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검은 별의 재해 (2)
서남부 현지에선 지켜보기 힘든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극악무도한 학살자들에 의해 제압당한 이들은 최소 팔다리 하나씩을 잃은 채 바닥에서 신음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옛 동료들은 별다른 피해 없이 분전 중이었단 사실이다.
“상급생 군! 오셨군요!”
“어서 합세해 주세요! 이쪽은 지금 버티고 있는 게 고작이에요!”
실비아와 메르첼이 먼저 전요한을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한편, 멜리사는 진노했는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네놈들이 사람이냐아아아!”
그녀의 화력은 워낙 막강해서 학살자들조차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타이밍 좋게 등장한 덕분에 전력지원은 확실한 효과를 볼 것 같다.
일행과 함께 전장으로 뛰어들며 전요한은 각성 모드에 돌입했다.
“제가 후방에서 지원하겠어요!”
“나는 전방으로 가겠어.”
함께 따라온 채린과 메이가 자신의 무구를 꺼내 들며 합세했다.
한편, 시르케는 영계 마법을 시전하며 모두를 보조해줬다.
“직접적인 전투는 맡기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불리한 형세가 되자 동북부의 집단은 난감해하며 점차 물러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다음엔 전부 도륙해주마!”
녀석들이 아니꼽긴 했으나 굳이 쫓아 박멸하진 않았다.
이곳의 세력이 이미 피해가 크고 승부는 다음 기회로 미뤄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전투가 종결되자 생존자들이 감사의 뜻을 전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전요한 님.”
이들 대부분이 그의 존재를 일찍이 알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까지 상당한 난관을 거쳐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남부의 헌터들은 전요한을 적극 신뢰했고 사실상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되려고까지 했다.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굳이 세력을 나눌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전요한 님이 저희를 이끌어 주시면 큰 영광입니다.”
혼란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결국, 이번 전투를 계기로 세력이 통합되었고 이를 지켜본 소악마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모처럼 인원을 바꿔놨더니 다시 하나로 뭉치셨군요…. 곤란하네요.”
“이번엔 어쩔 셈이지?”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네요. 다만, 세력이 커지면 미션을 클리어하기 어려워진단 것만 기억하세요.”
매일 최소한 한 명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집단의 규모가 커지는 것은 결과적으로 내부 경쟁을 야기한다.
하지만 아직은 동북부의 죄악의 사도무리가 확실한 적으로 버티고 있었기에 별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쓸데없는 걱정인 것 같군.”
“아직 4일이나 더 남았으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요. 히히.”
소악마는 끝까지 이간질을 하다가 다시 사라졌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녀석은 모두를 대하는 태도가 더 악질적으로 변했다.
부조리함을 느낀 메르첼이 미간을 찌푸리며 결국 불만을 토로했다.
“이건 너무 일방적이군요. 던전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이에요.”
“어쩔 수 없죠. 재앙은 이미 뿌리내렸으니까요.”
전요한은 현실적인 결정을 내리기로 했다.
결국엔 다수에 의한 논리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대.
그저 무대 위의 약자들은 희생될 따름이었다.
박수호도 이번 전투로 한계를 느꼈는지 남다른 각오를 보인다.
“이대로 뒤처지지 않으려면 분전해야겠네.”
직접 챙겨 주긴 어려운 상황.
그러니 성장할 거라 믿는 수밖엔 없었다.
전요한은 서남부의 헌터들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자, 그럼 다음 일을 논의해보죠. 조만간 저들에게 크게 한 방 먹일 생각입니다.”
* * *
내부 정비를 하면서 전요한은 현재 상황을 다시 점검해봤다.
첫 번째 미션이 끝나려면 아직 4일이 더 남았고 슬슬 집단 간의 대립이 본격화되어 간다.
무대가 된 지역구는 무법지대라 봐도 무방하여 매일같이 크고 작은 범죄가 일어나는 상황.
이 같은 혼란이 계속되는 건 좋지 않으므로 억제가 필요했다.
“영웅 행세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단지 상황을 악화시키지 말자는 거죠.”
아직 초반부에 해당해서 일행이 주도권을 쥘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단 동북부의 절대악 성향의 변절자들만 처리하면 직접적인 위협은 사라지리라.
그래서 전요한은 이들을 칠 계획을 세웠고 승산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저번 전투로 그들도 적지 않은 수가 상처를 입었어요. 그만큼 경계도 허술해졌겠죠.”
함께 전투 준비를 하던 실비아가 자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는 훈련 교관들 중에서도 특히 열성적이었다.
“네, 기습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시간을 더 줘서 좋을 것도 없겠죠.”
저들이 진행하는 중인 서브 미션은 죄악의 강림과 관련 있었다.
따라서 내버려 두면 곤란을 겪을 테고 피해도 더 커질 것이다.
“좀비 사태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긴 하네요. 그때는 재해를 막아야 한단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선과 악의 대결 같습니다.”
황량하게 변한 시가지를 바라보던 메르첼이 개인적인 감상을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젠 이세계 존재들의 개입이 더욱 본격화된 시점이다.
이런 혼란상은 앞으로 점차 확대될 예정이란 점에서 많은 이들을 좌절시킬 것이다.
“선과 악의 대결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형의 갈등 구도가 형성되겠죠. 이건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번 위기를 운 좋게 넘기더라도 현실 세계가 디스토피아로 변해버릴 가능성은 언제든 존재한다.
그 확률을 최대한 늦추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럼 결판을 지으러 가죠. 미래에 대한 걱정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전요한은 일행을 이끌고 서남부로 향했다.
‘죄악의 하수인들이나 처리하는 건 좀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죄악의 강림이 현실화되면 안 그래도 무간지옥이나 다름없는 이곳이 더욱 살벌하게 변할 터다.
“슬슬 적들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아요. 조심하세요.”
후방에서 뒤따르던 시르케가 모두에게 경고의 말을 전했다.
그녀의 말대로 일행은 성역화가 된 구역에 진입해 있었다.
네뷸러스의 계획에 의해 이세계의 유적지들이 건축되고 악마적인 의식이 행해졌던 현장.
왠지 모를 기분 나쁜 기운이 가득하다.
“매복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한 놈도 안 보이네.”
살라맨더를 앞세운 채 이동하던 멜리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세력은 인원이 적지 않은 편이라 감시자가 있어야 정상인데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네. 다들 긴장하는 게 좋겠어.”
함께 앞장서던 박수호도 수상쩍어하는 눈빛이었다.
이런 모두의 의문은 잠시 후 어떤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저, 저건….”
“세상에….”
악마적인 의식이 거행되는 제단.
사로잡힌 민간인들이 그 희생양으로서 산 채로 바쳐지고 있었다.
그간 이런저런 참상을 경험하며 내성이 생겼던 일행도 차마 지켜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어서 해치우죠.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전요한은 먼저 죄악의 사도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들은 의식을 잠시 멈추고 일행과 팽팽한 접전을 벌였다.
“신성한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네놈들이 뭔데 끼어드는 거야!”
한때 같은 헌터였다고 믿기 어려운 타락자들.
저들은 점차 제어하기 어려운 광기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사제 계열의 이능력자로서 사명감을 느꼈는지 메르첼이 평소보다 더 분발하여 맞서 싸웠다.
“여러분은 전부 심판받아야 합니다!”
그녀가 보여주는 전력은 가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곧, 적진은 신성 마법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함께 싸우던 동료들이 혀를 내둘렀다.
“대, 대단하네요.”
“이것이 성녀의 권능….”
확실히 메르첼은 같은 상황에서 큰 도움이 된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그녀가 무대의 특성상 현실적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단 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되도록 신념이나 가치관을 뒤흔드는 갈등은 피해야 했다.
“너희들의 지도자는 어디에 있지?”
전투가 승리로 종결된 후 마지막 잔당을 향해 물었다.
녀석은 목에 쇠붙이를 갖다 대자 뭐가 재미있는지 킬킬하고 웃었다.
“큭큭… 너희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어.”
이미 혼돈과 무질서로 한껏 재미를 본 상태라 정상적인 대화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단정하지 마시죠. 이쪽도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으니까요.”
제대로 맛이 가버린 눈을 노려본 후 곧바로 녀석을 참수했다.
이후 전요한은 다시 일행과 함께 적들의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혼란상을 몸소 겪으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한 명의 인간이 모든 걸 바로잡기란 불가능에 가깝단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도한 정의감이나 대의는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죄악의 사도들을 진압해 나가며 전요한은 어떻게 일행을 이끌어 나갈지 생각했다.
모두가 곤란해할 딜레마는 언젠가 다시 찾아올 테고 그땐 잃는 것이 있더라도 최선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고민이 많아 보이네.”
수상한 장소를 수색하던 도중 채린이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솔직하게 심정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제가 포기해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포기해야 할 것들?”
“응, 점차 상황이 악화될 테니.”
기존의 현실에 기대기 어려워지면 결국은 자신과의 싸움이 될 것이다.
어떤 신념을 고수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로 달라질 터.
전요한이 추구하는 건 모두의 구원자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확실히 그런 지향점은 누구에게든 무리겠죠. 하지만 상급생 군은 올바른 선택을 내릴 거라고 믿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실비아는 나를 신뢰해 주었다.
훈훈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멜리사가 시가를 문 채 다가왔다.
그녀는 이제 상황에 적응했는지 조금 여유가 생겨나 있었다.
“혹시 제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여길 조사하면서 알아낸 건데 이들이 숭배하는 존재는 바르바토스야.”
탐욕의 죄악, 바르바토스.
일전에 쓰러뜨린 스반힐트와 동급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녀와 맞서 싸웠던 악몽이 떠오르자 채린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만약 바르바토스가 강림하면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할까요….”
“모르긴 몰라도 그 일대가 순식간에 괴멸되겠죠. 하지만 죄악의 사도들이라 해도 그녀를 불러들이는 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무려 칠죄종의 한 명인 바르바토스가 소환되려면 그 준비 과정이 만만치 않다.
비록 이 구역이 성역화되었다고는 해도 그녀를 만족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적어도 현재 무대가 되는 지역구 전체가 성역화되어야 가능성을 따져볼 수 있을 테지.
물론 그 전에 녀석들의 계획을 저지하고 말 것이다.
“도중에 방해를 받으면 하위의 악마종이라도 소환하려 하겠군. 예상대로 골치 아파지겠어.”
숨겨진 통로가 없나 살피던 율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천리안을 지니고 있어서 이번 토벌에 상당한 도움을 주는 중이었다.
“누군가 침입했다. 혼자가 아니고 다수야.”
미리 닥쳐올 위협을 이런 식으로 미리 알려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전요한은 만일에 대비해 전투 준비를 했다.
“무슨 속셈이 있을지도 모르니 여기서 기다려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