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위험한 게임 (3)
소위 무림인에 해당하는 자들은 일대일 상성이 뚜렷하지 않다.
딱히 무구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보유한 무공의 유형에 따라 전투 스타일도 각기 다른 탓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최태민이 전요한보다 성장력 면에서 몇 단계는 뒤처져 있단 사실이었다.
[최태민]
북을 울리는 꼬마 병정.
앞으로의 사건에서 변주만 주다가 사라질 운명입니다.
이런 상대에게 너무 힘을 빼면 손해이니, 어설픈 도발에 무리한 수고를 하지 마십시오.
“넌 무대의 소품으로 쓰이다 버려질 운명이야. 지금이라도 개심하고 살길을 찾지 그래?”
“헛소리를 하는군. 난 그분의 기대를 저버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이어지던 권격이 더욱 매서워졌다.
하지만 가파른 성장을 거듭한 전요한에게 있어선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 정도는 가뿐하지.’
여유롭게 뒤로 몸을 젖히면서 시험 삼아 팔을 뻗어 봤다.
비록 무공을 배운 적이 있는 것은 아니나 이 정도의 격차라면 위협을 가할 수준은 된다.
퍼억!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최태민의 얼굴이 보기 좋게 뭉개졌다.
녀석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잠시 물러나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 설마 무공을 배웠냐?”
“아니, 이건 그저 서로가 극복해온 난관의 차이일 뿐이야.”
위험한 녀석들이 하이에나처럼 들끓던 대미궁에서 살아남은 고인물이다.
비록 환생을 하긴 했지만, 성장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라서 대적할 자가 별로 없었다.
“진정한 시련은… 너희에게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도발에 한풀 꺾여 있던 최태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녀석은 뭔가를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단순히 ‘자기암시’ 따위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더욱 궁금해지는걸, 그 시련을 위한 무대 설정이란 게 뭔지 말야.”
확신이 생긴 이상 봐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는 상태.
표정이 사나워진 전요한은 무자비한 검격을 날렸다.
“크윽!”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움직임에 최태민이 신음을 냈다.
무공으로 단련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으나 생채기가 생겨났고 이어서 허리가 깊게 배였다.
녀석은 왈칵 쏟아지는 피를 한쪽 손으로 막으며 눈을 부라렸다.
“네 녀석….”
“호신강기도 내 검격은 보호해주지 못하나 보네. 내공을 더 쌓아야겠는걸?”
“운만 더럽게 좋은 녀석이 이제 뭐라도 된 줄 아는구나.”
“그쪽도 운이 좋아서 헌터가 된 것 아니야? 순수하게 노력으로만 도달한 위치라 보긴 어렵지.”
이른바 운명의 장난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전요한이 계속 비아냥거리자 최태민은 입술을 비틀었다.
“크큭… 그래.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에 취해 있지.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생각해보지 않고 말이야.”
최태민은 더 저항할 생각이 없는지 움직임을 멈추고 헌터 집단을 까 내리기 시작했다.
주위에서 그의 잔당들이 차례로 쓰러지고 있는 상황.
여유로워진 전요한은 정보도 얻어낼 겸 이야기를 들어줬다.
“무슨 의미를 말하는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유적지가 생겨나고 일부 선택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졌지.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라고 볼 수 있어.”
“시험?”
“그래, 종말의 날이 찾아왔을 때 누구를 섬겨야 할지 선택하는 준비 과정. 다시 말해서 어느 존재의 권능이 더 위대한지를 깨닫기 위한 시험이지.”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지만 최태민은 종말론자였다.
그리고 죄악을 숭배하며 그로부터 구원받길 원하는 사도.
아르센의 입김이 있었는진 알 수 없어도 도저히 구제 불능이었다.
“너 같은 사람들을 어서 처단하지 않으면 조만간 또 귀찮은 일이 생겨나겠네.”
“이미 무대 설정은 대부분 끝났다. 네 녀석이 지금 끼어든다고 해서 의식을 막진 못해.”
자신이 이겼다고 여겼는지 최태민은 킬킬 웃어댔다.
그에게 한 방 먹여주려 했으나 멜리사가 끼어들어 선수를 쳤다.
콰앙!
육중한 검면이 간계한 표정을 짓는 최태민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
최태민은 억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졸도했다.
“뭐야? 생각보다 별것 아니네.”
“허리에 치명상을 입어서 치료를 위해 모든 내공을 거기로 집중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쨌거나 최태민이 쓰러진 이상 나머지 끄나풀들을 정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직까진 계획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상황.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기에 두 사람은 다른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 * *
사로잡은 최태민을 통해 아르센의 계획을 조사한 결과.
전요한 일행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바로 이세계로 연결되는 차원 통로를 열기 위해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단 점이었다.
‘자기암시’에 걸린 하수인들은 이세계의 유적지를 재현하여 거대한 소환 제단을 세우는 중이었다.
“좀비 사태와 달리 이번엔 외부적인 개입이 어렵겠네.”
“은밀하게 진행되는 음모이니 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나서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거야.”
메이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살핀 후 전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세뇌당한 하수인들을 잡아서 원래대로 되돌려 놓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궁극적인 원인인 네뷸러스를 처단하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삽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최태민을 처리한 후 아르센의 행방을 찾고 있을 때, 문득 전화가 걸려왔다.
“예상대로 제법 사건을 잘 진행하고 계시군요.”
발신자는 다름 아닌 아르센이었다.
전요한은 침착한 표정으로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슬슬 두 번째 힌트를 줄 차례인가 보네?”
“네, 성역화에 대해 알아내셨을 테니 한 가지 더 일러드리죠.”
아르센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한껏 고조된 어조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멜리사가 미간을 찌푸렸으나 끝내 입은 열지 않았다.
“그래서 뭐죠? 두 번째 힌트가.”
“죄악의 사도에 이어서 「검은 별」이 이 세상에 현신합니다. 새로운 흑막을 드리우고 무대 준비를 완성하지요.”
온통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있자 아르센이 사적인 이야기를 덧붙였다.
“당신과 저는 바로 그 시점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아직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긴장하는 게 좋을 거야. 지금 전력으로 뒤쫓고 있으니까.”
마지막 발언에서 전요한은 진심으로 아르센에게 경고했다.
아르센은 낮은 톤의 웃음소리와 함께 전화를 끊는다.
이후 멜리사가 신경질적으로 시가를 입에 물었다.
“빌어먹을 자식. 언젠가 붙잡으면 극한의 고문을 시켜 주겠어요.”
“아르센과 전에도 이런 식으로 게임을 한 적이 있어요?”
“아뇨. 그냥 재수가 없잖아요.”
이제 그만 악연을 끝내고 싶어 하는 멜리사였다.
“아무튼, ‘검은 별’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죠. 지금은 다른 것보다 그게 중요하니까요.”
말없이 시가를 피우는 멜리사를 옆에 둔 채 전요한은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메이가 가장 먼저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두 가지 가능성이 있겠네. 죄악의 권속. 아니면 검게 타버려 멸망해버린 세계의 잔재.”
죄악의 권속은 지난번처럼 재해의 발생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사전에 막아내는 것만이 정답이다.
“현시점에서 학원도시에 출현해 있는 게이트를 모두 조사해봐야 할 것 같아. 문제가 발생한다면 아무래도 거기일 가능성이 크잖아?”
잠자코 있던 채린도 일리가 있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어서 의견을 종합해보자 인원이 모자란단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들을 동시에 확인해 보려면 아무래도 아는 이들을 전부 불러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위원회에서도 독자적으로 조사를 진행할 테지만, 그에 의존하기만은 어려웠다.
아르센이 이쪽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으니 굳이 현재 인원을 고수할 이유도 없고 말이다.
그래서 시르케와 실비아까지 불러들였고 재회를 기뻐하는 대화가 잠시간 서로 오갔다.
“오랜만이에요, 상급생 군.”
실비아는 아카데미의 훈련 교관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녀의 뜨거운 포옹을 받아들인 후, 전요한은 다시 입을 열었다.
“좀비 사태가 일어났을 당시처럼 초기엔 흩어져서 행동할 겁니다. 소질에 맞게 조 편성을 해서요.”
게이트를 조사하는 일은 멜리사와 채린.
소환 제단의 위치를 추적하는 건 메이와 시르케.
이번 사건의 주동자인 아르센을 처단하는 건 전요한.
실비아를 비롯한 아카데미의 교관들은 각자의 판단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 * *
아르센의 흔적을 쫓아 인파가 없는 곳까지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잠시 쉬다 가세요.”
“눈치 보지 말고 어서 들어와요.”
홍등가에 도착하자 호객 행위를 하는 윤락녀들이 팔을 잡아끌었다.
지저분하다 여긴 전요한이 손길을 뿌리쳤다.
말없이 동행하던 실비아가 고개를 들며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상급생 군은 이상형이 어떻게 된다고 했죠?”
“…딱히 없어요. 그런 거.”
훈련 교관하고 나누는 대화라기엔 조금 사적이었다.
그리고 실비아는 북유럽계의 미녀였기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저런 미녀랑 같이 데이트하다니, 부럽군.”
“눈치 보다가 재미를 보겠지? 상상만 해도 질투가 나네.”
멋대로 오해를 하는 모습이다.
전요한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실비아는 생글생글 웃으며 더욱 곁으로 달라붙었다.
“상급생 군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사제지간이라고 해서 너무 선을 그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런 말 때문에 더욱 민감해지는 거라고!
커다란 볼륨감을 느낀 전요한이 머리를 긁적이던 때였다.
저만치서 걸어오는 취객에게서 흉흉한 살기가 느껴졌다.
비수를 숨긴 채 다가오는데, 목적은 뻔하다.
“위험한 눈빛이네요.”
“제가 처리할게요.”
전요한은 기다렸다가 취객을 단번에 제압하려고 했다.
그런데 눈치가 빠른 녀석인지, 경계가 강화되자 곧바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한다.
“거기 서!”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한 무리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
이번엔 아르센의 하수인들이다.
그 수가 제법 많았기에 실비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 놓치면 안 돼요. 소란이 일더라도 전력으로 추격하죠.”
“알겠습니다.”
달리 방법이 있는 건 아니나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마치 잘 짜인 각본대로 놀아나는 기분이랄까.
그동안 놓친 것이 없는지 되짚어 보던 전요한.
일순간 붉은 섬광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
일종의 미래시.
꽤나 오랜만에 발동하는 것인데 그 예감이 심상치 않았다.
전요한이 잠시 주저하자 실비아는 먼저 앞질러 나갔다.
“시간이 없어요! 알아서 뒤따라오세요!”
그녀는 유려한 움직임으로 적진을 파고들었고 곧이어 단말마와 함께 피바람이 불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인가.”
유혈이 낭자하는 홍등가를 보며 전요한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극도의 혼란.
그리고 대량의 유혈 사태.
저번에 질투의 죄악이 강림했을 당시와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이번엔 이세계로 통하는 차원 통로를 개방한다고 했었지.’
무슨 목적으로 그런 짓을 벌이려는지 짐작이 오기 시작했다.
저들은 이세계의 존재들을 여기로 불러들이거나 하여, 차원 간의 분쟁을 일으키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여신이 피하고자 했던 서열전은 다시금 강요받게 된다.
“당신은 이제 막지 못합니다.”
“패배를 인정하고 앞으로 닥칠 혼란에서 살아남는 것이나 걱정해야 하겠죠.”
고민하는 전요한에게 달려들면서 아르센의 하수인들이 조롱해왔다.
그 모습이 아니꼬웠기에 우선 녀석들부터 제압했다.
「녹티스의 격노」.
주위가 얼어붙을 듯한 살의에 하수인들이 움찔하고 공격을 멈췄다.
그 틈을 타서 파고들자 새롭게 피의 궤적이 펼쳐졌다.
‘왜 간과하고 있었던 걸까.’
이런 가능성을 처음부터 전혀 고려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에 집중하다가 놓친 부분이 있을 뿐이다.
어둑한 저 너머를 응시하자 그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벌써 나설 시간이 됐어?”
메이.
얼마 전에 사념 대화를 주고받았기에, 그녀는 이쪽으로 지원을 온 것이었다.
뒤이어 시르케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전요한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네 도움이 필요해, 메이.”
“저번에 말한 그거?”
“맞아, 저번에 채취했던 혈액을 넘겨줄게.”
전요한이 눈짓을 하자, 시르케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샘플을 건넸다.
메이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으음… 그자의 숨소리가 느껴져.”
추적은 금방 이루어졌다.
그녀가 감지 가능한 범위에 아르센이 있었다.
‘몰래 숨어서 훔쳐보고 있었던 건가?’
먼저 추격하러 간 실비아는 이따가 불러오기로 했다.
이번 기회에 아르센과 결판을 내야 할 터.
이전부터 기다려왔던 순간이었기에 전요한은 눈을 반짝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