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위험한 게임 (2)
아직 저들은 일행이 단순한 고객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뒤늦은 현실 인식을 비아냥거리며 멜리사가 내부로 들어왔다.
“밖에서 통제하던 인원은 잠시 눈길을 돌려놨어요. 미인계를 쓰니까 바로 먹히던걸요?”
“뭐, 뭣이….”
“그렇다면 목적이 있어서 온 거냐? 아무래도 위원회에서 일하는 작자들은 아닌 것 같은데.”
밀거래 무리는 당황하면서도 일행을 끝까지 적대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마약이 급해서 생색내기를 하는 것이라 여긴 모양이다.
여기서 정색을 하고 곧바로 추궁할 수 있었지만, 전요한은 저들이 계속 착각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 좋은 걸 왜 당신들끼리만 거래하고 그러시죠? 매물도 충분해 보이는데 저희에게 좀 파세요.”
“당돌한 놈이군.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요구이긴 한데 저 아리따운 여성분을 봐서 기회는 주지.”
“야, 대표님이 알고 징계 처분 내리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어차피 저놈들 입 막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까.”
“쳇… 오늘 영업은 꼬였네.”
밀거래 무리 중 공급책으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결국 수긍했다.
이후 그는 헛기침을 하더니 전요한과 메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제법 낯빛이 밝은 게 약에 찌들어 사는 부류는 아닌 거 같은데 혹시 이쪽에 종사하는 사람이야?”
이건 일종의 유도 신문이었다.
저들은 소비자를 원할 뿐, 시세 차익 따위를 노리고 매물을 구하려는 장사꾼은 철저히 배제한다.
“아닌데요. 최근에 발을 들여서 그런 거니 경쟁자로 몰아가지 말아주세요.”
“흠… 그럼 직업이 뭐지? 우린 신원이 불확실한 고객은 받지 않아.”
먼저 거래를 하던 이들을 보낸 후 공급책인 사내가 재차 질문을 던져왔다.
이번엔 멜리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위원회에서 선임한 공략대장이야. 비록 하급이긴 해도 영향력만큼은 소형 길드장에 버금가지.”
“오호, 역시나 헌터셨구만. 막공을 운영하는 직책이면 확실히 환단을 공급받을 자격은 있어.”
환단(幻丹).
복용시 ‘자기암시’가 걸리는 각성제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주로 유력가들에게만 거래 권한을 주는 걸 보면 목적은 뻔했다.
그들을 동원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만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꼬리를 자르기 쉬우니 비밀은 충분히 보장된다.
‘이 녀석들도 단지 끄나풀에 불과한 존재겠지.’
환단이 유통되는 본목적은 모르고 그저 대표란 자가 시키는 대로만 하며 돈벌이에만 매달려 있다.
조금 더 상위 관리자와 접촉할 필요성이 있었기에 전요한은 연기를 계속했다.
“그럼 오늘부터 물량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성급하게 굴지 마. 내부적인 절차가 있으니 승인이 떨어질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고.”
철저한 유통 관리를 위해 환단은 고객의 수요에 맞게 엄밀히 공급량이 조절된다.
사내들이 휴대폰으로 뭔가 연락을 취한 후 얼마 안 있어서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 대담한 분들이 오셨군요. 이런 식으로 보고가 올라온 건 처음입니다.”
대표라 불리던 자는 아닌 것 같은데 나름 서열은 높아 보인다.
“당신이 팀장입니까?”
“네, 일반적인 실무는 제가 총괄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어디서 정보를 입수한 건지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팀장은 환단의 존재가 외부적으로 누설된 것에 대해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본 멜리사가 적당히 핑계를 대며 팀장을 안심시켰다.
“뭐, 이런 데서 거래하는 거 딱히 비밀스러운 일도 아니잖아? 조금만 수소문하면 알 수 있어.”
“아무래도 연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깊이 캐묻진 않겠지만 신원 확인은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팀장은 혹여 일이 잘못될까 두려운지 매우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이쪽에서 순순히 대화에 응하자 점차 말투가 누그러들었다.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저희가 먼저 제안을 하는 식으로 영업을 하거든요.”
“그럼 절차는 모두 끝난 겁니까?”
“네, 오늘부터 거래하실 수 있습니다. 수량은 얼마나 필요하신지요?”
팀장이 테이블 위에 수상한 가방 하나를 올려놓았다.
이후 그가 비밀번호를 조합하자 락이 풀리며 수많은 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마죠?”
“일주일 분량이 12만 원입니다. 다만, 공급 문제로 한 달 치 이상은 거래가 어려우니 이해해 주세요.”
지속적인 관리를 위해 일부러 조금씩 물량을 푸는 모양이었다.
이쯤 하면 됐다고 판단한 전요한은 멜리사에게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미묘한 미소를 지은 후 팀장의 앞으로 걸어왔다.
“혹시 고가의 물건으로 대체해도 될까요? 현금보다 더 나을 텐데요.”
“그게 뭐죠?”
“예전에 우연히 얻은 유물인데 팔면 못해도 수백만 원은 할 거야.”
고혹적인 표정의 멜리사가 가터벨트에 숨겨둔 채찍을 풀어서 들어 올렸다.
그것을 본 밀거래 무리의 시선에 점차 공포감이 어렸다.
“어어…?”
멜리사의 조련은 이렇게 뒷조사를 할 때 유용하다.
찰지게 후려치는 채찍질을 들으며 전요한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 * *
사로잡은 밀거래 무리를 통해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대표의 정체.
현직 헌터인 최태민이란 자가 환단 유통의 흑막이었다.
게다가 아르센이 언급했던 ‘죄악의 사도’일 가능성도 크다.
“중형 길드장이면 돈도 많이 벌 텐데 이런 일까지 돈을 대다니… 조금 의외네요.”
함께 서류를 뒤적이던 멜리사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채린과 메이도 그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길드원들을 부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나 봐.”
“굳이 현실 세계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이유를 모르겠네.”
기본적으로 헌터는 사회에서 상위 계층에 속한다.
물론 전투에 유용한 스킬을 지니고 있단 가정하에 말이다.
유적지를 공략하는 일이 위험하긴 해도 일반인의 몇 달 치 이상에 달하는 수익을 벌 수 있다.
따라서 일단 돈 문제는 아닐 터.
옆에서 지켜보던 시르케가 개인적으로 짚이는 점을 이야기했다.
“이쪽 세계에 대한 뒤틀린 시각 때문일 수 있겠죠. 아니면 본래 쾌락주의에 가까운 성향이든가요.”
혹은 ‘자기암시’가 걸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최태민을 어떻게 붙잡을지 논의하고 있을 때, 멜리사가 줄곧 쳐다보던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최근 이쪽 지역에서 의문스러운 사건이 자주 발생하고 있어. 이건 ‘자기암시’에 걸린 사람들이 점점 늘어남을 의미해.”
다시 말해서, 그들은 최태민이 부리는 하수인들이나 다름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피아 식별이 어려우니 대책 없이 움직이다간 이쪽의 존재가 언제 들통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에 사로잡은 녀석들을 이용하는 편이 일을 좀 더 수월하게 만들 수 있을 터.
전요한은 회의실의 소파에 앉아 있던 팀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최태민에게 의심을 사지 않고 접근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뭐지?”
“…대표님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인 것처럼 위장하는 게 제일 가능성은 클 겁니다.”
팀장은 끄나풀 중에서도 가장 서열이 높은 위치라 유용한 정보가 제법 있었다.
그를 통해 최태민에 대해 이것저것 파악할 수 있었다.
“예전부터 유흥 쪽으로 발을 붙이고 있던 인물이었네. 속물적인 위원회원하고도 연결점이 있어.”
역시 부패한 권력과 결탁한 유형이었다.
‘’대충 어떤 유형의 인간일지 머릿속으로 상상이 가네.’
대충 뒷조사도 끝났겠다, 남은 건 최태민을 은밀한 장소로 불러내는 일이었다.
위원회장으로부터 지급받은, 수사용 휴대폰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이후 무뚝뚝한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누구지?
제법 성가셔하는 기색도 느껴지는 게,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 같다.
전요한은 밀거래 무리로부터 입수한 정보로 침착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저번에 내렸던 지령은 잘 수행하고 있나?”
연기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네뷸러스의 아르센이었다.
음성 변조 장치를 사용하고 있어서인지 최태민은 별다른 의심 없이 속아 넘어갔다.
- 아, 네. 환단의 유통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대의 설정도 어느 정도 완료되었고요.
무대의 설정이라.
정확히는 몰라도 아르센이 예고했던 다음 범죄에 대한 것일 터다.
좀 더 캐묻고 싶었으나 인내심을 갖고 대본대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일정이 조금 변경되었다. 전해줄 것이 있으니 오늘 밤 네가 관리하는 클럽으로 나와라.”
- …네, 알겠습니다.
최태민은 고분고분하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멜리사가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드디어 네뷸러스의 하수인을 붙잡을 수 있겠군요!”
“많이 기대되시나 봐요?”
“당연하죠! 네뷸러스는 관리국에서 오랫동안 뒤를 밟던 집단이에요!”
악마를 추종하는 비밀 집단.
네뷸러스는 현세에 게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한 후로 은밀한 활동을 계속해왔다.
그들이 일으키는 혼란을 막지 않으면 함께 휘말려 곤란한 일을 겪어야만 할 터다.
전요한은 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재확인하며 캣시를 쓰다듬었다.
“냐옹!”
하품을 하던 캣시가 곧장 발톱으로 응징을 가해왔다.
* * *
최태민을 클럽에서 보기로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배경이 현세인 만큼, 소동이 벌어지더라도 빠른 정리가 가능해야만 한다.
해서 위험 부담이 조금 있더라도 적진 깊숙이 들어갈 필요성이 생긴다.
최태민만 빠르게 제압할 수 있으면 후속 조치는 한결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최대한 다른 부하들이 다른 데 신경 쓰도록 유도해.”
시끌벅적한 내부로 들어서기 전, 전요한은 밀거래 무리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녀석들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분주하게 몸을 움직였다.
‘자기암시’가 제대로 걸려 있는 덕분에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이후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을 때 메이가 확인 차원에서 질문을 던져 왔다.
“최태민은 무림인이라고 했지?”
“응, 듣기에 좀 미묘하긴 해도 정식 명칭은 그게 맞아.”
무림인.
신체강화 계열의 능력자와는 좀 다른데,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무공을 사용한다.
그래서 눈에 띄는 무구가 없고 실은 기능상으로 도복이 모든 걸 대신했다.
“아마 쉬운 상대는 아닐 거예요. 그래도 중형 길드를 이끄는 자니까요.”
“최태민은 확실히 사로잡을 테니 다른 녀석들을 부탁드립니다.”
조심하란 멜리사의 말에 전요한은 걱정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문제가 되는 건, 최태민이 부리고 있는 창천 길드의 수하들.
그들 중 몇몇이 동행했을 테니 다른 동료들에게 다른 전투는 맡겨야 했다.
“여기가 귀빈실이구나. 은밀한 목적으로만 이용된다고 하는….”
떠들썩한 인파를 헤치며 미궁 같은 통로를 나아가자 막다른 길에 심상치 않은 철문 하나가 보였다.
메이가 눈빛을 보내자 전요한은 팀장에게서 받았던 인식표를 보안 장치에 갖다 댔다.
스르르륵.
마치 군사 시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굳건하던 철문이 자동으로 천천히 밀려났다.
그 내부로 들어선 일행은 사방에 가득한 악마적인 의식의 흔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이건….”
“수상한 짓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군요.”
혈흔까지 남아 있는 걸 고려하면 의식을 통해 희생양을 바쳤을 가능성도 있다.
모두가 질린 표정을 하고 있을 때, 한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은 누구지? 여기로 들어오려면 최소 김 팀장의 허락이 있어야 할 텐데.”
최태민.
연예인처럼 스타일 있게 차려입은 그가 부하들과 함께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다들 전투에 대비해!”
“응!”
“알았어!”
전요한의 지시에 일행이 다급히 자세를 갖췄다.
그 모습을 본 최태민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오, 침입자인가? 의외로군.”
“그러시겠지. 넌 그저 네뷸러스의 끄나풀일 뿐이니까.”
“끄나풀이라… 하긴, 틀린 말은 아니군. 어떻게 우리 일을 알아냈는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처리해 주겠다.”
적대 의사를 비친 최태민이 능력을 개방하며 전투 모드로 돌입했다.
서슬 퍼런 기운이 어린 그의 도복을 보며 전요한은 아르티나를 소환했다.
녀석에게 달려들기에 앞서 무언의 무력 행사를 실행에 옮겼다.
무형의 뭔가가 발산되는 느낌과 함께 주위에 서슬 퍼런 위압감이 형성된다.
광전사의 격노.
이번엔 단순히 경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날뛰려는 목적에서다.
예상대로 최태민의 부하 일부가 경직된 표정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일행은 잽싸게 그 틈을 파고들었다.
콰쾅! 콰콰쾅!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라 소음이 상당했다.
하지만 어지간히도 방음이 잘되어 있는지, 외부에서 도우러 오는 이는 없었다.
“아르센이 뭘 꾸미고 있는지 전부 말해 줘야겠어.”
“네놈이 그분의 상대가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허를 좀 찔렀다고 너무 기고만장하지 마라!”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최태민은 이내 노기를 드러냈다.
주된 공격 수단은 위협적으로 여러 급소를 노리는, 내공이 실린 권격.
이리저리 피하던 전요한은 녀석을 향해 실력 행사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음 편에서 계속)