치하면 다른 신흥 세력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다.
전요한은 먼저 일행을 복귀시키기로 했다.
“시르케와 메이 양만 남고 나머지는 되돌아가세요. 지금도 문제는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이쪽의 세력이 가장 큰 골칫거리긴 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어디든 곤란한 일은 벌어지고 있었다.
하루에 최소 한 명을 죽여야 자신의 생존이 보장되는 무대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 느꼈는지 일행은 딱히 반대하지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부디 조심하세요, 요한 씨.”
“주둔지 쪽은 저희가 책임지고 지키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들 각자의 담당 구역으로 떠났다.
시르케가 내게 개인적인 질문을 던져 왔다.
“만약 이곳에 있는 녀석들이 박멸되면 그다음엔 어떻게 할 거죠?”
우리도 하루에 한 명은 죽일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런데 서남부의 세력을 정리하면 곤란을 겪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름 인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던 터라 무고한 이들을 학살하는 건 힘든 상황.
하지만 혼란한 무대의 실상을 알기에 별로 걱정이 들진 않았다.
“죄악의 사도들은 계속해서 생겨날 거야. 특정 세력으로 한정하기 어렵지.”
“왜 그렇게 생각하죠?”
“생존자들이 싫어해도 상황이 그렇게 유도할 테니까.”
타천사가 모두에게 내린 시련은 가혹했다.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을 터였다.
“타천사는 쉽게 해치우기 어려울 겁니다. 녀석이 있는 신전은 강력한 결계로 보호받고 있어요.”
“더는 시련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막아야지. 그러면 직접 나서게 될 거야.”
“어떤 방법으로요?”
“타천사에 대항할 만한, 반대편의 권능자를 불러들여야지.”
어떻게 보면 인간의 본성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다.
악한 면이 득세하는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면이 억제에 성공하는가.
메이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인간의 본성은 믿지 않아. 기본적으로 다들 이기적이니까.”
그녀의 현실적인 성향은 시르케의 공감을 샀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죄악의 편에 설 사람들이 많은 건 사실이에요. 이건 누군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듯한 대화.
전요한은 헛기침을 한 후 시르케에게 질문을 던졌다.
“달리 의견이라도 있어? 어떤 것이라도 좋아.”
“엄익현이 사도들을 불러 모으기 전엔 딱히 할 게 없습니다. 심심하면 말 상대라도 해드리죠.”
“나쁘지 않은 생각이네.”
시르케와 떠드는 건 언제든 재미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전요한이 그녀의 어깨에 있는 캣시의 꼬리를 만지작거렸다.
“냐옹!”
앞발을 들어 올린 캣시가 눈을 부라리며 철저한 응징을 가해왔다.
“고양이 괴롭히지 말고 가만히 이야기나 해. 시끄러우니까.”
불평을 늘어놓은 메이가 구석지에 들어누웠다.
전요한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캣시를 쳐다봤다.
“넌 왜 나만 싫어하니?”
“니야옹!”
더 건드릴 생각은 말라며 캣시가 꼬리를 치켜세웠다.
그 모습을 본 시르케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여전하네요. 대미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게 바보 같았죠.”
“내가? 그랬나?”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따라나서게 되었어요.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동행하는 중이지만요.”
추억이 담긴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두 사람은 점차 과거 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