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인물이 스탯을 숨김-90화 (90/180)

제90화. 위험한 게임 (4)

일단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거리까지는 다가가야 했다.

그래야만 피의 속박을 걸어서 놈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아르센은 도망칠 생각이 없어. 우리가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자리를 지키는 중이야.”

함께 달리던 메이가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해줬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단 것인가.’

하지만 현재로선 아르센을 노리는 편이 최선이었다.

“어떻게 제 위치를 알아냈는지 궁금하군요. 분명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텐데요.”

이윽고 어둑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아르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못 궁금해하는 기색이었으나 전요한은 대답 대신 다짜고짜 실력 행사를 했다.

“지금이야.”

“응.”

「피의 속박」.

흡혈귀가 아닌 존재에게도 강제력이 발생한다.

메이가 그 범위를 점차 확대하자 아르센이 호흡 곤란을 보이며 털썩 쓰러졌다.

“큭…!”

결국, 이런 식으로 승리는 예정되어 있었다.

단지 녀석이 제안한 게임에 조금 어울려줬을 뿐.

저번과 달리 맥도 못 추는 모습을 보며 전요한은 입을 열었다.

“제가 이겼네요.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시죠.”

“그건 곤란한데요…. 아직 계획이 실패한 건 아니니까요.”

손만 까딱해도 죽을 처지인데 아르센은 태연하게 반박했다.

전요한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후 메이로 하여금 아르센을 복종시키도록 했다.

“후후….”

사실상 끝이었으나 아르센은 마지막 순간에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런 녀석이 기분 나빴는지 메이가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웃지 마. 그리고 앞으로 묻는 말에만 대답해.”

“…네.”

피의 속박이 걸려 있는 와중에도 아르센의 의식은 존재한다.

단지 그로 인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할 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이번 사건의 전말을 모두 설명해. 지금 당장.”

“…저희는 격변의 중심지인 한국에서 음모를 계획했습니다. 소환 제단을 완성하여 이세계의 존재들을 불러 모으려 한 것이죠.”

아르센의 입에서 구체적인 계획이 폭로되었다.

“당장 하수인들을 돌려보내고 계획은 중단하도록 해.”

하지만 이로써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되돌아갔다.

남은 잔당까지 해치우기 위해 우리는 아르센을 철저히 심문했다.

“국내에 체류 중인 네뷸러스의 일원은 또 누가 있지?”

“저 외엔 게헨나뿐입니다. 그녀는 최종 국면을 준비하기 위해 의식에 몰두하는 중이죠.”

게헨나.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녀도 네뷸러스의 일원인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다.

전요한은 심문을 서둘렀다.

“네뷸러스의 인원은 모두 합해서 몇 명이지?”

“다섯입니다. 나머지 셋은 유럽에서 활동 중이죠.”

이번 계획은 네뷸러스로서도 존망을 건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단 말인데, 이유는 오래전 입수한 예언서의 내용 일부가 최근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다름 아닌, 전요한의 존재라고 한다.

“내가 특별한 존재라고?”

“네, 당신은 예언 속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자. 그래서 우리는 줄곧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네뷸러스의 동기 자체는 설명되는 셈이다.

몇 가지 질문을 추가적으로 더 한 후, 전요한은 메이에게 아르센을 맡겼다.

“되도록 살려둬. 아직 이용 가치가 충분히 남아 있으니까.”

아르센은 네뷸러스의 일원에 불과했다.

나머지 넷을 제거하기 전까진 더 캐물을 필요성이 있단 의미다.

“안심해. 약속은 지킬 생각이야.”

메이는 아르센을 포박한 후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를 뒤로하고 의식이 행해진단 곳으로 향하던 도중 실비아와 다시 마주쳤다.

“취객은 어떻게 했어요?”

“궁지에 몰리더니 자살했어요. 다른 녀석들은 죄다 사라졌고요.”

하수인들이 물러난 건 아르센의 지시 때문이었을 터다.

일단 안심한 다음 게헨나의 존재를 알렸다.

“귀찮은 의식을 진행하는 여자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게헨나가 다른 수작을 부릴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하수인들이 모두 빠져나가서 한적해진 밤거리를 전요한은 전력으로 달렸다.

* * *

게헨나가 있단 장소는 이세계의 유적지로 가득했다.

언제 이런 수고를 했나 싶을 정도로 소환 의식이 상당 부분 진전된 상태다.

성당처럼 웅장한 건축물 안으로 들어서자 수상한 의식을 벌이는 적발 여성이 보였다.

“당신이 게헨나입니까?”

“네, 맞아요. 오늘 밤 예언의 일부를 재현할 예정이죠.”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게헨나는 숙연한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의식을 계속했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였다.

제단 위엔 희생된 일반인들의 주검이 놓여 있다.

“이 만행은 이제 끝입니다. 당신의 동료인 아르센도 붙잡았으니 의식은 포기하세요.”

“역시 그가 실패했군요. 하지만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제 자신이 마지막 제물이 되는 것이죠.”

게헨나는 간단히 답변한 후 제단 위에 있던 검은 열매를 집어삼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흉측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악마화입니다. 결국 일을 벌였군요.”

이렇게 된 이상 게헨나는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숨통을 끊어야 한다.

“그렇게까지 예언에 매달리는 이유가 뭐지? 종말이 오면 구원이라도 해준대?”

“저희는 일종의 사명을 받은 것이에요. 그래서 거리낌 없이 목숨도 내던질 수 있지요.”

한 쌍의 앙상한 날개가 돋아난 후에 게헨나가 대답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실비아가 이해를 포기한 듯이 고개를 저었다.

“광신도의 사고방식은 당사자가 아니고선 받아들이기 어렵겠죠.”

그녀는 이어서 장검을 꺼내 들었고 단독으로 게헨나를 향해 돌격했다.

카랑!

하지만 암흑 장막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게헨나를 보호했다.

“재해의 도래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미 오래전에 예언되었고 모든 준비가 끝났기 때문이죠.”

게헨나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의 압도적인 모습에 실비아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해야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확실히, 이번엔 처음부터 전력으로 맞서는 편이 좋다.

“제가 균열을 일으킬 테니 쐐기를 박으세요.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입니다.”

각성 모드로 돌입한 후, 전요한이 앞으로 나아갔다.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장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수인들이 다시 나타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잡졸들의 등장이로군.’

아마도 악마화한 게헨나의 존재에 이끌려온 것 같다.

덕분에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손수 길을 열어야 했다.

스걱! 스걱!

하수인들은 어디에서 계속 충원되는지 좀처럼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하지만 기지를 발휘해서 겨우 게헨나의 목전까지 이르렀다.

전요한이 먼저 게헨나에게 일격을 가했다.

카랑!

그가 말했던 대로 암흑 장막에 일시적으로 균열이 생겨났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찌르기로 가세하자 암흑 장막은 더 버티지 못하고 파훼되었다.

“지금이에요!”

각성 상태의 실비아라면 충분히 유효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

“알겠어요!”

달려오던 실비아가 연보라색의 날개를 펼쳤다.

이어서 게헨나를 향해 거침없이 쇄도하기 시작한다.

“커헉!”

이 순간만큼은 악마화 중인 게헨나도 비명을 내질렀다.

수많은 검상이 그녀의 거대해진 몸체에 새겨진 결과, 최후의 일격이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혔다.

주르르륵.

탁한 피가 상처를 통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걸로 끝이 아니었고 전요한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음…?”

실비아의 검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쓰러지지 않다니.

아까 복용했던 검은 열매로 인해 각성 상태가 된 모양이었다.

“정말 멋진 기술인데 타이밍이 안 좋았군요. 아쉽게 되었어요.”

그새 상처를 치유한 게헨나가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다시금 모여든 하수인들과 함께 반격을 시작한다.

전요한과 실비아는 점차 수세에 몰렸다.

마침 그때, 기존의 동료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괜찮아요, 다들?”

“대체 무슨 일이야?”

“곧바로 합류할게요!”

최후의 결전이 새로운 국면에 돌입하는 순간이었다.

씨익 웃어 보인 후, 전요한은 다시 한번 게헨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승부를 내자!”

불과 얼마 전에 재생을 했으니 몇 분 안으로 치명타를 먹여야 했다.

시르케가 영계 마법을 시전하여 틈을 만들어 주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발을 묶어뒀어요! 화력을 집중하세요!”

전요한의 검격이 다시 한번 암흑 결계에 균열을 일으켰다.

이를 본 멜리사가 각성 상태에 돌입하여 대검을 진홍색으로 불태웠다.

“아무래도 마무리는 제 몫인 것 같군요!”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멜리사의 전력은 대단했다.

불타오르는 대검이 단번에 게헨나의 몸체를 꿰뚫는다.

“크헉!”

게헨나는 자신이 보고도 믿기지 않은지 눈을 부릅뜬 채 주저앉았다.

“대, 대체 무슨 짓을….”

세계적인 전력의 각성자가 한자리에 4명이나 몰려올 줄은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남은 것은 빈사 상태인 게헨나의 숨통을 끊어놓는 일뿐.

인원도 늘어난 터라 마무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런 결말은 인정할 수….”

게헨나의 마지막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렇게 위기를 넘기고 모두가 안도하는 중일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죄악의 사도들이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숨이 끊어진 게헨나를 제물로 바치기라도 하는 듯한 의식.

일행이 막으려 했지만, 워낙 수가 많아서 시간이 촉박했다.

“이러다 늦겠어요!”

다급해진 실비아가 모두에게 외쳤다.

눈앞의 소환 제단으로부터 무언가 불길한 징조가 감돌기 시작하는 탓이었다.

“대체 뭐가 튀어나오는 거야?”

정신없이 사이드를 휘두르던 메이가 물었다.

이번만큼은 전요한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어. 하지만 위험한 녀석이라는 건 확실해.”

질투의 죄악 같은 마계 군주는 아닐 터였다.

얼마 후, 소환 제단 위에 차원 통로가 생각나더니 이형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천사, 예카자엘.

하나의 세계를 멸망시킨 적이 있는 재해급의 「검은 별」이었다.

“결국 강림했네요.”

필사적으로 영계 마법을 시전하던 시르케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새로운 적대자와 맞서는 수밖엔 없다.

어느덧 투명한 결계가 인근 지대를 봉쇄해버린 상태.

이차원에서 넘어온 타천사는 곧바로 모두에게 시련을 내렸다.

[메인 미션 #1]

명칭: 무간지옥

내용: 매일 한 명 이상을 죽이면서 일주일간 생존할 것

제한: 없음

보상: 악명에 비례한 차등 지급

기타: 실패 시 데스 매치

노골적인 내용의 생존 경쟁.

타천사라 그런지 시련의 형태가 무자비했다.

“일주일 동안이나 지옥 체험을 해야 하는 건가요.”

“빌어먹을….”

졸지에 휘말린 일행은 대체로 나쁘다는 반응이다.

물론, 절대악 성향의 무리는 그와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인이라, 눈치 볼 필요 없어서 좋군그래.”

“민간인도 많이 있을 텐데 학살하는 재미가 쏠쏠하겠어.”

양쪽의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려는 찰나였다.

타천사, 예카자엘이 손을 들어 올리자 한 명씩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어?”

“뭐지?”

생존자들이 공간 이동한 장소는 소환 제단의 바깥쪽이었다.

모두가 한자리에 전부 모이게 되자, 상당한 소란이 일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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