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검은 별의 재해 (1)
모여든 인파가 수군대며 여러 갈래의 무리로 갈라졌다.
서로를 죽이라는 시련이 내려졌지만, 아직은 눈치를 보며 주저하는 모습들이다.
“이만 출발하죠. 일주일간 생존하려면 미리 선점해둬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전요한은 마침 갖고 있던 지도를 펼친 후 동료들을 이끌었다.
* * *
결계에 갇힌 영역은 학원도시의 절반가량에 속했다.
중앙부의 상아탑은 교묘하게 포함되지 않은 채였다.
적지 않은 일반인이 휘말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점차 약탈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점점 많은 사람이 죽어 가는군요.”
“저들을 지켜주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것이 이번 미션이니까요.”
그럴 용기나 능력이 부족한 자는 첫째 날에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일행도 별수 없이 타인의 목숨을 취했으나 그 대상은 악한 무리로 한정했다.
“현재 상황,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납득이 안 돼요.”
편의점의 식재료를 차량에 옮기던 메르첼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심정이 동조하는지 옆에 있는 채린이 거들었다.
“분명 사건은 해결했는데… 뭔가 우리가 놓친 게 있는 것 같아요.”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긴 했다.
단지, 점점 규모가 커져가는 무질서로 인해 불가항력적인 압력이 작용했을 뿐.
불순한 무리가 활개치고 다니는 한 이런 식의 재해는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네뷸러스의 일원 둘을 처리했단 점이겠죠.”
대검을 어깨에 걸친 멜리사가 시가를 피우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생도복 차림의 메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르센은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었어.”
“그럴지도. 하지만 상황이 이런데 잘못해서 속박이라도 풀리면 난리가 났을 거예요.”
멜리사는 만약에 대비해야 한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사실 며칠 전에 아르센을 처형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뭐, 어쩔 수 없죠. 당장 저희 앞날도 예견하기 어려우니까요.”
어느덧 차량에 모두 적재된 물품을 보며 전요한은 대충 논쟁을 마무리했다.
지금 중요한 건 지난 일이 아니라 앞으로의 생존율을 최대한 올리는 방법이다.
“오늘 밤은 어디에서 보내야 하는 거야?”
“글쎄. 되도록 기습에 대비할 수 있는 장소가 좋겠지.”
서로를 죽여야 생존 가능한 법칙이다 보니, 야밤에도 상대 진영을 급습하는 경우가 잦았다.
물론 일행은 전투력이 막강한 걸로 알려져서 더는 함부로 찾아오지 않지만 말이다.
채린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한적한 곳의 군용 시설을 가리켰다.
“저기가 딱 좋을 것 같지 않아?”
“누군가에게 점유 중인 게 아니라면 괜찮아 보이네.”
좀비 사태가 발발했을 당시엔 교도소에서도 잠시 생활했던 마당에 군용 시설이라고 딱히 꺼려지진 않았다.
일행은 차량을 끌고 다가간 후 우선 인적이 있는지부터 살폈다.
“비교적 최근에 폐기된 장소 같아. 사용한 흔적도 안 보이고 잡초가 무성해.”
앞장서서 수색을 펼치던 박수호가 걱정 말라는 듯이 손짓해왔다. 그는 갑작스러운 혼란에 맞서기 위해 전요한이 잠시 불러들인 상태였다.
막사 내부로 들어서자 매트리스를 깔고 모두가 누울 만한 공간이 있었다.
“이런 곳이 잘도 아직까지 점유되지 않고 있었네.”
“구석진 곳이라 눈에 잘 띄지 않은 거지. 덕분에 우리는 좋은 자리를 차지한 거고.”
메이는 오늘 밤 편히 지낼 수 있단 사실에 들뜬 표정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그녀를 먼저 침상에 눕힌 후 전요한은 지도를 펼쳐 봤다.
“이제 대략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 수 있겠군.”
정처 없이 떠도는 무리를 제외하면 크게 네 집단이 지역구를 분할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경계해야 할 이들은 당연 절대악 성향으로만 뭉친 죄악의 사도들.
지도상으로 동북쪽을 차지한 죄악의 사도들은 심심하면 무리를 지어 민간인을 학살하고 다녔다.
“지금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지만 보급품이 떨어질수록 갈등이 심화될 거에요.”
옆에서 세력 분포를 확인하던 실비아가 경고를 해왔다.
“그렇겠죠. 결국은 경계 지점에서 무력 충돌이 빈번해지겠죠.”
앞으로 어떤 분쟁이 발생할지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되었긴 해도 같은 지역구 내에선 전파가 통하는 모양이에요. 이참에 우호적인 세력과 연결망을 구축해놓는 게 어때요?”
시가만 피우는 것이 무료했는지 멜리사가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여기에 쓸 만한 통신 장비가 있는지 찾아보죠.”
그렇게 해서 창고를 뒤져 본 결과 실사용이 가능한 것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수량이 둘뿐이어서 하나의 세력만을 선택해야 한다.
“서남쪽의 중립적인 헌터 집단에 주는 편이 어떻겠나? 그들과는 여러모로 이해관계가 맞을 거다.”
함께 창고를 뒤지던 율리안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전요한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은 힘들고 기회가 있을 때 건네주죠.”
아직은 3일 차 되는 날이라 어느 세력이든 안팎으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막사로 돌아와 잠시 쉬고 있을 때, 소악마가 허공에서 튀어나와 일행을 내려다봤다.
“역시 이 집단은 사망자가 좀처럼 안 나오는군요. 어떻게 보면 조금 따분하겠어요.”
소악마는 정당한 범위 내에서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자신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분산시킬 셈인가? 그건 과도한 개입이라 생각되는데?”
“네, 아무래도요. 하지만 다른 집단과 적당히 인원을 섞는 것까진 문제가 되지 않다고 봅니다.”
소악마가 묘책이라는 듯이 낄낄거리며 혼자서 팔짱을 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박수호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그냥 차라리 우리에게 악감정이 있다고 말하지 그래?”
“솔직히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저는 단지 미션 진행을 더 재미있게 하고 싶을 뿐이니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소악마는 그렇게 말하고서 비열한 표정을 마지막에 살짝 남겼다.
어차피 반발해봤자 자신의 뜻을 끝까지 밀어붙일 테니 일단 녀석이 하자는 대로 따랐다.
“좋아, 하지만 그만큼 우리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지 않겠어?”
“물론이에요. 제 직권으로 다른 집단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절반 정도의 인원이 다른 세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 * *
인원이 교체되고 남은 동료는 채린과 메이 그리고 시르케뿐이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괜히 수작에 넘어간 것 같아.”
“나는 상관없어. 어차피 별로 걱정도 안 되고.”
걱정하는 채린과 달리 메이는 사뭇 대조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편, 시르케는 별말 없이 혼자서 체스만 두고 있었다.
“으음….”
체스는 그녀 나름대로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오히려 타천사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편이 나을 겁니다. 저희는 줄곧 압도적인 1위를 달려왔으니까요.”
“그래도… 이번엔 곤란하지 않나요. 매일 한 명씩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인데.”
채린은 스스로 말하고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 또한 살인을 저질렀는데 질 나쁜 악인만 처단한다고 설득하여 겨우 해낸 것이었다.
“함께 동료를 믿어 보죠. 마지막 날엔 반드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 겁니다.”
채린을 안심시키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요한이 막사 입구를 향해 걸어가자 메이가 입을 열었다.
“어디 가?”
“잠시 바람 쐬러.”
아직 보급품의 물량은 충분해서 굳이 군용 시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외곽의 철조망을 잠시 점검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시죠?”
“나는 서남쪽 집단의 연락책이야. 다름이 아니고 협상하러 왔어.”
서남쪽 집단은 중립적인 헌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동료들 중 다수가 넘어가기도 해서 연락책이란 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협상인데요?”
“함께 동북부 집단을 쳐줬으면 좋겠어. 그 극악무도한 녀석들은 어차피 모두 제거해야 할 대상이잖아?”
이건 며칠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애초에 이 재해 같은 상황을 만든 것도 그들이니 반(反) 연합이 결성되는 게 자연스럽다.
논리적으로 따져 봐도 손해 볼 것이 없는 상황.
전요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밤에 기습을 할 생각인가요?”
“아니, 놈들도 기본적인 경계는 할 테니 그냥 쪽수로 밀어붙일 거야. 그리고 넌 꽤나 실력자잖아?”
연락책은 대충 전요한에 관해 전해 들은 눈치였다.
전요한은 그의 인상착의를 유심히 살폈다.
이후 어제 발견했던 통신 장비를 하나 건네주었다.
“이걸로 교신하도록 하죠.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으면 배터리가 사나흘은 유지될 겁니다.”
“알았어, 고마워. 그럼 다음 연락 때까지 잘 지내!”
연락책은 혹여 적대 세력이 있나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급히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엔 민간인 집단의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지하철역에서 지내는 피난민들을 이끌고 있는데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평화 조약인가요?”
“네? 네… 나중에 중도 파기가 되더라도 일단 가능할까요?”
민간인 집단의 대표는 그동안 어지간히도 시달렸는지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이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득실이 있었으나 전요한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하루에 한 번 사람을 보내서 그쪽의 상황과 당일 입수한 정보를 전해주세요.”
“하루에 한 번이요?”
“네,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제가 일당을 챙겨 주겠습니다.”
여기서 일당이란 하루분의 식료품과 구호물자를 의미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기에 민간인 집단의 대표는 흔쾌히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전요한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민간인 집단의 대표는 자기 집단으로 되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입장을 듣지 않은 세력은 동북부 집단만이 남았다.
예상대로 그들은 날이 저물 때까지 아무런 의사 표명이 없었다.
전요한은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서브 미션이요?”
“네, 동북부 집단에겐 전혀 다른 내용의 과제가 주어지고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이번 무대는 죄악과 관련이 있죠. 그리고 민간인, 헌터 쪽과 이야기 해본 결과, 그들의 학살은 매일 일정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마치 할당량을 채우는 것처럼 말이죠.”
“음… 설득력이 있군요.”
이런저런 정황 근거를 제시하자 시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 옆에 있던 메이는 곧바로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 죄악의 강림 같은 의식을 여전히 벌이고 있단 말이네.”
“맞아, 애초에 그들에게 유리한 상황이니 우리와는 교류하지 않는 거지.”
결국, 모두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선 절대악 성향의 도전자들이 사라져야 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함께 세우고 있을 때 통신 장비로부터 다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 지금 자리에 있어?
비밀리에 협력 관계를 요청해왔던 서남부 집단의 연락책이었다.
- 무슨 일입니까?
- 동북부 놈들이 우리 진영으로 쳐들어왔어! 형세가 불리하니까 최대한 빨리 엄호해줘!
아무래도 녀석들이 먼저 선수를 친 모양이다.
전요한은 함께 머무르던 일행을 전원 긴급 소집했다.
“그러니까 다른 진영을 도와주러 간다는 말인가요?”
“전에 같은 세력이긴 했지만 조금 성급한 행동 아닙니까? 엄연히 이해관계가 다른데….”
이번에 소악마에 의해 교체된 인원들이 주로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기존의 일행이 아니기도 했고, 소수에 불과했기에 주둔지 방어를 맡겼다.
이후 전요한은 나머지와 함께 곧바로 서남부로 향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